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노트/J.M 쿳시

삶? 끊임없이 매혹당하는 인간

묭롶 2011. 10. 10. 22:00

 

  태양빛은 온 세상을 환하게 비추지만 우리는 그 빛이 존재함을 인지하면서도 그 구체적인 형태나 모양을 육안으로 확인할 수 없다.  

빛은 비온 뒤의 무지개나 성당의 스테인드 글라스를 투과할 때 비로소 우리 앞에 가시화된다.   문학 또한 스테인드 글라스처럼 인간의 삶이라는 실체없는 진실을 글을 투과체 삼아 우리 앞에 구체화시킨다.  노틀담 대성당의 

<장미의 창>으로 쏟아지는 아름다운 빛무리처럼 문학이 구체화한 삶의 모습은 우리에게 다양한 감수성을 제공한다.  

 

  누구나 살아가는 삶이지만, 삶은 다큐멘터리가 아닌 드라마(소설)가 됨으로써 더 큰 감동과 파장력을 갖게 된다.

  뉴스를 통해 인화학교 사건을 접했을때보다 영화 '도가니'를 보며 사람들이 더 분노하고 그 분노가 인화학교 폐쇄로 이어진 최근 일만 보더라도 우리네 삶에서 문학이 차지하는 무게를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글을 도구삼아 삶을 투과시켜 그 무수히 많은 삶의 낱겹들을 펼쳐보이는 일은 도자기에 가을하늘빛을 담으려 했던 도공의 노력만큼이나 어려운 일이다.  

<노틀담 대성당에 있는 '장미의 창'>

 

  특히 자가출판과 소셜매체를 통한 글이 넘쳐나는 요즈음 삶은 오래도록 관찰하고 마음으로 녹여내어 그려내는 한 폭의 그림이 아닌 단순히 손가락으로 찰칵하고 눌러 찍어나온 사진이 되어버렸다.  상업성을 등에 업은 자극적인 사진같은 글 속에서 삶은 산채로 핀을 꼽아버린 박제품처럼 단순한 볼거리로 전락했다.   그래서일까.  쿳시의 소설을 읽으며 네개중에 반드시 한개가 정답인 사지선다의 문제만 보다 주관식을 마주친 듯한 난해함을 느낀 건지도..

 

「나는 한가로운 변방에서 은퇴할 날을 기다리며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는, 
제국을 위해 봉사하는 책임 있는 시골 치안판사이자 관리이다.  ~그리고 해가 뜨고

 지는 것을 바라보며, 먹고 자고 만족해한다.  내가 죽으면, 신문에 석 줄정도의 

기사는 실릴 수 있게 되기를 바란다.  나는 조용한 시대에 조용한 삶을 사는 것 

이상의 것을 바란 적이 없다. 」 p17  『야만인을 기다리며』

 

  자신이 주인공인 삶을 살아가면서도 정작 '자신'은 없는 우리네 삶을 국경지대의 늙은 치안판사를 통해 형상화시킨 J.M 쿳시의 『야만인을 기다리며』에서 문장은 한없이 느리고 대상의 언저리를 맴돌고 있었다.  산의 능선을 타고 터벅터벅 내려오는 산행처럼 그의 글은 대상의 직접적인 구체화가 아닌 화자의 눈을 통해 대상을 오래 관찰하게 함으로써 독자가 자신의 눈으로 대상을 인식하게 만든다.  그의 이러한 전략은 내가 읽은 그의 모든 작품에서 반복적으로 이뤄지는데(『야만인을 기다리며』 에서 눈먼 원시인 여자를 대하는 치안판사의 행동, 『추락』에서 자신의 제자에게 매혹당한 루리교수 ), 이는 『어느 운 나쁜 해의 하루』에서도 안야에게 매혹당한 노작가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대상에서 한발 물러난 그의 관조는 흡사 토마스 만의 단편 작품집 『토니오 크뢰거』 에 수록된 「베니스에서의 죽음」과도 닮아있다.  

 

「어떤 아이가 그 소년에게 말을 걸자 그 소년은 형용할 수 없을 만큼 사랑스러운 

미소로 답하면서, 이층에서 벌써 내렸다.  두눈을 내리깔고서 뒷걸음을 쳐서 

승강기에서 나가는 것이었다.  아름다움이란 부끄럽게 만드는구나하고 아셴바하는 

생각했다.」 p465  『토니오 크뢰거』

 

「 나는 대야를 밀치고 발을 닦는다.  나는 여자가 일어나랴고 애를 쓴다는 걸 알고 

있다.  그러나 나는 그녀가 이제는 알아서 처신할 거라고 생각한다.  나의 눈이 감긴다.  눈을 감고 더없이 행복한 현기증을 음미하자 짜릿한 즐거움이 느껴진다.  

