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노트/<모래의 여자>

내 안에 있는 수많은 '나'들과 만나다.

묭롶 2012. 8. 23. 20:48

 

「성이 있었다.....~군인은 적의 침입에 대비하여 경계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어느 날, 마침내 기다리고 기다리던 적이 몰려온다.  이때다 하고 경고의 신호를 보냈다.  그런데 기묘한 일도 다 있지, 본대에서는 아무런 응답도 오지 않았다.  적이 군인을 일격에 쓰러뜨렸음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멀어져 가는 의식 속에서 군인은 보았다.  적이 그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문을, 벽을, 건물을, 바람처럼 뚫고 지나가는 것을.  아니, 바람처럼 보였던 것은 실은 적이 아니라 성이었던 것이다.  군인은 홀로, 황량한 벌판에 서 있는 고목처럼 환영을 지키며 서 있었던 것이다......」p155 

 

  나는 어릴 적에 빨리 어른이 되고 싶었다.  어른이 된다는 건 무언가 완전무결한 상태에 이르는거라고 막연하게 짐작했었다.  뭔가를 결정하는데 있어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나라는 존재도 내가 보기에 완벽하고 그 누가 보아도 부끄럽지 않은 그런 상태가 어른이라고 생각하며 그런 내 모습을 상상해보기도 했다. 

 

  하지만 나이를 먹어갈수록 보편적 평균수명의 절반을 살고도 나는 그 무엇도 되지 못했다.  카프카의 소설  『변신』에서 어느 날 갑자기 벌레가 된 자신을 발견한 그레고리는 자신의 정체성을 통렬하게 자각할 수 있었지만, 난 아직까지 누구에게도 내가 이런 사람이라고 말 할 수 있을만한 정체성을 갖지 못했다.

 

  흔히 소설을 근대와 현대로 구분짓는 대별점을 작품속 자의식의 반영여부에서 찾는다.  근대의 작품이 서사의 중심을 '이야기'자체에 놓았다면 현대작품들은 서사를 이끌어가는 대상이 바로 화자 자신이 되는 차이점을 갖는다.   

 

  그렇다면 현대에 들어 작가들이 자의식에 주목하기 시작한 이유는 무엇일까?  그 이유를 모더니즘에서 찾아볼 수 있겠다.  흔히 근대와 현대소설을 구분짓는 경계로 작품의 모더니티에서 찾는 경우가 많은데, 나는 이 모더니즘이란 사조가 이미 산업화로 인한 인간의 소외와 고립을 필연적으로 내포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보편적으로 1900년도 초창기를 기점으로 발발한 산업화와 도시화는 장기저임금 노동과 인간의 존엄성 훼손을 초래했다.  모더니즘을 추구하던 작가들은 도시문명을 작품속에 그려내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시대현실 속에서 약화되어가는 개인의 정체성과 고립을 문학적으로 드러내게 되었다.  모더니즘으로 촉발된 문학적 시도들은 그 과정에서 약화된 정체성 뿐만 아니라 자의의 파편화와 분열을 발견하기에 이르렀다. 

 

  자아의 파편화에 주목하게된 문학적 발견과 시도는 국가별로 그 시기를 달리하지만, 나는 李箱의 시 「오감도」와 「거울」에서 분열된 자아의 양상을 확인할 수 있었다.  1900년대 초 자의식이라는 현대적 기법을 처음 시도했다는 헨리 조임스의 『나사의 회전』이 자아의 혼란을 그려냈다면,  이후 1945년 발표된 알베르 카뮈가  희곡 『칼리굴라』에서 '거울'로 표현 한 자아의 분열 양상을, 李箱은 이미 1933년에 시를 통해 그려냈다. 

 

烏瞰圖

 

詩第一號

 

13人의 兒孩가 道路로 疾走하오.

(길은 막다른 골목이 適當하오.)

 

第1의 兒孩가 무섭다고그리오.

第2의 兒孩도 무섭다고그리오.

第3의 兒孩도 무섭다고그리오.

第4의 兒孩도 무섭다고그리오.

第5의 兒孩도 무섭다고그리오.

第6의 兒孩도 무섭다고그리오.

第7의 兒孩도 무섭다고그리오.

第8의 兒孩도 무섭다고그리오.

第9의 兒孩도 무섭다고그리오.

第10의 兒孩도 무섭다고그리오.

 

第11의 兒孩가 무섭다고그리오.

第12의 兒孩도 무섭다고그리오.

第13의 兒孩도 무섭다고그리오.

13人의 兒孩는 무서운 兒孩와 무서워하는 兒孩와 그렇게뿐이 모였소.

(다른 事情은 없는것이 차라리 나았소)

 

그中에 1人의 兒孩가 무서운 兒孩라도좋소.

그中에 2人의 兒孩가 무서운 兒孩라도좋소.

 

그中에 2人의 兒孩가 무서워하는 兒孩라도 좋소.

그中에 1人의 兒孩가 무서워하는 兒孩라도 좋소.

