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노트/<피로사회>

<피로사회>

묭롶 2012. 6. 11. 23:43

 

  소설 『모모』에서 시간도둑들은 사람들의 욕망을 충족시켜주는 대가로 그들의 시간을 넘겨받는다.  예전과 같은 24시간이지만 이제 나의 시간은 없고 이미 충족된 욕망의 짧은 순간을 이유로 멈춤없는 노동에 혹사당해야 한다.  

 

  여기에서 중요한 점은 그들의 쉼 없는 노동의 자발성이다.    누군가의 강제가 아닌 자신의 필요에 의해 자기가 자신을 착취하며, 분명 욕망의 주체는 자신이었지만 그 대가인 노동을 통해 자신의 존재감이 사라져가는 것을 경험하게 된다는 점은 아이러니다. 

 

「하지만 정작 니체라면 대중의 현실이 되려고 하는 저 인간형을 가리켜 주권적

초인이 아니라 그저 노동만 하는 최후의 인간이라고 했을 것이다.  긍정성의

과잉 상태에 아무 대책도 없이 무력하게 대던져져 있는 새로운 인간형은 그 어떤

주권도 지니지 못한다.  우울한 인간은 노동하는 동물 animal laborans 로서

자기 자신을 착취한다.  물론 타자의 강요없이 자발적으로. 

그는 가해자인 동시에 피해자이다.  」p27~28

 

  어느 순간 우리는 우리 주변의 낙오자들을 멸시하며 나 자신이 낙오되면 안된다는 위기감에 사로잡힌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자본주의는 표면적으론 개인에게 무한한 자유를 보장하는 듯 하지만, 실상은 소설 『모모』에 등장하는 시간도둑들처럼 사람들을 자발적 착취의 굴레 속에 몰아넣는다.  자본주의가 주입하는 '할 수 있다'는 구호는 부의 불균형과 각종 사회문제(청년실업 등)마저도 '할 수 있음'에도 '하지 못 하는' 개인의 잘못으로 매도하는 것이다. 

 

  '할 수 있다'는 구호 앞에서 개인은 못 생겼으면 성형을 해야하고, 살이 쪘으면 지방흡입을 해야하는 개선(바꿀 수 있는)의 대상이며, 공부를 못하거나, 취업을 하지 못하거나 부자가 되지 못하는 모든 것은 개인의 노력이 부족한 탓이기 때문에 현대 사회는 그들을 낙오자 내지는 '루저'라고 부른다.

 

  『피로사회』의 저자 한병철 교수는 바로 이러한 지금 시대를 성과사회라고 명명하며 시대적 병리현상으로서의 우울증의 원인이 성과사회가 개인에게 부여하는 자기착취에 있다고 본다.  과거 프로이드의 이론에서 개인의 강제를 담당했던 초자아는 이제 타자나 사회가 아닌 자기자신이 초자아의 역할을 대신함으로써 개인은 자신의 착취자이면서 피해자가 된다. 

 

「피로는 폭력이다.  그것은 모든 공동체, 모든 공동의 삶, 모든 친밀함을, 심지어

언어 자체마저 파괴하기 때문이다.  "그런 종류의 피로는, 본래 그럴 수 밖에

없었겠지만, 아무 말 없이, 필연적으로 폭력을 낳았다.  아마도 이러한 폭력이

모습을 드러낸 것은 오직 타자를 일그러뜨리는 시선 속에서뿐이었을 것이다."」P67

 

  자기 착취로 인한 자아의 고갈과 소진에서 오는 피로감이 우울증을 불러일으키고 이로인한 무기력함이 사회적인 고립으로 이어져 자기학대의 형태로 표출된다는 그의 진단은 현재 의 사회적 병리를 단적으로 진단한 것이다. 

  학교 폭력과 왕따의 문제도 이러한 맥락에서 살펴보면 낙오자를 인정하지 못하는 사회적 분위기(할 수 있다)와 낙오자를 자신과 구별지으려는 사람들의 혐오가 빚어낸 결과로 보여진다.  

 

「자본주의가 일정한 생산수준에 이르면, 자기 착취는 타자에 의한 착취보다 훨씬 더 효과적이고 능률적으로 되나.  그것은 자기 착취가 자유의 감정을 동반하기 때문이다.  성과사횐는 자기 착취의 사회다.  성과주체는 완전히 타버릴Burnout 때까지 자기를

착취한다.  여기서 자학성이 생겨나며 그것은 드물지 않게 자살로까지 치닫는다. 

프로젝트는 성과주체가 자기 자신에게 날리는 탄환Projektil임이 드러난다.」p103

 

  더욱이 문제는 성과사회가 불러온 자기착취로 인해 사람들의 자존감이 약화되고, 자본주의가 제공하는 환상에 경사되어 표면적 대상의 이면에 존재하는 실제를 파악할 수 있는 자발적인 사고의 능력과 함께 판단능력을 상실하는 데 있다.  예를 들어 명품으로 자신을 치장하기 위해 장시간의 노동을 자청하는 사람들에게 자신의 주변부를 돌아볼 능력이 있을지를 생각해보자.  또한 넓은 아파트와 최고급 인테리어, 고급 차 등 사회적으로 인정받기 위해 감당해야 하는 모든(낙오자로 분류되지 않기 위해)비용은 몇 십년 동안의 노동으로 되갚아야 하는데 과연 그 과정에서 '나'는 어디로 가는 걸까?

 

  저자는 현대인의 자기착취의 원인이 멈추지 못함에 있다고 말한다.  고요한 침묵 속에서 창의성이 싹트는 것처럼 멈춤 속에서 인간은 자신과 사회에 대한 성찰을 하게 된다는데, 퇴근길 버스안 풍경 속에서도 멈춤은 존재하지 않는다.  대부분 스마트폰을 조작하느라 주변을 돌아보는 사람도 차창밖 풍경을 보는 사람도 없다.  자기 자신을 멈추는 법을 배우지 못하는 세대에게 창의력과 자율성이 깃들 공간이 있을지 새삼 의문이 든다.

 

ps:  아프리카의 작은 나라의 모든 사람들은 맨발로 걸어다녔다.  어느 날 '나이키'사에서 그 나라에 무상으로 운동화를 보급하기 시작했고 사람들은 운동화를 신고 걷게 되었다.

그 과정에서 운동화를 신지 않는 사람을 비문명인으로 분류하며 천시하게 되었고, 사람들의 발바닥에 굳은 살이 사라질 무렵 '나이키'사는 운동화를 비싼 돈에 팔기 시작했다.

이제 사람들은 운동화를 사기 위해 현지에 설립된 '나이키'사에서 저임금에 노동력을 착취당해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