나는 카펫 위에 눕는다.  그리고 금세 잠이 든다.」p 51 

「그러나 내가 이 여자에 대해서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내가 그녀에게 욕망을 느낀다고 확실하게 얘기할 수조차 없다.  나의 모든 에로틱한 

행위는 간접적이다.  나는 그녀의 몸에 들어가거나 그렇게 하고자 하는 욕구도 없는

 상태에서 그녀의 얼굴을 만지고 그녀의 몸을 애무한다.  ~그런데 이 여자한텐는 

몸속이 존재하지 않고, 내가 이리저리 들어갈 곳을 찾아 헤매는 표면만이 있는 것 

같다. 」 p75  『야만인을 기다리며

 

      토마스 만의  단편에서 어린 소년에게 매혹되는 노작가 아셴바하의 모습은 J.M쿳시의 작품 (추락)에서 여제자에게 매혹되는 루리교수와 (어느 운 나쁜 해의 일기)에서 안야에게 끌리는 노작가 세뇨르.C의 모습과 닮아있다.  

 

 그렇게 말을 알아듣지 못하다 보니 소년의 이야기가 음악으로 고양되었고, 

당당하기 짝이 없는 태양이 소년의 자태 위로 아낌없이 휘황찬란한 빛을 

쏟아부었으며, 바다의 초연한 깊이는 그의 모습 뒤에서 언제나 후광과 배경이 

되어주었다.  p478 ~그 이유는 파이드로스여, 아름다움만이 사랑스러운 동시에 

눈에 보일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잘 명심해라!  아름다움만이 우리가 

감각적으로 받아들이고 감각적으로 견딜수 있는 유일한 정신적 형태이니라. 

 ~ 그러니 아름다움은 느낄 수 잇는 자가 정신적인 것에 이르는 길인 것이다.  p482  『토니오 크뢰거

 

  일찍이 고전은 인간은 왜 사는가? 에 대해 여러가지 방식으로 답해왔다.  인구수만큼이나 다른 인간의 삶은 문학뿐 아니라 모든 예술 분야가 공통적으로 끊임없이 천착해온 메타포이다.  인간이 왜 사는가라는 질문은 곧 인간에게 주어진 삶(시간)이 갖는 의미를 되새기게한다.  그저 주어진 삶을 살아갈 뿐이라면 인간이 삶을 지속시켜갸 할 이유가 있을까. 그런 수동적 삶이 짐승과 다른 점이 있을까.  고전은 인간의 삶이 갖는 의의를 작품을 통해 구체화시키고 그 구체성을 지닌 인물들은 저마다의 아우라를 뿜어낸다. 

 

  「작가의 행복은 완전한 감정이 될 수 있는 생각을 가지는 것이며, 완전히 

생각이 될 수 있는 감정을 가지는 것이다.  그 외로운 사람은 그 당시 그렇게 

약동하는 생각과 그렇게 세세한 감정을 지니고 있었고, 또한 그런 생각, 그런 감정에 주의를 기울이고 있었다. ~  그는 갑자기 글을 쓰고 싶은 욕구를 느꼈다.

~그 주제를 자기의 언어로 조명함으로써 찬연히 빛나도록 해보고 싶은 욕심이 생겨 

갑자기 주체할 수가 없이 되었다.  그런데 실은 그의 욕구는 타치오가 있는 데서 작업을 하고, 글을 쓸 때 그 소년의 체격을 본보기로 하고 그의 문체를 그 신적으로 

보이는 육체의 선에 따르도록 함으로써, 마치 옛날에 독수리가 트로이아의 목동을 

천공으로 물고 올라갔던 것처럼 소년의 아름다움을 정신적인 것으로 옮겨놓고 싶은 

데로 치닫고 있었다.」 p 483-484   『토니오 크뢰거』

 

   J.M쿳시는 토마스 만의 베니스에서의 죽음에서 아센바하(작가)가 매혹되었던 타치우(소년)와 같이 노년의 남성(수동적 인물)과 젊은 여성(삶을 상징)에 매혹되는 노년의 남성(수동적 인물)을 내세워 인간이 삶이라는 근원적 질문에 답하고 있다.  한편으로 그의 소설에서 '여성'은 소설로 형상화 되어지지 않는 근원적인 질문들을 상징한다.  그런 이유로 그의 작품속 화자들은 '여성'을 성적대상이 아닌 '판타지'(이상 혹은 플라토닉적인 사랑)의 대상으로 대하는지도 모른다.  이는 토마스 만의 작품 「베니스에서의 죽음」에서 소년을 향한 아센바하의 집착으로 형상화되었고, 쿳시의 작품 『야만인을 기다리며』에서는 원시인 여자에 집착하는 치안판사의 모습으로 그려지고 있다.  이 작품에서 안야에게 끌리는 노작가 세뇨르.C의 행동에서 문학을 통해 '삶'의 본질에 조금 더 다가가려 노력하는 작가 자신의 모습을 엿보게 된다.

