독서노트/<엔도 슈사쿠>

<깊은 강> 신은 그 어디에도 없다. 하지만 그 모든 것에 깃들어 있다.

묭롶 2017. 7. 20. 23:30


  「인간이 이토록 슬픈데

주여, 바다가 너무도 푸르릅니다.」-침묵의 비(碑)


  소토메 지역에 있는 엔도문학관의 한 귀퉁이에 새겨져 있는 엔도의 글을 읽는

순간 폭우를 가까스로 지탱하는 댐과 같았던 내마음 한구석이 한꺼번에 와르르

무너져내리는 것 같았다.    그 어디에서도  그 누구에게서도 그 무엇에서도 이토록

크게 위로받은 적이 없었다. 


  인간의 삶은 저마다의 과정이고 저마다 주어진 몫이지만, 그 과정에서 생기는

질문에 답을 해주는 존재는없었다.  인간의 본질적인 슬픔 앞에서 언제나 신은

침묵했고, 답이 없는 삶을 살아가는 저마다의 좌충우돌을 목격하면서도 우리는

서로 자기 코를 닦기에 바빴다.  그런 처지에 누가 누굴 위로할 수 있단 말인가!


  내가 이젠 끝장이라고 느꼈던 그때, 난 신에게 지금까진 나를  외면했지만 단 한번만 도와달라고 기도했다. 

하지만 이번에도 응답은 없었고 죽지 못해 살아서 또 출근을 해야했던 나는 무신론자가 되었다.   물론

기독교를 종교로 가졌던 때에도 나는 눈에 보이는 곳에 선악과를 심어두고 그걸 먹지말라고 하는 신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리고 기독교를 믿으면 악인도 구원을 받아 천국을 가지만, 아무리 착하게 살아도 하나님을 믿지 않으면

지옥을 간다는 논리에 대한 반감이 상당했다.  교회에서 이런 얘길 교인들에게 하면 대부분 나에게 시험에 들었다며

더 열심히 기도하라고 충고했지만 그들의 표정에 실린 무언의 금기가 나를 무겁게 짓눌렀다.


  지금도 솔직히 나는 기독교에 갖는 반감이 강하다.  반감의 가장 큰 원인은 기독교가 갖는 타종교에 대한 배타성에

있다.  치누아 아체베의 소설 『모든 것이 산산이 부서지다』에는 두 명의 목사가 등장한다.  원시종교와 부족의

규율에 의해 살아가던 우무오피아 종족들에게 개신교를 전파하기 위해 처음 우무오피아에 정착한 브라운 목사는

토착민의 종교와 문화를 존중하며 그들과 함께 공생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가자고 말했다.  브라운 목사가

먼저 내미는 손에 화답하여 토착민의 지도자는 협력과 공생을 약속했고, 브라운목사는 모든 곳에 존재하는

하나님의 사랑을 그들이 느끼기를 바랬다.  브라운목사가 설파하는 하나님은 가장 천한 막달라 마리아마저도

감싸는 사랑이었지만 브라운 목사의 후임으로 온 스미스 목사의 하나님은 예루살렘의 예배당을 어지럽히는

장사치를 채찍으로 내어쫓는 엄한 징벌의 하나님이었다.  결국 스미스는 저항하는 부족민들을 무력으로 제압하고

자신들의 문명과 종교를 그 희생의 제단 위에 세웠다.


  『깊은 강』의 등장인물 오쓰가 브라운 목사와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쓰는 일본인이지만 어머니에

이끌려 종교에 입문한 후 세례를 받고 카톨릭 수사가 되기 위해 노력했던 인물이다.  그는 맹목적으로 카톨릭의

교리를 받아들이는 것에 반감을 갖고 있다.  카톨릭의 불모지나 다름없는 일본에서 카톨릭이 주장하는 교리를

펼치기 위해서는 일본문화에 맞는 방법이 필요하다고 오쓰는 주장하지만 그의 주장은 유일신을 교리로 삼는

카톨릭의 교리에 위반되는 이단으로 취급된다.



