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노트/<살만 루시디>

<악마의 시>:언어로 펼쳐내는 마술적 세계

묭롶 2013. 1. 8. 20:59

 

  한 사람의 마술사가 마술 공연을 펼친다.   마술사를 지켜보는 다수의 관중들은 저건 눈속임에 불과해 절대로 속지 않을꺼야라는 생각을 하며 어딘가에 있을지도 모를 헛점을 찾기 위해 집중한다.  물론 마술 그 자체를 즐기는 사람도 있지만 관중들 대다수의 심리는 마술이 거짓이란 점을 결코 잊지 않는다. 

 

  마술의 묘미는 바로 이런 마술이 거짓임을 강력하게 믿고 있는 사람들에게 거짓이 아닌 실제(처럼 보이는)를 보여줌으로써 그 사람들의 가치를 전복(와~~하고 놀래는 사람들의 반응)시키는데 있다.  이렇게 대중들이 믿고 있는 가치관을 전복시키는 장르는 마술에 국한되지 않는다. 

 

  처음 <매트릭스>가 개봉했을 때, 사람들은 자신이 현재라고 철썩같이 믿고 있는 현실이 실은 시스템(기계)이 머릿속에 심어준 가상현실일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에 정서적으로 큰 충격을 느꼈다.  내가 믿고 있는 세계가 실제하는지에 대한 의심은 제작년 개봉했던 <인셉션>에 이르러서는 현재 사유하고 있는 나 자신(데카르트의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는 명제를 깨부수는)이 실제의 나(자유의지를 가진)인지를 반문하게 했다. 

 

  이제 본론인 문학으로 넘어가보자.  문학으로 기존 가치관을 전복시키는 대표적인 사례를 들자면 그건 금기를 깨뜨리는 방법이다.  마술이 성립되기 위해서는 마술이 펼쳐지는 방법과 그 원리를 모르는 대다수의 관객이 필요하고, <매트릭스>와 <인셉션>의 이야기가 사람들에게 설득력있게 다가가기 위해서는 영상이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고정관념을 깨뜨릴만한 파격을 선보여야 한다.(<매트릭스>에서 전화선을 타고 사람이 이동하는 장면이나 동일한 장면이 반복되어 일어나는 데자뷰현상, <인셉션>에서 자신이 설계하는 대로 재구성되는 꿈의 세계의 영상화 등)

 

  언어를 통해 가치관의 전복을 일으키기 위해서는 다루는 소재가 '금기'이거나 기존과는 전혀 다른 방식의 표현체계를 선택해야한다.  이중 소재가 '금기(대표적 사례: 마광수 교수)'인 대상을 다룰 경우 잘못하면 '외설'시비에 휘말리기도 한다.  어쩌면 이런 이유에서 금기를 다루는 경우보다는 표현 기법상의 새로운 방법론을 택하는 경우들이 지금까지 더 많았는지도 모른다. 

 

   <오감도>와 <날개>의 저자 李箱과 <율리시스>의 저자인 제임스 조이스는 문학적인 방법론의 새로움을 개척했다고 볼 수 있겠다.

특히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스>는 미처 하루가 되지 않는 시간동안 벌어지는 사건 을 다양한 언어와 속담, 설화, 다양한 문화양식과 문학작품을 빌어 표현해냄으로써 그 작품 하나를 놓고도 무수히 많은 해석이 가능한 다양한 알레고리(제임스 조이스 자신은 수수께끼라고 표현)를 만들어냈다.  그 결과 <율리시스>는 번역에 있어 원문 분량만큼의 주석을 주렁주렁 달기에 이르렀고, 이 책을 읽어낸다는 사실 자체에 부담을 느낄 지경에 이르렀다.  개인적으로도 이 작품은 자신이 천재임을 증명하기 위한 작가의 목적의식이 철저히 반영되었다고 보여진다.

    살만 루시디의 『악마의 시』는 금기(이슬람의 예언자 마호메트)를 다루면서도 그 표현법도 제임스 조이스의 문장(다양한 주석, 다양한 함의, 언어적 유희)이 갖고 있는 새로움을 동시에 겸비한 작품이다.  흡사 연기력이 좋은 마술사가 얼굴도 잘 생긴데다가 무대메너까지 좋은 겪이라고나할까.  이미 이 책은 마술적 리얼리즘이라는 새로운 수식어를 획득한 바 있다.  살만 루시디는 언어를 자유자재로 엮어냄으로써 영화 <매트릭스>가 보여줬던 '0'과 '1'이라는 비트의 조합만으로 펼치지는 무한한 가능성의 세계를 우리 앞에 펼쳐보인다.

 

「어느 쪽이 더 나은 길일까?  그는 생각했다:  에이해브 선장은 익사했다. 