 

  쿳시에게 삶은 인간이 생활에 침잠되거나 뒤쳐지지 않도록 끊임없이 손짓를 하며 유혹하는 존재(그렇기에 쿳시의 작품 속 여성들은 성적인 대상이 아닌 에너지(대지 혹은 가이아-불꽃)로 형상화 되며 이에 매혹되는 남성은 그 에너지를 받아 변화(능동적 삶의 의지)를 일으킨다.  

 

나는 기분이 좋은 이유를 안다.  제국 수호자들과의 연합은 이제 끝났다.  

나는 반대편에 서게 됐다.  유대감이 깨졌다.  나는 자유인이다.  누군들 웃지 

않으랴?  하지만 얼마나 위험한 기쁨인가! p133   『야만인을 기다리며

 

~미스터 C, 당신이 틀렸어요.  그건 낡은 사고방식이에요.  ~능욕이든 강간이든

 고문이든 상관없어요.  당신의 잘못이 아니라면, 당신한테 책임이 있는 게 아니라면, 치욕은 당신한테 들러붙지 않아요.  그러니까 당신은 쓸데업는 것을 갖고 

괴로워했던 거라고요." p120~121 

   아니다.  내 의견들이 토대로 삼는 나의 열정과 편견들은 안야를 보기 오래전부터 

있었던 것들이고 지금은 너무 강해져, 즉 너무 고착되고 굳어져, 이곳저곳에 있는 

이상한 말들을 제외하고는 그녀의 눈을 통한 굴절이 그 생각을 바꿀 수 있는 

여지가 전혀 없었다.  p141 

 

이렇게 말했던 세뇨르.C가 아래와 같은 변화를 일으켰다.

 

 => 나는 추신에 이렇게 썼다.  "알려 줄 게 있어요.  나는 좀 더 부드러운 의견들을 

모으기 시작했어요.  ~그중 일부는 당신의 제안들을 받아들인 거요.

  ~한 번 봐 주겠어요?" p163 『어느 운 나쁜 해의 일기』 

 

   탄성을 잃은 고무줄같은 삶은 어떠한 '음(소리)'도 내지 못한다.  매혹(어떠한 형태이든)이 느슨해진 줄의 한 끝을 잡아당길때 삶은 그 자신의 고유한 소리를 내기 시작한다.   그의 전작 추락야만인을 기다리며에서 여성(매혹의 대상)으로 인해 변화하는 남성화자의 모습을 보여준 반면,  이 작품에서  세뇨르.C와 안야는 처음에는 느슨한 각자의 삶을 늘어뜨리고 있다가 서로 각자의 삶의 끝을 잡음으로써 각자의 소리를 내게 되고, 이는 서로의 삶을 변화시킨다.   쿳시는 이 실험적 형식의 작품을 빌어 인간의 삶을 지속시키는 힘이 끊임없이 삶에 매혹당함에 있다고 말한다. 쿳시의 작품 속 인물의 행동이 보편적 기준의 혐오(치욕)를 벗어나는 까닭은 그의 인물(노년의 남성)이 삶에 무기력한 보통의 사람들을 대변하기 때문이다.  아마도 쿳시는 자신을 빌어 삶의 에너지에 매혹(열중)당한 인간은 보편적 잣대로 나이먹지 않음을 얘기하고 싶은건지로 모른다.

 

PS: 한 작가의 작품을 읽고 그 다음 작품들을 통해 작가의 작품세계가 추구하는 바를 알게되고, 그 진화의 과정을 발견하는 일은 즐거운 일이다.  또 그 작품과 관련된 다른 작가의 작품의 연관성과 상호관계를 찾아보는 것도 기쁨을 준다.  쿳시의 작품 '추락'을 읽고 그 여운을 지울 수가 없어 블로그를 시작했는데, 오랜만에 만난 그의 작품이 너무 반갑고 자신만의 세계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그의 문체 속에서 다음 작품을 기대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