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노트/<카산드라의 거울>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상상력과 문학의 관계를 생각해 본다.

묭롶 2011. 4. 30. 18:02

 

  『개미』, 『나무』, 『타나타노트』, 『천사들의 제국』,『파피용』, 『신』 등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상상력은 아주 어린시절부터 소설을 써왔던 그의 이력만큼이나 독특한 문학적 시발점으로 자리매김해 왔다.  그럼에도 그의 상상력이 허무맹랑한 공상판타지소설류로 분류되지 않았던 것은 그 상상력의 기반이 현실세계를 매개로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독특한 표현방식을 통해 문학화된 그의 작품이 현재의 세계와 인간의 문제를 기존 문학과는 다른 방식으로 접근하며 새로운 시야를 제시해나가는 과정을 독서를 통해 공감하는 즐거움은 색다른 재미였다.  그래서 그의 신작이 거는 기대감이 컸다.

 

  사정상 한달이나 지나서 후기를 쓰게 됐지만, 『카산드라의 거울』은 분명히 그전 베르나르의 작품들의 상상력과는 일정부분 거리를 두고 있음을 발견하게 되었다.  (<개미>-><타나타노트>-><천사들의 제국>-><신>이 같은 뿌리를 갖는 작품들로서의 연관성을 지닌 반면 <카산드라의 거울>은 <나무>식 상상력의 확장판으로 여겨진다)

 

  이 작품은 인간이 미래를 볼 수 있다면 어떻게 될까?  라는 궁금증에서 출발한다.  그런데 그 미래가 정작 보고 싶지 않은 방향(주식이나 복권쪽이 아닌 재앙이나 테러, 죽음)에만 주파수가 맞춰져 있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고대 트로이의 공주(카산드라)가 트로이의 멸망을 예고했을 때 아무도 그녀의 말을 믿어주지 않았던 경우처럼, 현재의 카산드라는 불행하게도 사람들이 알고 싶어하지 않는 테러만을 예견하는 능력을 지녔다.  카산드라의 부모는 자신의 자녀(카산드라의 오빠와 그녀)를 실험대상으로 삼아 예지력을 갖게 하는데 성공하지만, 남매는 현실세계에서의 적응력을 잃게 되고 부모는 테러로 죽음을 맞게 된다. 

 

  여기에서 흥미로운 점은 예지력을 갖게 하기 위한 방편으로 과학자인 어머니가 남매에게 사물과 자신의 경계를 분리하는 기능을 가진 언어를 실험기간동안 차단했다는 점이다. 

 

「이것이 바로 이지도르 카첸버그의 생각이었어요.  그의 이론에 따르면,

모든 것을 잊게 만드는 것은 바로......말[言]이에요. 

아이가 첫 단어를 발음하게 되는 그 순간, 그 아이는 자신의 생각을 감옥 속에,

다시 말해서 언어의 틀 속에 가두기 시작한다는 거에요. 」p425  (2권)

 

  동물들이 거울에 비친 자신을 동일체로 인식하지 못하는 것처럼, 언어로부터 분리된 남매는 자신들과 세계의 경계를 구분짓지 못한다.  세계를 축약시켜 그 안에 담는 언어의 기능으로 부터 차단된 채, 무한히 확장된 자신을 통해 인식된 세계는 놀라운 통찰력과 예지력을 남매에게 심어주었다.  베르나르는 '언어'가 세계를 인식하는 도구이자, 자신의 세계를 규정짓는 틀로써 작용한다는 점을 인식의 순간마다 언어의 기원에 집착하는 카산드라의 모습을 통해 제시하며, 남들과 다른 통찰력을 가진 채 사는 삶이 어떤 의미일지를 우리에게 되묻고 있는 듯 하다.  고대 트로이 시대를 살았던 카산드라와 현재의 카산드라가 모두 예지력으로 미래를 예견했지만 아무도 그녀들의 말을 믿으려 하지 않았던 것처럼 모두가 피하고 싶어하는 불행에 대한 예견은 오히려 미래를 볼 수 없는 것만 못하다는 점을 깨닫게 된다.

 

  그런데 문제는 작중인물인 카산드라가 미래를 바꾸기 위해 했던 여러가지의 노력들과 개인적인 성장에 이르는  에피소드들이 너무 산만하게 흩어져서 서로가 연관성을 갖지 못한 채 단순히 작가의 생각이 발화의 단계에만 머물렀다는 느낌을 떨칠 수 없다는 점이다.  오히려 짧은 단편인 <나무>처럼 중단편에 머물렀으면 좋을 이야기를 인위적으로 장편으로 늘려놓은 식이다.  그 결과 이 작품은 현실과 유리된 공상물로(5초후 생존확률을 예고하는 시계와 미래를 위한 나무프로젝트 등)여겨지기까지 한다(현재에 대한 문제제기와 인류의 본성과 미래에 대한 진지한 고민을 가능하게 했던 <파피용>과 다르게. )

 

  결국 모든 예술이 표현기법의 변화를 통해 추구하고자 하는 궁극적인 목적이 새로운 통찰력을 통해 본질에 더 다가가기 위한 노력에 있는 것처럼, 문학의 경우에도 상상력은 발화의 시작이자 새로운 접근법이 될 수 있으나 그 상상력이 단지 발화의 표현에 머무른다면 본질에 다가갈 수 있을까를 생각해보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