살아남은 사람은 기회주의자 이스마일이었다.」<하권>p215=> 허먼 멜빌의『모비딕』

 

「한낱 과거의 섬에 고립되어 프라이데이 같은 아랫것들의 도움으로 겉치레나마

유지해보려고 애쓰는 크루소 같은 도시였다.」

<하권>p222=>미셀 트루니에의 『방드르디, 태평양의 끝』

 

「'마치 생일 잔치 같구나', 하고 살라후딘은 생각했다. 

혹은: 피네건의 경야 같다.  죽은 자가 산 자들만 즐기는 꼴을 보고

그냥 누워 있지를 못하는구나.」

<하권>p345~346=> 제임스 조이스의 『피네건의 경야』

 

  개인적으로 보기에 살만 루시디는 제임스 조이스의 문장에 큰 관심을 가진 것으로 보여진다.  실제로 그의 작품에서 보여지는 언어 유희(살라딘이라는 이름을 조롱하는 지브릴)는 <율리시스>가 가진 독특한 특징이며 <율리시스>가 작품 속에 차용하는 다양한 설화와 고전 등을 인용한 부분 또한 그의 작품 속 인용과 닮아 있다.  특히 주인공이 갖은 모험을 거쳐 집으로 돌아오는 모험기를 바탕으로 한 고전 <율리시스>의 구조도 일정부분 닮은꼴이다.

 

  사실 이 책을 읽는데는 개인적인 호기심도 한몫 거들었다.  이 책의 출간과 동시에 살만 루시디는 호메이니에 의해 현상금이 걸린 처형대상이 되었다.  최근 이슬람 과격단체에서 이 작가에게 거는 현상금을 37억원 가량까지 올렸다는 기사를 보고 오래 책장에서 묵혀 두었던 이 책의 어느 부분이 종교단체의 비위를 거슬렀는지에 호기심이 들었다.

 

「그 순간 갑자기 창게즈 참차왈라가 자기 얼굴에서 떠나갔다. 

아직 살아 있었지만 어딘가 다른 곳으로 가버렸다고 할까,

내면으로 침잠하여 무언가를 보고 있다고 할까. 

나에게 죽는 방법을 가르쳐주시는 거야, 하고 살라후딘은 생각했다. 

눈을 피하지 않고 똑바로 죽음의 얼굴을 쳐다보고 계신 거야. 

죽어가면서도 창게즈 참차왈라는

지금껏 단 한번도 신의 이름을 말한 적이 없었다.」<하권>p351

 

  결론은 나에게 종교가 없어서라기 보다는 내가 보기엔 비유를 들었을 뿐, 그닥 특별한 지점은 없어 보였다.  인도 출신 영국작가이며 영국의 부커상을 수상했고 영국정부가 막대한 비용을 들여 저격자들로부터 십년 이상 자신을 보호해줬음에도 시종일관 영국을 비웃고 비꼬는 자세를 풀지 않는 이 작가의 본래적 성향이 문제가 된다면 모르겠지만, 그가 비유를 든 예언자 마훈드는 인간의 역사를 빌어 인간이 만들어 온 맹목적인 믿음을 대표하는 인물일 뿐 특정종교를 대상으로 한다는 느낌을 받지 못했다.

 

 

「너 어떻게 된 거냐, 살만, 갑자기 귀머거리가 됐느냐? 

그러면 난, 아이쿠, 맙소사, 이런 실수를, 제가 어쩌다가,

그러면서 잘못을 바로잡는 거지.  그런데 그렇게 되질 않았어. 

계시의 말씀을 내 마음대로 썼는데도 아무도 알아차리지 못했고,

그렇다고 자백할 용기도 없었지.

~그래서 다음번엔 좀 더 큰 것을 바꿔쳤어.  ~이건 틀림없이 눈치채시겠지,

어떻게 모를 수가 있겠어?  그런데 내가 그 장을 읽어줬더니 그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수고했다고 점잖게 말했고, 난 눈물을 글썽이며 그의 천막을 빠져나왔어.」

<하권>p117

 

  살만 루시디가 얘기하고자 하는 바는 이슬람의 예언자 마호메트의 실상과 코란이라는 경전이 갖는 허구성에 대한 문제제기가 아니다.  일상생활 속에서 그리고 이전의 방식으로는 발견할 수 없었던 인간의 역사가 구축해 온 맹목적인 믿음과 보편성의 실체를 그는 죽음의 위기를 넘긴 후 각각 천사와 악마의 형상으로 변해버린 지브릴과 살라딘이라는 인물을 빌어 폭로한다.

 

「~그 시절에도 마훈드는-아니, 대천사 지브릴이라고 해야 할까?

-알라라고 해야 할까?-율법에 집착하고 있었다.  오아시스의 야자숲에서

예언자 앞에 나타난 지브릴은 별의별 규정, 규정, 규정을 폭포처럼 쏟아냈고,

그래서 신도들을 계시라는 말만 들어도 소름이 끼칠 정도였는데,

별의별 시답잖은 일에도 규정이 따라다녔으니,

~뒤를 닦을 때는 어느 쪽 손을 사용해야 한다는 규정까지 정해졌다. 

