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노트/<미셸 투르니에>

<방드르리, 태평양의 끝>: 인간을 바라보는 새로운 시각

묭롶 2012. 9. 14. 11:29

 

  나무가 한 그루 있다.  나무는 땅 속으로 뿌리를 뻗어 물기를 흡수하고 순환의 과정을 통해 광합성을 일으킨다.  바람이 불면 바람에 흔들리고 비가 오면 비를 맞는다.  나무는 왜 자신이 그 자리에 있는지 왜 자신이 나무로 태어났는지 왜 뿌리를 내리고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어야 하는지 묻지도 궁금해하지도 않는다. 

 

  비단 나무 뿐이 아니라 자연계에 있는 인간을 제외한 생물종들은 자신에게 주어진 환경을 받아들이는 수용체이며 그 자신의 존재를 입증하기 위해 타자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장미는 장미이고 수박은 수박이며 고양이는 개가 아닌 고양이라는 사실은 유전학적 변이가 일어나지 않는 한 당연한 이치이다.  인간을 제외한 생물종이 개체적 정체성을 완전히 인정받는 반면, 인간은 살아가며 끊임없이 자신의 정체성에 의문을 제기하게 된다. 

 

  물론 일부는 자연에 순응하는 생물군처럼 사회라는 일련의 문화와 제도 속에서 부여된 정체성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삶을 살아가기도 하지만, 그런 인물일지라도 한번씩은 '난 왜 사는거지'라는 의문에 사로잡히는 것이 또 인간이다.  이는 인간의 인식과 사고체계가 갖는 상대성에서 기인한다.  기타 생물군에게 수동형의 절대적 인식과 그에 따른 수용이 부여된 것과 달리 인간은 동시대 동일한 환경에서 동일한 사건을 겪더라도 서로 다르게 수용하는 상대성을 보인다. 

 

  TV 스펀지에서 방영됐던 심리실험이 떠오른다.  열명의 사람이 모여서 네 개 정도의 색상표를 보면서 진행자가 빨강을 가리키며 한 명씩 돌아가며 색상을 묻는데 아홉명이 사전에 모의를 하고 빨강을 파랑이라고 답하면 나머지 한 사람도 고개를 갸웃거리며 파랑이라고 대답하는 사례를 보여주는 실험이었다.  이 실험은 인간이라는 존재가 갖는 불완전함을 단편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인간은 자신이 딛고 있는 땅이 땅이라는 사실에 믿음을 갖기 위해 자신과 동일한 공간을 동 시간대에 같이 딛고 있는 타자를 필요로 하는 것이다. 

 

「나를 타자와 동일화시키지 않은채 나를 묘사하고자 할 경우 가장 먼저 확증되는

사실은 그 나라는 것이 간헐적으로,  그리고 따지고 보면 상당히 드물게밖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나의 존재는 부차적이고 이를테면

반사적인 어떤 인식 양식과 일치한다.」p118

 

 

「존재한다(Exister)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밖에 있다(sistere ex)는 뜻이다.  밖에 있는 것은 존재하고 안에 있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나의 생각, 나의 이미지,

나의 꿈은 존재하지 않는다.」p158

 

인간의 인식과 사고체계가 갖는 상대성은 인간이라는 존재를 완전체가 아닌 불완전한 자리에 놓아둔다.  카뮈의 스승이었던 장 그르니에가 『섬』에서 고양이의 행동을 보며 불완전한 인간의 사유체계를 의식했던 것처럼 인간은 끊임없이 현재의 자신을, 과거의 자신을, 또 앞으로의 자신을 인지하고 인식하고 사유해서 살아가야 하는 존재이다.

 

「~물루는 행복하다. 세계가 저 혼자서 끝없이 벌이는 싸움에 끼여들면서도

그는 제 행동의 동기가 한갖 환상일 뿐임을 깨달으려 하지 않는다.

놀이를 하되 놀고 있는 제 스스로의 모습을 바라볼 생각은 하지도 않는다.

그를 바라보는 것은 나다.

그만 빈틈도 없이 정확하게 몸을 놀려 제가 맡은 역할을 다하고 있는

그를 바라보고 있노라면 황홀해진다.

~나 스스로를 돌이켜보노라면 이런 가득함은 나를 슬프게 한다.

나는 내가 인간이구나 하는 느낌을 갖게 된다.

~있어도 있지 않은 부재(不在).」『섬』 p43~45 '고양이 물루' 中

 

  역사 이래로 현재까지 진행중인 불완전한 인간에 대한 고찰은 생물학, 과학, 종교, 인문, 철학 등을 망라하여 이뤄져왔다.  각각의 다양한 장르들이 저마다의 방식으로 인간이라는 명제에 다양한 해를 내놓았지만 미셸 투르니에가 『방드르디, 태평양의 끝』을 통해 보여주는 인간은 새롭고 아름답다.    이 책은 철학교수를 목표로 오랫동안 철학을 공부한 미셸 투르니에가 마흔이 넘은 나이에 내어놓은 처녀작이다. 이미 고립과 극한상황에 처한 인간을 통해 인간이라는 존재에 답을 구했던 다수의 작품들과 달리 작품의 배경과 처지는 동일하나 그 상황에 처한 인간을 바라보는 관점을 달리함으로써 그는 인간이라는 존재의 근원에 가깝게 다가간다. 

