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노트/<페르난두 페소아>

<불안의 서>: 삶을 여행한 존재하지 않았던 남자의 기록.

묭롶 2017. 1. 31. 14:01

  저마다의 삶에는 제각각의 이유가 있을거라고 생각했던 시절이 있었다.


  분명 지금 이렇게 사는 건 아닌 다른 답이 있을거라고 그 답을 찾기 위해

방황하고 좌절했던 시절이 있었다. 


  내 눈에 보이는 내 자신의 모습을 받아들일 수가 없어서 보여지는 나에게서

느껴지는 혐오로 몸부림쳤던 시절이 있었다.


「나 없이도 태양이 떠오르고 그리고 진다.

나 없이도 비가 내리고 바람이 울부짖는다.

계절과 달, 시간은 나로 인하여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들이 사라지는 것 역시 나 때문이 아니다.  」p384


 
 나를 지켜보는 '나'를 피하기 위해 게임으로 도피하기 직전 마지막으로 구입한 책이 『불안의 서』다. 

삶에 대한 인식을 거부한 채 이년 넘게 게임에 빠져있는 동안 이 책은 내 책꽂이에 방치되었다. 

온라인 세계를 벗어나 오프라인의 세계와 화해하는 순간 나의 독서는 다시 시작되었다.  

『불안의 서』 를 구매한지 삼년여가 지나 이제 읽고서야 내 방황의 시절에 이 책을 먼저 읽었더라면

그렇게 오래 아파하지 않았을거란 생각이 들었다. 


「생각하지 않는 자는 행복하다.  ~동물을 닮은 자는 행복하다.

~그러나 우리는 단지 임시변통의 신화일 뿐이다. 

삶의 분장을 하고 살아감을 연기하는

허무와 망각의 단역배우일 뿐이다. 」p673


  모두가 삶에는 추구해야할 가치가 있으며 이를 이루기 위해 노력하는 삶을 강요할때 그 반대편에

『불안의 서』가 놓인다.  손바닥이 벗겨질 정도로 세게 잡아당겨야 한다고 믿었던 삶이라는 동앗줄을

내가 스스로 놓아버려도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이 책에서 발견하게 된다. 


  『불안의 서』는 포르투칼 작가인 페르난두 페소아의 작품이다.  자신의 자아를 대표하는 가상의 인물

소아레스가 의식한 삶의 기록이 이 책에 담겨 있다.  페소아는 왜 자신이 아닌 소아레스의 정서로

느끼는 삶을 기록했을까?  아마도 달리는 사람이 달리는 자신의 전체 모습을 볼 수 없듯이 삶을

살아가는 주체로서의 인간은 자신의 삶을 관찰할 수 없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이 책은 대상을

앞에 두고 정물화를 그리는 화가처럼 소아레스라는 인물의 삶을 관찰하는 페소아의 시점에서 작성되었다. 


그러나 나 자신 목적 없는 것들의,

부조리한 것들의 옹호자이므로,

(···)나는 나를 기만하기 위하여,

스스로의 이론을 배반하기 위하여 이 글을 쓴다.  

모든 고귀함 중에서도 가장 고귀한 것은,

사랑하는 이여, 이 모두가 진실이 아닐 것이며,

나는 이 모두를 한번도 진실로 여기지 않았다는

바로 그 생각이다. p554


 기존의 문단이 기록한 인간의 삶이 가공의 인물을 통한 상상력의 산물인 반면 소아레스라는 인물을

통해 그려낸 삶은 보편의 문단과는 다른 살아있는 구체성을 지닌다.  우리는 글을 읽을 때 글이 결국은

꾸며낸 거짓(신문기사일지라도 전달하는 정보의 사실과는 다르게 문자화된 기록은 실제의 사실과는

다르다)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하지만 이 책은 이 기록이 실체가 없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전제를

미리 알려줌으로써 오히려 삶의 실체에 다가간다. 


「그렇다.  우리 모두는 사라질 것이다. 

완전히 소멸할 것이다. 

감정과 장갑을 착용하는 존재는 아무것도 남지 않으리라. 