도무지 인간의 생활에서 아무런 규제 없이 자유로운 부분은 하나도 없는 듯했다.」

<하권>p111

 

  그저 자신은 꿈 속에서 지껄였을 뿐인데, 이를 천사의 계시로 받아들이는(제멋대로 자신만의 방식으로) 예언자 마훈드와 아에샤로 인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맹목적인 규율에 묶여 그 속에서 강제당하고 복속당해야 하는지를 살만 루시디는 말하고 싶은 것이다.  천사의 모습을 지닌 지브릴이 꿈 속에서는 대천사로 추앙받지만, 현실에서는 정신병자 취급을 당하고 인도에서 성공한 사업가의 아들이지만 영국에서는 언제나 외국인 취급을 받는 살라딘의 모습은 역설을 통해 우리가 그간 의식없이 받아들이기만 했던 보편적 세계의 실체를 돌아보게 한다.

 

 

  쉽게 얘기해서 『악마의 시』는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는 우화를 떠올리게 한다.

그동안 그냥 임금님이니까, 임금님이 하는 말이니까 하고 믿고 사는 우리들과 다르게 임금님 귀가 당나귀 귀라는 사실을 알아버린 이발사가 몰래 대나무 숲에서 마음껏 소리소리 지른 후 죽어버리자 바람만 불면 대나무숲에서 임금님 귀가 당나귀 귀라는 소리가 들려왔다.   우리가 인식하지 못한 채 살아가는 일상은 어찌보면 사회라는 규율 속에서 굴리는 쳇바퀴와도 같다.  왜 굴려야 하는지 모르는 채 바퀴를 돌고 또 도는 철망 속 햄스터처럼 우리를 둘러싼 사회 속에서 우리는 또 우리 자신을 강제하는 자아에 이중으로 감시당하며 살고 있다. 

 

  문장도 상황은 마찬가지이다.  대부분의 글들이 자기검열을 거쳐 쓰여지고 금기가 자동으로 걸러진 글들이 보편성이라는 옷을 입고 보편성의 길을 걸어간다.  자생적으로 생성되는 힘이 느껴지는 글들을 만나기 어려운 현실 속에서 살만 루시디의 글은 형식이 없는 한판 신나게 놀아보자는 마당놀이와 같은 신명을 불러일으킨다.  개척되지 않은 길 위에 서서 기존에는 듣지도 보지도 못했던 상황을 겪게 된 인물들이 겪게 되는 이야기를 살아서 꿈틀대는 모양 그대로 언어라는 그물 속에 담아낸 마법 같은 책이 『악마의 시』의 실체이다. 

 

「병을 앓는 동안에 그는 의식이 돌아올 때마다 한순간도 쉬지 않고 신에게

간절히 애원했다.  ~그러다가 문득 자신이 벌을 받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처음에는 그 덕분에 고통을 견딜 수 있었지만 얼마 후에는 화가 났다. 

~신에 대한 분노 덕분에 그는 다시 하루를 더 버틸 수 있었는데,

~자기가 '텅 빈 허공'에 대고 말하고 있음을, 그곳에는 아무도 없음을 깨달았고,

~그는 그 공허를 향해 호소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아무것도, 아무것도 아무것도 느낄 수 없었고,

그러던 어느 날 그는 이제 아무것도 못 느껴도 상관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자신에게 신의 부재를 증명하기 위해 그는 지금 시내에서

가장 유명한 호텔의 식당에 우뚝 선 채로 돼지들을 뚝뚝 떨어뜨리며 먹고 있었다.」

<상권>p53

 

  신의 존재유무는 이 책의 저자와 마찬가지로 이미 나와 상관이 없지만, 작중인물과 같은 과정을 거쳐 무신론에 이른 나의 경우를 두고 보자면 결국 운명이라는 족쇄를 스스로 채우는 것도 인간이요, 신이라는 족쇄와 종교라는 이름의 강제를 스스로 받아들이는 것도 인간이란 생각을 해본다.  작중인물 지브릴이 고대 인도의 수많은 신을 연기하다(주어진 그래로의 삶) 죽을 고비를 겪으며 실제로 천사의 후광을 얻고서도 자신에게 부여된 정체성을 탈피하지 못한 채 타인이 부여하는 인식체계와 자신의 현재와의 괴리 속에서 정신분열을 일으켜 파국에 이르는 모습은 어찌보면 운명이라는 굴레를 너무나 거부감 없이 뒤집어 쓴 우리의 모습을 반추하게 한다.  살만 루시디의 춤을 추는 듯한 언어가 일으키는 마법이 우리 스스로에게 걸어놓은 저주를 풀 수 있기를 희망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