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노트/디미트리 베르휠스트

미사여구를 뺀 솔직한 글-<사물의 안타까움성>

묭롶 2011. 9. 7. 23:00

 

  아가가 뱃속에 있을때는 몸이 불편해서, 아가가 태어난 후에는 정신없고 여유가 없어서 책을 읽지 못한채 여러 달이 지났다.  아가용품을 인터넷으로 고르다 오랜만에 클릭한 인터넷 서점에서 이 책을 발견했다.  독특한 제목도 눈길을 끌었지만, 역자가 소설가 '배수아'라는 사실도 이책을 고르는데 한몫하였다.  '디미트리 베르휠스트'라는 낯선 작가이름과 술병에 이름이 적혀있는 표지 디자인도 특이해서  왠지 다른 소설들과는 다른 무언가가 있을 것 같다는 기대감이 들었다.

 

  물론 이 책은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작가의 불행?했던(일반인의 기준에서 볼 때) 유년시절이 길러준 인간의 삶에 대한 깊은 이해와 따뜻한 시선이 날 것 그대로의 거친 문체 속에 녹아들어 글을 읽을수록 짙은 방향이 배어나왔다.  책을 읽고 나는 임신한 이후 잊고 지냈던 '나'와 '나'의 유년을 되돌이켜 생각해보게 되었다.

 

  어쩌면 이 책은 보통사람이라며 자신을 내세우지만, 주정뱅이 보다도 솔직하게 살지 못하는 위선적인 우리들에게 던지는 화두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여전히 같은 마을에 살고 있으며 내 삼촌들을 나조다 더 자주

마주친다고 해도 프랑키는 이런 모습을 알 수가 없다. 흐느적거리며 걸어가는

희미한 군상들, 루저들, 바퀴벌레와 기생충글. 원래 불행항 사람들이 세상을

보는 방식 안에 더 많은 리얼리티가 담겨 있는 법이다.」p203

 

  평소 나는 나에 대해 설명을 하거나 남에게 소개를 할 때, 지금 말하는 나라는 대상이 나와 일치하는 인물인지 의문이 들 때가 많았다. 그런 의문이 들때의 나는 내 생각에도 나와는 이질감을 가진 낯선 존재로 느껴지기 때문이다. 『사물의 안타까움성』의 서문에 실린 "프란시스코 움브랄의 『간격의 현존』에 나오는 '어머니' 와 같이 나라는 인물을 설명하려하면 할수록 이질감은 커져갔다

 

 어머니가 내게 오려고 한 것이 아니라, 계속 글로 씀으로써

내가 어머니의 영혼을 불러냈던 것이다. 하지만 그러다보니

어느 순간 나는 실제의 어머니가 아닌 창조된 문학적 주인공을

그려 낸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리하여 내 진짜 어머니,

 죽은 어머니는 사라져갔다. 나는 이제 어머니가 없는 고아다.

어머니에 대해 너무 많이 써버렸기 때문에」

 

  저자가 인용한 글에서 잠작했겠지만, 언어를 통해 대상을 되살리는 과정은 필연적으로 대상의 실제와는 다른 또 하나의 창조물을 낳게 된다. 저자는 언어로 구현되는 문학의 한계를 인정하고 그 한계내에서 표현의 마사여구(사회통념적 검열의 잣대를 포함)를 제거한 날것 그대로를 담아내려는 실험을 이 책을 통해 실연하고 있다. 하지만 작가는 단순히 미사여구를 빼는 수준의 방법론에 머무르지 않고, 날것의 언어 속에 방향이 짙은 삶의 무게를 더함으로써 이 책이 보통의 자전소설에 머무는 것을 거부한다.

 

  하여 사회화의 과정을 거친 보통의 사람들이 읽기에 거부와 혐오가 느껴지는 대목에서도 그러한 표현이 있기까지의 과정에 대한 이해가 더해지며 독자는 보여지는 인간이 아닌 살아가는 하나의 주체로서의 인간을 발견하게 된다. (보통 사람들의 기준에서 단순히 알콜중독자이기만 했던, 작가의 아버지와 삼촌들은 언어라는 틀을 빌어 되살려지는 과정을 통해 대중의 이해와 연민을 받는 하나의 존재로 인정받게 된다.)

또한 베르휠스트 가족과 대비되는 프랑키의 삶(보통사람들의 삶을 대변)의 모습 속에서 우리가 현재를 살아가며 잊어버리고 애써 부정하며 합리화했던 것들의 실체를 확인하게 된다.  (나는 과거의 내 삶속에서 내가 피해자였다고 타인에게 외치며 동정을 구걸했던 나를 발견했다).

 

~그곳에는 특별히 견고한 바닥 설치물 위에 거미줄처럼 얽힌 선로가 깔려 있었다.~두 대의 열차가 충돌하는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았다. ~만약 내가 그런 끝내주는

모형을 갖고 있다면, 아마 한 번쯤은 열차가 탈선하거나 충돌 사고가 발생하고,

사랑의 실패로 절망한 사람들이 드라마틱한 장면을 연출하며 애인과 함께 철로 위로 몸을 건지는 그런 장면을 만들어 보았을 텐데~그는 그 인공 세계의 절대자이며

최고 재판관으로서, 그 세계가 실제보다 더욱 훌륭하게 기능하고록 통제하는데만

관심이 있었다. ~프랑키는 새 열차나 기관차 모형을 구입할 때마다 나에게 자기

지하실을 방문해서 자신의 새로운 성과를 구경하고 감탄해달라고 부탁,

아니 거의 사정하다시피 했다.」p179~180

 

  우리들 대부분이 작중에서 프랑키로 대변되는 삶을 살아간다.  자신을 중산층이라고 믿으며, 다른 사람들과 비슷하게 보조를 맞추며 사는 회색인간.  그렇게 사는 것이 정답이라고 자신의 삶을 스스로 조율할 수 있다고 믿는 착각 속에 어느 날 문득 허무와 함께 그간 묻어뒀던 지독한 외로움(세상에 혼자인 듯 한)이 찾아온다.  그제서야 자신의 주변을 둘러보는 우리들.......  조오현스님의 시 "아득한 성자"가 떠오른다.

 

<아득한 성자>

 

하루라는 오늘

오늘이라는 이 하루에

뜨는 해도 다 보고

지는 해고 다 보았다고

더 이상 더 볼 것 없다고

알까고 죽는

하루살이 떼

 

죽을때가 지났는데도

나는 살아있지만

그 어느 날

그 하루도

산 것 같지 않고 보면

천년을 상가고 해고

성자는

아득한 하루살이 떼

 

ps: 3시간 단위로 유축하고 아가를 키우다보니 정말 시간이 너무 없다.  책이 너무 읽고 싶었는데, 이 재밌는 책을 정말 장시간에 걸쳐 쪼개 읽을 수 밖에 없었다.  베르휠스트네 가족들을 보며 가족의 의미를 되새기게 된다.  요즘은 자신을 이해해주거나 이해해주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을 가진 사람들의 인생이 성공한 삶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알콜에 찌든 디미트리의 삼촌들보다 프랑키가 더 불쌍해보였는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