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노트/<다자이 오사무>

다자이 오사무의 <인간 실격>과 성석제의 <투명인간>을 통해 소설문학의 현실인식을 살펴보다.

묭롶 2017. 6. 24. 19:56



  참 절묘하다.  다자이 오사무의 『인간 실격』을 읽고 2014년 출간된 성석제의 『투명인간』이 떠올랐다.

 실제로 두 책을 비교해보니 책 표지에 실린 그림의 화가도 동일했다.  이 무슨 일이란 말인가?  난 표지에 실린

에곤 실레라는 화가를 최근까지 알지 못했다.  그런데 내가 2014년도에 읽었던 책과 연관성 있어 보인 작가의 책 표지

화가가 같다니 참 신기할 일이다.  물론 이 두 작가와의 작품 사이엔 1948년과 2014년이라는 66년이라는 시간차가

존재하지만 반백년이 넘는 시간에도 불구하고 이 두 작품을 연결짓게 만드는 동인은 어디에 있을까?  


  어쩌면 그 동인이 같은 작가의 작품으로 표지를 만들게된 이유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본다. 

이 두 작품은 당 시대의 문제점을 한 인간을 통해 드러낸다는 공통점을 지닌다.  이 공통점은 소설문학이 인간문명에서

갖는 값진 지위를 보여준다.  현 시대의 문제점을 드러내는 여타의 장르와는 달리 소설문학은 있음직한 허구를 통해

독자를 감정이입의 세계로 초대함으로써 허구가 야기하는 실제의 실체성을 독서의 결과물로 쥐어준다.  그 결과 독자는

갈수록 심화되어 오히려 피부에 와닿지 않는 실제를 독자의 추체험의 세계로 가져옴으로써 어떤 하나의 결과물, 우리가

감수성이라고 말하는 결과물의 총화로 건져올린다.  내가 생각하는 소설문학의 값진 지위는 바로 여기에 있다.


  1930년대 중반 일본은 온 열도가 태평양 전쟁, 즉 신성한 황군이 제패하는 확장된 국토에 대한 환상이 열도를 지배했다.

그 열기의 뜨거움 만큼이나 패전의 충격과 그 이후 일본의 정세는 그 국가에 속해 살아가야 하는 대다수에게 환멸과

배신감을 안겨줬다.  국가가 총력을 기울여 그 상처를 덮고 기만하기에 급급했을때 그 시대를 살아가는 인간의 환멸을

백일하에 드러내는 작품을 보며 그 시대 사람들이 느꼈을 사이다의 감성이 느껴진다.  내려가지 않는 체기와 같은 현실의

치부를 드러냄으로써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그를 둘러싼 환경이 문제였음을 깨닫는 문제의식과 현실인식은 소설문학만의

큰 강점이다.


「뭐든 상관없으니까 웃게만 만들면 된다. 

그러면 인간들은 그들이 만하는 소위 '삶'이라는 것 밖에

내가 있어도 그다지 신경 쓰지 않을지도 몰라. 

어쨌든 인간들의 눈에 거슬려서는 안 돼.

나는 무(無)야.  바람이야.  텅 비었어.」p19 『인간 실격』


  온 나라가 월드컵의 열기로 뜨거웠을때 미군의 장갑차에 깔려 산화한 효순, 미선이의 이야기가 전혀 사회적 반응을

일으키지 않았던 그 이상했던 전체주의의 시기처럼 곧 승전보를 울릴 전쟁으로 온 열도가 들끊었다가 패전했을때의

일본을 상상해보자.  나 자신은 미칠것 같은데 아무렇지도 않게 연합군의 지배를 받아들이고 또 그에 대한 반대 의견은

공산주의로 매도된다고 생각해보자.  미치고 팔짝 뛰지 않을까 결국은 그 결과 미치는게 당연하고, 현실에서 자신의

자리매김을 포기한채 자살하거나 미치는게 당연하지 않을까?   그러한 시대적 공감대가 『인간 실격』에 담겨 있다.


「나는 오래도록 신용불량자였고 그때 은행이나 장사하는 사람들이

나를 사람으로 보지 않는 것 같았다. 

그러니까 경제적으로는 투명인간이었다.  」p363 『투명인간』


「보이지 않는 인간은 스스로를 투명하다고 믿는 것뿐일지도 모른다. 

