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노트/<파스칼 메르시어>

<리스본행 야간열차>내 삶을 흔드는 책을 만나다.

묭롶 2014. 8. 8. 23:00

 

 1. 원시(遠視)의 시력교정

 

 나는 삶은 번데기를 좋아한다.  나비가 되지 못한 기름진 유충을 먹으며

뜬금없이 나비가 됐으면 어떤 모양과 색채를 지녔을지 궁금해지기도 한다.

삶은 계란, 번데기, 굼뱅이 등 성충이 되지 못하고 자의 든 타의로든 변이의

과정 중에 영원히 고착된 상태를 접할 때면, 나는 인간의 어느 단계에 머물러

있는지를 되묻게 된다.   그럴때면 실제의 나는 육체가 동면된 채, 영화

<매트릭스>의 인공캡슐 속에 담겨 기계가 제공하는 인식의 세계를 실제라고

믿고 있는 건 아닐까 싶은 생각도 든다. 

 

  유년기의 아이들이 어딘가에 자신의 친부모가 따로 있을거라고 믿는 경우처럼

나는 어딘가에 진짜 내가 있을 것만 같다.  일본 애니메이션 <신세기 에반게리온>

의 무수한 마리의 복제 실패작들처럼 무수히 많은 과정 중의 '나'들이 복제품이

아닌 원본으로서의 나를 기다리고 있다고 느낄 때도 있다.

 

  알 껍질 속에 머무르며 그 속에서 보호받고 있다는 믿음 속에 양분을 받아먹고

알 속에서 고착된 상태에 머물고 있는 나와는 다른 자유로운 날개를 지닌

진짜 내가 언젠가는 내 알껍질 바깥에서 나를 향해 노크를 할지도 모른다는 공상을 하기도 했다.

 

「"난 내가 그랜드피아노를 울리게 할 수 있는 사람이길 정말 바랐어......

내 인생은 변주곡을 연주하는 일이 없이 끝나리라는 것을......"

피아노는 수십 년 동안 그곳에 있었다.

~인생은 우리가 사는 그것이 아니라 산다고 상상하는 그것이다.

프라두의 책에 쓰여 있던 문장 가운데 하나였다.」p279

 

  물론 지난 삶의 험난한 과정을 거치며 공상과 기대만으로 얻을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는 걸 누구보다

절감하지만 황당무계한 공상이 내게 일정정도 피난처로 역할했고 내가 그걸 필요로 했음은 내 자신이

더 잘 알고 있다.  원본인 나를 찾아 헤매기보다는 실존으로서의 나 자신을 이해하여 나로 만들어가는 과정이

우선이라는 사실 또한 명확히 인지하지만 나는 언제나 양분이 지급되는 알 속에서 자기연민, 자기혐오,

자기합리화의 과정을 반복하고 있다.

 

  어쩌면 『리스본행 야간열차』의 그레고리우스처럼 자기자신에 대한 이해는 자신에 대한 거리두기에서부터

출발하는지도 모른다.  지독한 근시가 원거리를 보지 못하고 원시가 가까운 거리의 사물을 보지 못하는 것처럼

'나'라는 존재를 제대로 보기 위해서는 어느정도의 거리가 필요한지도 모른다.  여행은 나 자신에게 거리를 둘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다.  여행은 익숙한 알 속이 아닌 낯설음 속에 나를 둠으로써 나라는 존재의 빈 공간에

나를 대입함으로써 역으로 나는 이해하는 과정이다.  원시(遠視)라서 보지 못했던 가까운 사물들의 모습을 제대로

바라봄으로써 올바른 인식에 이르는 것처럼 익숙함을 떠남으로써 내가 몰랐던 나 자신에 대한 새로운 각성을

얻게 되는 것이다.

 

  2. 인간에게 언어가 갖는 의미.

