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노트/<2013 이상문학상>

<침묵의 미래>:말과 글의 의미를 다시금 생각해본다.

묭롶 2014. 4. 7. 14:35

 

  난 말로 인해 사람들과 오해가 생길 때면 다툼의 대상에게 오랜동안 말문을 닫아 왔다.   4년제

대학 국문학과를 졸업하고 몇 년을 가족이

지켜보기에 답답한 삶을 살던 막내가 목공소 잡일을 하며 백여만이 조금 넘는 봉급을 받을 때도,

나름 큰누나의 조언이랍시고 말문을 열었다가

막내에게 무색을 당한 후로 난 또 말문을 닫았다. 

 

  말로 인한 오해로 속이 시끄러울 때면 쉬운 말로 속을 까 뒤집어보이고 싶은 경우가 한 두번이 아니다.  언제나 말은 정확한 나의 상태나 나의 의도에서 벗어나 본래 궤도를 이탈하곤 하니 말을 하는게 조마조마하고 조심스러울 때도 허다하다. 

 

「~물론 가족 안에서 깨친 말로 가족 이야기를 꾸린다 해서 늘 잘 써지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때마다 내가 온전히 이들을 이해하지 못하며, 이해할 수도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p72~73

 

  그럴 때면 차라리 부족한 의사전달의 방법이 언어가 아닌 텔레파시였으면 어떨까 생각해

본다.  생각하고나니 무섭다.

(내 꿍꿍이와 꼼수까지도 적나라하게 드러난다면......)

내 있는 그대로의 진심을 타인이 그대로 볼 수  있다면, 가장 먼저 '이해'라는 단어가 사라질 것이다.  언어를 통해 타인을 이해하려는 과정은 온전히 FACT(사실)만을 투과하는 텔레파시 앞에선 무용지물이다.  이 경우 인간은 배우자를 구할 수도 없을테고 이해관계에 따른 이합집산으로 이뤄진 공동체의 균형과 평화도 사라지게 될 것이다.

어찌보면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 아니라, 언어의 불확실함이 인간을 사회적 동물로 만드는 건 아닐지 역으로 따져보게 된다. 

 

「~그래서 누군가는 자기네 말로 무심코 '천도복숭아'라고 말하며 울고, 어떤 이는

'종려나무'라고 한 뒤에 가슴이 미어지는 것을 느꼈다.  ~내 마지막 화자도

그런 말들과 이별하고 싶어 얼마간 입을 굳게 닫고 살았었다.」p30

 

  글도 마찬가지다.  굳이 다양한 언어문화권이 존재하지 않더라도 단 하나의 만국 공용어로 통일이 되더라도 내용을 전달하는데는 큰 무리가 없을 듯 하다.  하지만 다양한 언어문화권이 오래도록 전승해 온 그 각각의 독특한 감수성을 놓고 본다면, 얘기가 달라진다.  한글문학이 전승해온 독특한 감수성을 영어로 과연 전달해낼 수 있을까. 

 

  내 본심을 몰라주는 대상에게 말문을 닫았던 것처럼 내 글에 말을 닫고 지낸지 오래되었다.  나도 결국은 나라는 매개체를 통해 나온 글들이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그 감수성조차도

나라는 존재의 총합이란 생각을 해본다.

다시 시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