착각, 맹신, 오해이거나 그저 이야기에 불과하거나. 

사람들은 그런 데서라도 희망과 위안을 찾으려 하니까. 

 ~이야기는 비록 이루어질 수 없다 해도 달콤한 위로가 되어준다.」p364 『투명인간』


  그럼 이제 성석제의 『투명인간』을 살펴보자.  대한민국에서 그 누구보다 열심히 살았던 김만수씨가 이 책의 주인공이다.

그는 착한사람이 복을 받는 전래동화와 달리 착해서 이용당하고 어떻게든 잘 살아보려는 욕심을 품은 죄로 '투명인간'

(사회적으로 無化된 존재, 신용불량, 어디에서도 사람 취급 못받는)이 되었다.


「이제 저는 죄인은커녕 미치광이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신에게 묻겠습니다.  무저항은 죄입니까?

~인간 실격.

이제 저는 더 이상 인간이 아니었습니다.」p131『투명인간


  일찍이 66년전 다자이 오사무가 사람구실을 못해서 '인간 실격'이라는 깨달음으로 적어놓은 소설이 다시 시간이 흘러

성석제의 『투명인간』'김만수'로 나타나다니 정말 시간이 흘러도 인간의 삶은 같고 그 인간을 둘러싼 시스템 또한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럼 이제 생각해보자.  그래서 어쩌란 말인가?  현실에 뿌리내리려 그 갖은 애를 쓰고도 바람에 흩날리는

민들레 홀씨처럼 흘러가버린 작품속 인물들을 보며 내 자신의 현재를 뒤돌아보게 된다.  나는 어디에 있는가?

내가 뿌리내리고 있는 연약한 지반 위에서 나는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내 위치를 자족하려 애를 썼던가!


  시스템이 제시하는 목표와 이상은 모두 허구이다.  제시되는 목표의 허구 여부를 판단하기에는 현재를 살아가는

실재를 견뎌야 하는 현대인들은 실존을 고민할 여유가 없다.  그저 살아내야할 현재를 소비하는 소비자로서 삶을

마감하는 것이다.  그런 소비자인 우리에게 다자이 오사무와 성석제는 닮은꼴인 그들의 작품을 통해 질문을 던진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단순히 『인간 실격』의 요조처럼 현실에 대한 최후의 보루로 자살할 것인가, 아니면

성석제의 『투명인간』 속 '김만수'처럼 개처럼 일해서 사회에서 사람 취급 못당하는 투명인간이 될 것인가.


  소설문학을 통해 이뤄지는 현실인식은 이와 같다.  현재를 살아내는 작중인물을 통한 추체험의 세계가 보여주는

총체적인 현실인식, 그리고 이후 선택은 우리에게 달려있다.  우리의 문제는 <햄릿의 죽느냐, 사느냐, 그것이 문제

로다>가 아니라 언제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살아가느냐에 달려있다.


「동전 세 닢은 돈도 아니었던 것입니다. 

그것은 그때까지 제가 맛보지 못했던

기묘한 굴욕이었습니다. 

도저히 더 이상 살아갈 수 없는 굴욕이었습니다.

~그날 밤 저희는 가마쿠라의 바다에 뛰어들었습니다.

~여자는 죽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살아남았습니다.」p68

ps.  세번째 자살시도를 했을때 이번엔 정말 성공할수도 있겠다는 불안감이 들었다.  그런데 다자이 오사무에게도

그런 불안이 있었다니 동질감이 느껴졌다.  삶이 누구에게나 짊어지지 힘든 짐이지만 짊어져야 할 이유가 없다면

결론 또한 쉬운 것임을 함께 깨닫는다.  결론은 내가 뿌리내린 나의 자리이다.  나의 자리매김이 내 인생을 결정

짓는거란걸 다시금 깨닫게 된다. 


ps2. 다자이 오사무의 「직소」를 읽으며 인간이라는 존재의 본질에 한발짝 더 다가간다.  불완전하고 너무나 나약한

존재로서의 인간, 그 비참함과 비겁함을 외피로 포장한채 아무렇지도 않게 살아가는 현대인, 그러나 본질은 너무

춥고 나약하고 빈약한 인간으로서의 동질성이 인간 존재에 대한 동질감과 더불어 내 자신에 대한 이해를 깊게 한다.

비로소 나는 내 방황의 실체를 깨닫게 되나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