 

 투르니에는 인간에 대한 철학적 사유를 신화의 전복적 해석을 통해 소설로 형상화해냈다.  딱딱한 이론에 머물렀던 철학은 마흔네해를 살아온 투르니에의 삶 속에서 경험을 통한 실체적 형태로 탈바꿈 되었고 다니엘 디포의 '로빈슨 크루소'라는 신화를 만나 새로운 형태의 언어적 구조물을 이뤄낸 것이다. 

그 구조물은 작중 인물 방드르디가 만들어낸 앙도아르(숫염소)의 탈바꿈한 연(공기적 요소)과 악기(바람적 요소)와도 유사하다.  숫염소가 상징하는 힘에 의한 지배구조(철학)는 방드르디(투르디에의 체화된 철학)에 의해 자연과 동화된 형태의 시적 언어로 다시 태어났다.  그의 문장을 읽으며 소설의 언어가 이토록 아름답게 표현될 수 있다는 사실에 감탄하게 되었다. 

 

「공중을 나는 앙도아르가 노래하는 앙도아르 속에 출몰하면서 그를 보살피는

동시에 위협하는 듯했다. 변화하는 달빛 아래 독수리깃털의 두날개는 해골의

이쪽저쪽에서 경련하듯 열리고 닫히면서 폭풍과 보조를 맞추어

어떤 환상적인 생명을 부여하고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저 강력하고

멜로디넘치는 울음소리, 비인간적이고 그야말로 원초적인 음악,

그것은 대지의어두운 목소리요 동시에 천상계의 하모니요

또한 제물이 된 큰 숫염소의 목쉰 탄식이었다.

절벽을 굽어보는 바위에 몸을 의지한 채 서로 몸을 부둥켜안은

로빈슨과 방드르디는 곧있는 그대로의 원소(元素)들이 서로 혼연일체가 된

그 신비의 위대함 속에빠진 채 무아지경이 되었다.」p260~261

 

  그의 소설의 차별적 요소는 대상을 바라보는 전복된 시각에 있다.  고사성어에 역지사지라는 말이 있다.  앞서 인간 존재의 불완전성이 인간이 가진 인식과 사고체계의 상대성에서 기인한다고 언급했다.  작중인물들의 역할바꾸기(로빈슨과 방드르디의 역할바꾸기 놀이)는 인간이라는 존재의 근원에 접근하는 새로운 방법론을 제시한다. 1954년에 발표된 윌리엄 골딩의 『파리대왕』이 비행기 추락으로 고립된 소년들의 모습 속에서 현대사회의 제도적 구조적 문제점과 인간 본성의 문제를 제기했다면 투르니에는 고립에 처한 인간이 아닌 3인층의 관찰자를 통해 바라보는 로빈슨의 정신세계의 변화양상에 주목한다.  

 

「옛날에는 매일, 매시간, 매분은 그 다음 날, 시간 혹은 분쪽을 향하여 이를테면

기울어져 있었다.  그리하여 모두가 그 순간의 의도에 의하여 흡수되곤 했다.  

 ~이리하여 시간은 빠르고 유용하게 흘러갔으며 보다 유용하게 쓰이면 쓰일수록

빨리 지나갔고, 그 뒤에는 나라고 하는 기념물들과 찌꺼기 더미가 남았다. 

~이제부터 내게 있어서 그 주기는 너무나도 작은 차원으로 축소된 나머지

순간과 구별할 수 없을 정도이다.  ~따라서 나의 날들은 마치 다시 똑바로

일어선 것 같은 느낌을 준다.  날들은 더 이상 하루하루 차례로 쓰러져

버리지 않게 되었다.  ~그들 서로가 비슷비슷해져서 내 기억 속에서는

서로 정확하게 포개지고, 또 나는 똑같은 날을 끊임없이 다시살고 있는 것

같은 인상을 받을 정도가 되었다. 」p 272~273

 

  여타의 장르가 고립이 초래한 인간의 변화양상에 주목한 반면, 투르니에는 시간의 부재(不在)가 인간에게 미치는 영향에 주목한다.  또한 그는 고립상황과 시간의 부재가 과연 인간에게 부정적인 영향만을 미치는것인지를 작중인물 로빈슨을 통해 실연(實演 )해 보인다.  그럼으로써 현대인에게 부여된 시간의 역할을 우리앞에 보여준다.  과거 문학이 사회 구조와 제도에 얽매인 인간의 병리적 문제를 고발했다면 투르니에는 거기에 또 다른 주범인 '시간'을 고발함으로써 인간에게 다가가는 또 다른 방법론을 제시한다.  내가 이 책에서 가장 주목했던 부분도 시간의 부재를 불행이라 여겼던 로빈슨의 심리변화였다.  어쩌면 현대인에게 가장 절실한 요구는 일정기간 동안의 시간의 부재인지도  모른다.  가끔씩 삶의 시계를 멈춰놓는다면 상대성을 지닌 존재로서의 인간은 방드르디가 만든 앙도아르 연처럼 하늘을 날고 자연이 연주하는 교향악을 울려내는 악기가 될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