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노트/<성석제>

<투명인간>누가 그들을 투명인간으로 만드는가?

묭롶 2014. 9. 1. 23:00

 

  어린시절 막연히 투명인간을 꿈꿨던 적이 있었다.  무언가를 내 마음대로 할 수 없던

시절, 투명인간은 무한한 가능성을 지닌 존재로 비춰졌다.   한편으론 TV속 투명인간이 썬글라스에 모자를 쓰고 옷을 입는 모습을 볼 때면 나는 왜 자신을 드러내기위해 그런

노력을 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어디든 눈에 띄지 않고 갈 수 있는데 왜 자신을 드러내고 사람들 속에 섞이는 것일까?

 

「하지만 나는 투명인간이라는 게 사람들에게 알려지는 것을 바라지 않는다. 

사람들 눈에 보이지 않는 투명인간이 사람들 눈에 띄기 위해

자신이 투명인간임을 과시한다는 건 자기모순이기도 하다. 

자전거 타는 사람들의 복장을 빌려 투명한 몸을 감추는 이유는 그 때문이다. 」p6~7

 

   세월이 흘러 투명인간의 본질을 깨달았다. 투명이 되기 위해서는 일년내내 사시사철 날씨나 계절에 관계없이 알몸이 되어야 한다는 것, 그리고 그 누구에게도 보호받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자의적으로 투명인간의 길을 택했지만 소외와 고립을

견디지 못하고 자신을 드러낼 방법을 갈구하는 투명인간의 모습은 인간의 본질을

고민하게 한다.

 

  경제학자들은 현재 한국의 경제상황이 십년 전 일본의 경제상황과 비슷하다고 말한다.  이는 역으로 현재 일본의

경제상황을 통해 앞으로 다가올 우리의 경제상황을 예측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지금으로부터 십년 전 일본은 장기 스테그플레이션으로 다방면에서 사회불안 요소가 불거졌다.  그중 소외와 고립은 가장 큰 사회문제로 대두되었다.  일본의 장기불황은

비정규직 양산과 국익을 위한 다수의 희생을 당연시하는 분위기 속에서 예정된 수순이었다.  고립과 소외로 인한 정신병리적

문제는 모두 개인의 문제로 치부되었고 소외된 다수는 사회화의 음지로 스며들어 많은 더 히끼꼬모리(은둔형 외톨이)와 고독사(孤獨死)를 빈번한 일상으로 받아들이기에 이르렀다.

 

  참 무서운 일이다.  『투명인간』은 이러한 사회병리적 예후(後)를 '투명인간'이란 단어에 압축해서 표현하고 있다. 

투명인간이 된 '김만수'를 알았던 사람들을 통해 재현되어지는 '김만수'라는 존재는 현재 사회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누구보다 열심히 살고 그렇지 않은 현실 속에서도 제대로 살아보려 노력했던 한 남자가 어떻게 투명인간이 되고 말았는지를

증언하는 목소리를 듣노라면 우리 주변에 그러한 사연을 지닌 '김만수'가 의외로 많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그런 사람들을 우리는 흔히 '사람구실을 못한다'고 표현한다.  우리는 자신에게 이득이 되는 사람에게 다가가기 위해 노력하고

내게 피해가 될 수 있는 인맥관계에서는 그 대상을 외면하고자 한다.  '사람구실을 못한다'는 말은 곧 '사람취급을 받지 못한다'는 말과 일맥상통한다.  유전무죄 무전유죄, 법 보다 주먹이 모두가 인정하는 또 하나의 사회법이 된 대한민국에서 '사람취급 못 받는 사람들'은 너무나 빈번한 일상이어서 뉴스감도 되지 못한다.

 

  자식의 억울한 죽음을 풀어달라는 세월호 유가족들은 목숨을 건 단식을 하고도 진상규명은 고사하고 대통령의 얼굴도 보지

못했다.  벙어리냉가슴이란 말이 있다.  하고 싶은 말을 하지 못하고 전하지 못하는 답답함을 뜻하는 말이다.  세월호 유가족은

말을 못하는 벙어리보다 못한 투명인간 취급을 당한 것이다.  비단 세월호 문제 뿐인가.  우리 사회에서 소외와 고립은 곧

사회적 매장을 의미한다. 

 

  경제원리를 우선하는 사회적 분위기와 비정규직 양산으로 인한 실업율의 급증으로 인해 각계의 전문가들이 곧 도래할

장기불황과 가계부채 급증으로 인한 중산층의 몰락을 예고한 바 있다.  성석제의 소설 『투명인간』에서 「~또 시신이 안 보인다는데요?  옷이랑 모자 같은 유류품은 있는데요.  ~시체가 사라진 게 올해 들어 벌써 몇번째인지 모르겠어요.  다리 위에 있는 카메라는 투신하고 난 다음에는 추적을 못하니까 정말 죽었는지 살았는지 확인을 해주지 못해요. 」p354~355는 현대인의

사회적 죽음(매장)을 '투명인간化'되는 사람들로 상징적으로 표현한다.  '투명인간化된 사람들'은 「나는 오래도록 신용불량자였고 그때 은행이나 장사하는 사람들이 나를 사람으로 보지 않는 것 같았다.  그러니까 경제적으로는 투명인간이었다.  」p363 와 같은 특징을 지닌 다.  그들은 자신들이 스스로의 의지가 아닌 사회에 의해 '투명인간化' 되었다고 증언함으로써 현재의

대한민국이 앞으로 낳게 될 다수의 투명인간을 예고한다. 

 

  저자인 성석제는 「보이지 않는 인간은 스스로를 투명하다고 믿는 것뿐일지도 모른다.  착각, 맹신, 오해이거나 그저 이야기에 불과하거나.  사람들은 그런 데서라도 희망과 위안을 찾으려 하니까.  ~이야기는 비록 이루어질 수 없다 해도 달콤한 위로가 되어준다.」p364 고 말한다.  작가가 평생을 가족을 위해 타인을 위해 헌신하고도 헌신짝도 아닌 투명인간이 되어 버린 '김만수'씨의 이야기를 구전되는 전래동화처럼 수 십명의 목소리를 빌어 우리에게 들려준 까닭은 무엇인가?  전혀 희망을 찾을 수 없는

이야기를 들려주는 작가 성석제는 매일 밤 가난한 지붕 밑에서 손주들에게 무서운 옛날 얘기를 들려주던 할머니와도 같다.

어린 아이들이 듣는 동안 무서워하면서도 매일 밤 이야기를 조르게 되는 것처럼 성석제는 무서운 현실 속에서도 우리의 이야기는, 또 투명인간일지라도 인간이라면 그 모든 이야기는 끝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말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