 

(길은 뚫린 골목이라도 適當하오.)

13人의 兒孩가 道路로 疾走하지 아니하여도좋소.

 

『李箱문학전집1』 P17~18  -1934년 7월 24일부터 8월 8일 연재

 

거      울

 

거울속에는소리가없소

저렇게까지조용한세상은참없을것이오

 

거울속에도 내게 귀가있소

내 말을못 알아듣는딱한귀가두개 나있소

 

거울속의나는왼손잡이오

내握手를받을줄모르는-握手를모르는왼손잡이오

 

거울때문에 나는거울속의 나를만져 보지는못하는구료마는

거울아니었던들내가어찌거울속의 나를만나보기만이라도했겠소

 

나는至今거울을안가졌소마는거울속에는늘거울속의내가있소

잘은모르지만외로운事業에 골몰할께요

 

거울속의 나는참나와는反對요마는

또꽤닮았소

나는거울속의 나를근심하고診察할수없으니퍽섭섭하오

 

『李箱문학전집1』 P187 -1933년 10월

 

  1962년 발표된 『모래의 여자』를 읽으며 李箱의 시 「오감도」 중 「시 제일호」가 연상되었다.  『모래의 여자』는 李箱의 시를 소설이라는 형식을 빌어 구현해 놓은 것 같은  구도를 보여준다.  「시 제일호」에서 닫힌 골목을 질주하는 무서운 아해와 무서워하는 아해는 『모래의 여자』에 나오는 '갇힌 남자와 여자', '부락민과 남자', '감시자와 남자' 등의 관계와 유사하다.  이 책을 李箱의 시를 해석서로 삼아 읽는다면 작중인물은 현실과 자신의 상상 속에서 경계점을 찾지 못한 채, 뫼비우스 띠와 같은 현실과 상상 속에서 자아가 분열되는 양상을 발견하게 된다.   李箱의 시에서 '거울'이 분열된 자아의 양상을 자신이 직접 확인하는 장치라면, 알베르 카뮈의 희곡 「칼리굴라」에서 '거울'은 자기자신을 감시하는 감시자 역할을 수행하며 『모래의 여자』에서 여자가 갖고 싶어하는 '거울'은 정체성을 찾고자 하는 작중인물의 심증을 드러내는 장치이다. 

 

「-지문-

그는 그녀의 손을 잡고 거울 가까이 데리고 가서,

잘 닦여진 거울에 비친 자기의 모습을

징 치는 방망이로 미친 듯이 지운다.」

『칼리굴라』 p47

 

「-지문-

칼리굴라는 일어서며, 한 손에 키가 낮은 의자를 집어들고

헐떡이며 거울을 향해 다가간다.

자기 모습을 들여다보며, 앞으로 덤벼들듯이 움직이다가

거울에 비친 자기 자신의 분신이 자기와 똑같이 움직이는 것을 보자

울부짖으며 의자를 거울에 힘껏 집어던진다.」

 

『칼리굴라』 p151

 

   알베르 카뮈의『전락』에서 보여지는 재판관이자 참회자인 '나'는 이 책에서 '가해자'이자 '피해자' 며 '갇힌 자' 임과 동시에 '가둔 자', '감시자'이자 '감시 당하는 자'가 된다. 그 결과 등장인물인 여자는 남자의 아니마가 되고 부락민은 파편화된 작중인물의 분열된 자아상임이 드러나게 된다. 

 

「그녀와 할 때는 이토록 한결같았던 적이 거의 없었다.  그 침대 위에서는, 느끼는 남자와 여자......보고 있는 남자와 여자......느끼고 있는 남자를 보고 있는 남자와, 느끼고 있는 여자를 보고 있는 여자......남자를 보고 있는 남자를 보고 있는 여자와, 여자를 보고 있는 여자를 보고 있는 남자......」p137

 

  『모래의 여자』는 회색인간으로 보호색으로 감춘 채 일상을 살아가는 타인들과 자신이 다르다는(돌연변이 곤충으로 표현)점을 입증하고자 했던 남자가 고립 속에서 자아의 분열에 이르게 되는 과정과 양상을 드러낸다.  이 작품은 보여지는 나와 바라보는 나(감시자인 동시에 피감시자, 피해자인 동시에 가해자)를 인지하는 '나'를 드러냄으로써 정상으로 보이는 현대인의 내면에서 들끓고 있는 자아의 병리적인 분열양상을 예견한다.  현재를 대표하는 '왕따', '고립', '우울', '피로'를 예견하는 징후를 李箱의 시편과 알베르 카뮈의 희곡과 소설, 그리고 이 책을 통해 발견할 수 있었다.  각각 발표시기를 달리하면서도 한 시대를 살아가는 인간의 총체적 감수성과 그 시대의 병리 뿐만 아니라 그 이후의 시대상까지도 예견해낸다는 점에서, 문학은 인간의 역사에 그 값을 다하고 있다.  이는 또한 문학이 앞으로도 '인간'에 주목해야할 이유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