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노트/<제인 오스틴>

<오만과 편견>을 통해 소설문학의 가능성을 엿보다.

묭롶 2017. 6. 15. 23:31


  『오만과 편견』을 읽고 살럿 브론테의 『제인 에어』가 떠올랐다.  1814년 출간된

제인 오스틴의 작품과 1847년 출간된 『제인 에어』는 닮은꼴이다.  1800년대 초를

살았던 『오만과 편견』의 작중인물 엘리자베스 베넷(부모의 신분이 귀족은 아니지만

중산층은 되서 청혼에 의한 결혼이 가능한)이 다아시(귀족가문)와 결혼하지 않았다면

1800년대 중반쯤에는 '제인 에어'(짝맞추기 결혼이 불가능한 가정환경으로 인해 자신의

생계를 스스로 책임지기 위해 가정교사가 된 인물)와 같은 환경에 처한 인물이 되지

않았을까란 생각이 들었다. 


「~말로는 걱정이니 불안이니 했지만,

받아들여질 것을 추호도

의심하지 않는 표정이었다.   」p219


「~그런데 이제, 두 자매의 소망이 그 애들의 결혼으로

실현되려는 순간에, 태생도 천하고 사회적 지위도 없고,

가문하고도 아무 관계가 없는 여자 하나가 방해하고 나서다니!」p486


  1800년대를 살았던 여성에게 결혼은 평생직장을 구하는 것과도 같았다.  지금 우리네 청년들이 평생직장인

공무원을 꿈꾸며 고시촌에서 스스로 자신을 감금시킨 것처럼 18세기, 여성들은 결혼하기 전까지는 가족을 떠나

스스로 살아갈 수 없는 처지였다. 

  현 시대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는 수험생들이 자신의 수준에 맞춘 급수의 시험에 응시하는것처럼 18세기 여성들에게는

자신의 태생적 환경에 맞춘 짝맞추기식 결혼을 거부할 능력이 부여되지 않았다. 


「~만약에 다아시 씨가 명예로나 애정으로나 사촌 분에게 매여 있지 않다면,

어째서 다른 선택을 하면 안된다는 건지요? 

그리고 만에 하나 제가 선택된다면,

어째서 제가 그분을 받아들이면 안 된다는 건지요?"」p486


  인간의 삶에서 한평생을 결정짓는 중대사인 결혼마저도 자신의 의사를 반영할 수 없는

삶이 당연하게 받아들여지는 세태를 바라보는 두 작가 '제인 오스틴'과 '샬럿 브론테'의 시점은 동일하다.  두 작가는

자신들의 작중인물을 전지적 작가 시점에서 바라본다.  이들이 관찰자 입장에서 얻고자 하는 효과가 바로 소설문학이

갖는 특별한 미학이자 다른 장르와의 대별점이다.  그 효과를 나는 '가능성의 제시'라고 부른다.


  사실 그대로를 싣는 기사와는 달리 소설은 현실을 기반으로 한 있을법한 이야기, 즉 허구를 다룬다.  현실을 뼈대라고

할때 작중인물들이 펼치는 가상의 사건들이 일으키는 이야기(허구)는 외피가 된다.  작가의 전지적 작가 시점은 바로

이 현실이라는 틀 위에 각종 장식을 통해 꾸며질 하나의 결과물을 조감하는 위치에 놓인다.  물론 18세기 이전에 발표된

소설들에서도 전지적작가 시점을 찾아볼 수 있지만, 그 소설들과의 차이점을 꼽자면 이 두 작가의 작중인물들이

철저히 작가의 작중의도에 의해 이성적으로 행동하는 인물들이란 점이다. 


「소설에는 인간 정신의 가장 위대한 힘이 표현됩니다.

인간 본성에 대한 가장 완벽한 지식,

인간 본성의 다양한 모습에 대한 가장 행복한 묘사,

재치와 유머의 가장 활력 있는 토로가

최고로 정제된 언어로 세상에 전달되는 것입니다.

-『노생거 사원』(제인오스틴 著) 서문 中


  같은 18세기 후반 발표된 빅토르 위고의 『레미제라블』이 일련의 허구를 통해 하나의 정서(슬픔과 감동)를 불러일으키는

것과는 달리 『오만과 편견』을 읽는 독자는 주어진 감동에서 벗어나 자신의 현실을 돌아보게 되고 그 과정에서 다른

'가능성'을 꿈꾸게 된다.    이러한 소설문학의 기능성이 극단으로 치달아 '사실주의' 소설(『구토』-'샤르트르')이 여타의

소설을 낭만주의의 폐단으로 치부하기도 했지만 소설문학의 '가능성 제시'는 여전히 '소설'이 지닌 큰 힘이자 대별점이다.


  『오만과 편견』이 발표된 시대에서 무려 이백여년이 지났지만 실상 외양만 일부 바뀌었을뿐 시스템은 동일하다. 

과거가 검은 상자에 담긴 물건처럼 누군가에 의해 꺼내어지지 않으면 스스로 탈출하기 어려운 상태라면 현재는 유리상자에

담긴 물건과 같다.  금방이라도 겉으로 보이는 세상으로 나갈 수 있을 것 같지만 역시 스스로 탈출하긴 어려운 상태, 그렇지만

왜 빤히 보이는데 밖으로 나오지 않느냐는 비난이 더해지는 시대가 지금이지 않을까?


  나는 생각해본다.  만약 내가 이 작품의 '엘리자베스 베넷'이었다면 나는 어떻게 했을까?  아마 이런 나의 궁금증이

작가인 '제인 오스틴'이 자신의 작품을 통해 하고 말하고 싶었던 것이자 스스로 자신에게 되묻는 물음이었을 것이다.

사실 그대로의 현실이 주지 못하는 가능성에 대한 사색을 오랜만에 친구하고 싶을 정도로 멋진 작중인물을 통해

할 수 있어 뜻깊다.  


「~전 단지, 제 자신의 의견에 따라,

영부인이건 혹은 저하고는 관계없는

누구의 의견이건 상관하지 않고,

제가 행복해질 수 있도록 행동할 작정일 뿐입니다."」p490


PS: 어쩌면 현실의 선택지에서 언제나 차선을 택했던 나와는 달리 18세기를 살았던 엘리자베스는 최선을 택하는

것 같아 그점을 되돌이켜보게 된다.  두번 살 수도 없는데 꼭 차선일 필요는 없지 않을까 싶은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