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노트/도리스 레싱

<다섯째 아이>

묭롶 2011. 11. 9. 22:00

 

  데이비드와 해리엇은 성적문란과 산아제한 등으로 가족이 해체되는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자신들만의 행복한 (완벽한)가정을 꾸밀 수 있기를 꿈꿔왔다.  우연히 파티에서 만나게 된 그들은 남들에게 이해받지 못한 자신들의 이상향이 같다는 것을 알게 되자, 결혼을 하고 빅토리아풍의 거대한 저택을 구입한다.  그곳에서 아이들이 태어나고 그들의 집은 이전에 뿔뿔히 흩어졌던 가족들이 모여서 행복한 시간을 보내는 공간이 된다.  하지만 연 이은 임신과 출산으로 지치기 시작한 그녀는 그들의 완벽한 행복에 불안을 느끼게 되고 그 불안은 보통아이들과는 다른 다섯째 아이 벤의 출산으로 현실화된다.  벤으로 인해 가족 모두의 평화는 위협받게 되고, 데이비드는 벤을 정신요양병원으로 보내지만 다시 병원에서 벤을 찾아 온 그녀로 인해 가족들을 하나 둘 뿔뿔이 흩어지고 종내에는 그 큰 집에 벤과 해리엇만이 남게 된다. 

 

    이 책을 읽으며 어느 순간 나는 우리 사회가 가지고 있는 이방인을 향한 극도의 혐오감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대한민국이 이미 다문화권으로 진입했음에도 제 3세계의 사람들에 대해 가지고 있는 뿌리깊은 혐오감, 그리고 같은 민족이었음에도 조선족에 대한 멸시 등은 과연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낯선 존재들을 향한 거부반응은 우리 피 속에 내재된 것이란 말인가!  난 다섯째 아이를 향한 증오심을 내 자신도 은연중에 갖고 있음을 깨닫고 깜짝 놀라게 되었다.  

 

「~이 아기는 근육질에다 기다랗고 노르스름했다.  ~전혀 아기같이 생기지도 않았다.  누워 있는 동안 마치 그곳에서 웅크리고 있었던 것처럼 두툼한 어깨에다 구부정한 모습이었다.」p67

「~그 애의 작고 차가운 눈은 악의에 차 보였다.」p71

「~그 애는 장난감을 갖고 놀지 않았고 그것들이 깨질 때까지 벽이나 마루에 내려쳤다.  그 애가 아무것도 잡지 않고 홀로 선 날 그 애는 승리감에 울부짖었다.~그것은 냉혹한 승리였다.」p81

 

   벤을 임신한 해리엇은 이 아이가 배속에서부터 남다른 존재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자, 그 아이가 죽기를 바라게 된다.  출산 이후에도 끊임 없이 아이가 죽기를 바랐으면서도 막상 정신요양원에서 감금상태로 인간 이하의 죽음을 목전에 둔 아이를 보자, 아이를 다시 집으로 데려 온 그녀의 행동은 모성애라고 볼 수 있을까?  그녀는 벤이 살해당하지 않도록 구해 온 자신의 행동이 과연 모성애였는지를 자문하게 되지만 대답을 얻을 수가 없었고, 책이 끝날 때까지 벤의 존재로 인해 그녀의 가정이 어떻게 되었으며, 벤이 어떻게 되었는지에 대한 결론을 찾을 수 없었다.  남다른 벤의 출생에 대해 해리엇은 인간의 아주 오래된 고대의 유전자(약육강식)를 가진 아이가 태어난 것이라고 믿는다.  그래서 정상적인 유전자를 가진 종족들에게는 이해받을 수 없는 종족인 벤은 자신과 같은 종족을 필히 찾아나서게 될 것이다.  책 말미에 집을 나가는 벤의 모습에서 우리는 벤의 향후 행동을 짐작할 수 있다. 

 

  우리도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우리는 국가, 민족, 성별, 직장, 학교, 가족 등 수 많은 제도 속에서 살아가고 있으며 지금도 새로운 제도들이 만들어지고 있다.  제도는 절대다수의 최선을 위해 존재하며 그 안에서 소수의 의견은 암묵적으로 무시되거나 묵살된다.  이 제도의 본질적 특성으로 인해 소수자는 이 사회 곳곳 어디에서나 양산되고 또 고립될 수 밖에 없다.  오히려 사랑으로 유지되야 할 가족 속에서도 이해받지 못하는 벤의 존재를 통해

우리도 알지 못하는 사이 우리가 무수히 많은 벤(고립된 채 정신적으로 병들어가는 소수자)을 만들어내는 것은 아닌가 생각해 보게 된다.  이 책이 말해주지 않는 결론은 그렇게 고립된 존재들(벤)이 사회의 음지로 숨어들 것이며, 그 음지 속에 이방인들이 모여든 세상이 얼마나 더 끔찍해 질 것인지만을 암시할 뿐이다.   

 

   벤은 책에 묘사된 것처럼 기괴한 존재였을까?  가족에게 끔찍한 증오감과 불안을 이끌어냈던 벤은 타인의 눈에는 조금은 남다른 지진아일 뿐이다.  길리 박사는 해리엇과의 면담에서 벤이 정상범위에 있다고 말했고, 벤이 다닌 상급학교의 교장은 그녀에게 벤이 학구적인 아이는 아니지만 노력은 열심히 하고 있다고 말한다.  해리엇은 벤이 다른 아이들에게 위해를 가하지 않을까를 걱정하지만 실상 벤은 그녀의 우려와는 달리 학교에서 문제를 일으키지 않았고, 오히려 집에서는 폴에게 놀림을 당하기까지 한다.  그에게 증오의 눈길을 던지는 가족보다는 존의 일당들에게서 친근감을 느낀다. 

  그렇다면 벤과 같은 아이들의 탄생은 과연 유전자의 오류로 인한 재앙이란 말인가?  어느 누구도 그러한 상황을 원하지는 않지만, 우리의 삶은 그렇게 원하지 않는 다섯째 아이와 같은 상황들을 우리 목전에 들이밀며 선택을 강요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렇게 해리엇의 행동이 인간이라면 해야 할 마땅한 행동이었음에도 가족으로부터 비난받았던 것처럼, 부조리한 일들이 끊임없이 일어난다. 

과연 벤은 가족들의 눈을 통해 비춰진 것처럼 끔찍한 괴물이었을까?  해리엇의 눈을 통해 보여진 벤의 모습은 기괴하고 공포를 자아내게 한다.  가족의 넷째 아이 폴의 사랑스러운 묘사 앞에서 상대적으로 벤은 더 흉하게 보였던 것은 아니었을까?  절대다수로 구성된 가치체계 속에서 그곳에 편입되지 못하는 소수는 혐오감을 유발시킨다.  그들과 다른 가치관과 다른 외모를 가진다고 해서 소수가 혐오받아야할 이유는 그 어디에도 없다.  이성적으로 이러한 사실을 이해하는 사람들에게도 존재하는 거부반응이 어디에서 오는지에 대한 고민은 도리스 레싱은 90에 가까운 삶을 사는 동안 해 온 것 같다.  사회를 유지하는 제도는 절대다수를 위한 최선이기에 그 안에서 필연적으로 소수자를 양산할 수 밖에 없는 세계의 질서와 소수자들에 대한 이해를 위해 노작가는 전 생애를 기울여 얘기하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