「돌연 누마다는 그 구관조에게 "어떡하면 좋으니?"  라고

소리쳤을 때의 제 목소리를 떠올렸다. 

(그래서 그 녀석.........내 몸을 대신해 준 건가.)

~자신의 인생에서, 개와 새나 그 밖의 살아 있는 존재들이

얼마나 그를 지탱해 주었는가를 느꼈다.

~이때도 누마다의 눈꺼풀에는 "하, 하, 하" 하고 웃는 구관조와,

책장 위에서 그를 멍청하다는 듯이 내려다보는 코뿔소새가

아른거렸다.」p123


  결국 오쓰는 카톨릭의 제도하에서 정식 수사가 되지 못했지만 그는 작중에서 양파라고 명명한 신의 사랑을


사람들에게 몸소 전파하기 위해 인도 바리나시의 갠지스 강가에서 시체를 나르는 일을 자청한다.  나는 그의

무모하고 요령없는 실천하는 사랑에 답답함을 느꼈지만 한편으론 만약에 신이 있어 인간을 돕는다면 오쓰와

같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만약에 신이 실체성을 지닌 어떠한 존재가 아니라 실천하는 인간의 고귀한

행동과 동식물이 지닌 호의적인 에너지에 담겨있다면 어쩌면 우리는 존재하지 않는 신을 매일같이 만나고

숨쉬고 공감하는건지도 모른다.


  『깊은 강』에서 가장 감동적이었던 부분은 서양의 마리아 와는 다른 모습의 인도 여신 차문다에 관련한

부분이었다.


  「" 난 말야, 미얀마 전선에서 죽을 뻔했는데,

이 비쩍 마른 상을 보니 빗속에서 죽어간 병사들을 떠올리게 되는군, 

~그리고 병사들 모습이...........다들 이랬지.."

"그녀는.........인도인의 괴로움 전부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오랫동안 그들이 고통 받아 온 모든 질병에, 이 여신은 걸려 있습니다.

코브라와 전갈의 독에도 견디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그녀는......헐떡이면서,

쭈그러든 젖가슴으로 인간에게 젖을 주고 있습니다. 

이것이 인도입니다.

이런 인도를 여러분께 보여 드리고 싶었습니다."」p210


  인도의 차문다 여신상을 보며 작중인물 기구치가 느끼는 감정을 나도 똑같이 느꼈다. 

예수를 안고 있는 피에타상의 마리아가 예수의 죽음으로 상징되는 이미 결정된 과거의 시간을 포용한다면

『깊은 강』에 나오는 인도의 차문다 여신상은 인간의 현재를 보듬는다.  피에타상이 과거의 상처를 어루만져

준다면 차문다 상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 내일을 살아가야할 우리에게 쭈그러진 젖가슴을 내어주는 것이다.


「"갠지스 강을 볼 때마다 저는 양파를 생각합니다.  

갠지스 강은 썩은 손가락을 내밀어 구걸하는 여자도,

암살당한 간디 수상도 똑같이

거절하지 않고 한 사람 한 사람의 재를 삼키고 흘러갑니다. 

양파라는 사랑의 강은

아무리 추한 인간도 아무리 지저분한

인간도 모두 거절하지 않고 받아들이고 흘러갑니다."」p280


  엔도 슈사쿠가 자신의 생의 마지막 투혼으로 길어올린 『깊은 강』은 인도를 찾은 네 명의 작중인물을

통해 과거에 어떻게 살았는가가 중요한게 아니라 실제(實際)하는 내 자신을 받아들이고 앞으로 한발을 다시

내딛을 용기를 준다.  이 책이 주는 큰 감동의 실체가 바로 여기에 있다.  인간에게 감동을 주는 책은 많다. 

하지만 책을 통해 자신의 삶을 돌아보게 하고 또 그 결과 통찰력으로 나아가게 하는 책은 많지 않다.  무신론자인

나마저도 신은 없을지 모르지만 내 주변을 둘러싼 세상 곳곳에 사랑이 깃들어 있음을 발견하게 하는 귀중한

경험을 이 책을 통해 하게 되었다.   참 고마운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