~모든 것은 그림자이고 휘몰아치는 먼지바람이다.」 p357~358


「살아간다는 것은 다른 존재가 된다는 의미다. 

어제 느낀 것처럼 오늘도 똑같이 느낀다면,

그것은 느낌이 불가능해졌다는 의미다. 

어제처럼 오늘도 같은 느낌이라면,

그것은 느낀 것이 아니라 어제 느꼈던 것을 오늘 기억해낸 것이며,

어제는 살아 있었지만 오늘은 그렇지 않은 것의

살아 있는 시체가 되었음을

의미한다. 」p185



  현재를 우리가 살고 있지만 결국 우리는 사라질 뿐이며, 우리의 구체성은 인류사의 어느 한 곳도

리터치할 수 없다는 사실에서 오는 안도감이 나를 위로해준다.  소아레스의 문장은 가면을 쓴 채 삶을

연기하는 나와 이를 지켜보는 '나' 사이에 화해의 징검다리를 놓는다.  이 생에서 누구나 저마다의 삶을

연기하는 실패자란 대목을 잃으며 가려운 곳을 누군가 긁어주는 듯한 시원함을 느꼈다. 


  이 책의 화자인 소아레스에게 삶(생활)과 잠(상상 혹은 의식)은 경계가 불분명하다.  작중 보조회계원인

그는 장부에 숫자를 기록하면서도 동양의 어느 부둣가에 정박중인 상선을 바라본다.  이 불분명한

경계는 여러개의 자아를 만들어낸다.  1번의 자아가 일상 생활을 수행하는 동안 2번의 자아는 크루즈

여행을 하는 식이다. 여기에서 모든 자아를 인식하는 나는 1번 자아의 인식 스위치를 꺼버리고 2번

자아가 인지하는 감각만을 선택해서 느낄 수있다.  고통과 불행에 대처하는 방식도 이와 같다. 

  고통을 당한 자아의 스위치를 꺼버리고 다른 자아로 인식을 옮기면 되는 식이다. 


「나는 결코 잠을 자는 것이 아니다. 

나는 살면서 꿈을 꾼다. 

아니 살면서 잠 속에서 꿈을 꾼다.

잠은 삶이다.  내 의식은 중단이 없다. 

잠을 자지 않는 한 혹은 잠이 깊이 들지 않는 한 나는

주변에서 벌어지는 모든 것을 감지한다. 

그리고 정말로 잠이 들자마자 꿈을 꾸기 시작한다.」p573


  나는 삶에 안녕할 뻔했던 교통사고 이후로 가끔씩 사실은 교통사고가 나서 나라는 주체는 사라졌는데

'나'라는 환영이 죽음을 인지하지 못한 채 살고 있다는 현재성을 꿈꾸는 건 아닌가라는 생각을 해본다.

나의 착각만큼이나 인간의 삶 속에서 그 실체성을 자각하는 건 힘든 일이다.  '이미 죽은 시체들의 활동'

이라는 페소아의 표현은 현대인의 삶을 단적으로 드러낸다. 


「그것뿐이다.···약간의 태양,

한 줌의 산들바람,

멀리서 시야의경계를 만들어주는 몇 그루의 나무,

행복해지려는 욕망,

흘러가버리는 시간에 대한 고뇌,

언제나 불확실한 과학과 언제나 밝혀지기를

기다리는 진리···그것뿐이다. 

다른 것은 없다.···그렇다, 다른 것은 없다.···」 p777


  의미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으며 내 삶의 구체성 또한 인지하는 순간 과거라는 기억 속에 먼지처럼

사라져버린다면 나는 오히려 그 아무것도 없음에 안도하며 더 편히 현재를 즐길 수 있지 않을까?

  영화 <그레이트 뷰티>의  '쉿!  이 모두가 거짓말이다'라는 마지막 대사처럼 현재가 인식하는 나의

착각 속에 존재하는 상상력의 산물이라면 행복도 불행도 나의 삶도 조금은 거리를 둠으로써 나자신의

화해를 이룰 수도 있겠다는 가능성을 꿈꿔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