 

「피니스테레. 그곳에서처럼 정신이 또렸하게 깨어 있었던 적은,

그렇게 차분했던 적은 일찍이 없었다. 그때 이후로 나는 알고 있다. 

나의 경주는 끝났다는 것을...... 

내가 언제나 달리고 있었으면서도 알지 못했던 경주,

경쟁자도 목표도 상도 없는 경주. 완전함?

에스파냐 사람들은 '에스페히스모(Espejismo)'라고 한다. 

그때 읽은 신문에서 유일하게 아직 기억하는 단어. 신기루, 환영(幻影).

우리 인생은 바람이 만들었다가 다음 바람이 쓸어갈 덧없는 모래알,

완전히 만들어지기도 전에 사라지는 헛된 형상.」p536~537

 

   사유(思惟)는 모래성과 같아서 그 순간 우연히 형태를 띤 무언가였을지라도 곧 흩어져버린다.  그 사유를 형태를 지닌

무언가로 만드는 질료가 언어다.  말이나 생각이 붙들지 못하는 형태를 언어는 하나의 형태로 갈무리함으로써 어떤

감수성(느낌)을 지닌 결과물을 낳는다.  글로 쓰여진 장미라는 단어에서 사람들이 실제 장미의 향, 모양, 색을 생생하게

느낄 수 있는 것처럼 실물로서의 '장미'는 언어로 표현되어짐으로써 시들지 않는 영구성과 현존성을 획득하게 된다.

 

  『리스본행 야간열차』는 자신의 삶이라는 공식(질문)에 타인의 삶을 대입함으로써 깨닫게 되는 인식의 과정을 담고

있다.  이 책에서 그레고리우스와 독시우스, 그레고리우스와 주앙에사, 그레고리우스와 조르지와의 체스대국은 프라두

라는 인물의 총체성을 건져올리기 위한 복기의 과정과 닮아 있다.  체스나 바둑 대국의 복기를 통해 판의 승세를 가리는

한 수를 깨닫게 되는 경우처럼 쉽게 득하기 어려운 삶의 비의(秘義)를 깨닫게 된다. 

 

「-움직이는 기차에서처럼, 내 안에 사는 나. 

내가 원해서 탄 기차가 아니었다.  선택의 여지가 없었고, 아직 목적지조차 모른다. 

먼 옛날 언젠가 이 기차 칸에서 잠이 깼고, 바퀴 소리를 들었다. 

난 흥분했다.  덜컥거리는 바퀴 소리에 귀를 기울이다가 머리를 내밀어 바람을 맞으며

사물들이 나를 스치고 지나가는 속도감을 즐겼다. 

기차가 멎지 않기를 바랐다. 영원히 멈추어버리지 말기를, 절대 그런 일이 없기를.」p485

 

  작가는 퍼즐처럼 흩어진 프라두라는 한 인물을 건져올리는 방식으로 인물간의 체스 대국을 통한 복기 뿐만 아니라,

작중 인물에 대해 쓰인 한 권의 책이라는 방법을 택한다.  『리스본행 야간열차』에서 그레고리우스는 프라두라는

언어로 세워진 성문을 열고 들어간다.  그는 그곳을 둘러보며 스페인에 있는 가우디의 건축물이 뿜어내는 아우라를

통해 우리가 역으로 가우디라는 인물의 총체성을 만나게 되는 것처럼, 프라두(언어로 만들어진)라는 언어의 건축물을

통해 자신의 삶의 영감을 획득하게 된다.  작가는 이 책의 주제를 책의 말미에 그레고리우스가 성당에서 받는 영감에

담고 있다.  인류의 간절한 소망이 모인 결과물이 성당이라면 인류의 생각을 담은 글이라는 성(城)(책)을 통해 인류는

자신을 이해하고 타인을 이해하는 법을 배우게 되리라는, 또 그 방법을 후대에 전하게 될거라는 하나의 희망적

증거를 파스칼 메르시어는 『리스본행 야간열차』를 통해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