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노트/김연수

<세계의 끝 여자친구>

묭롶 2010. 12. 27. 21:49

 

  고통을 표현하는 방법에는 여러가지가 있지만 상대방에게 구체적으로 그 아픔이 느껴지도록 전달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크게 표현의 방법에는 직접적 방법과 간접적 방법 두 가지가 있다.  친구를 만나 고통을 토로한다면 그건 직접적인 방법이다.  고통을 무언가의 대상을 통해 투영한다면 그것은 간접적인 방법일 것이다.  

 

  때로는 직접적으로 전해 듣는 것보다 한 장의 사진이나, 한 편의 글을 통해 표현되어진 고통이 더 가슴 깊이 다가올 때가 있다.  백 마디 말로도 위로가 되지 않고 주변의 그 누구의 존재도 도움이 되지 않을 때에도 노래가사 한 소절이나 시구절이 더 위안이 되는 때도 있다.  이처럼 직접화법보다 간접화법이 더 구체성을 가지고 다가오는 연유는 어디에 있을까?  그건 사람들이 다큐멘터리보다 소설에 끌리는 현상과도 연관성을 갖는 것으로 보여진다.  

 

  다큐멘터리는 사실을 근거로 제작된다.  그 속에서 벌어지는 모든 팩트들은 보는이의 감동을 자아낼 수는 있으나 사실 공감을 얻어내기는 힘들다.  그건 어디까지나 100% 타인의 삶이기 때문이다.  사실의 진술은 신문기사처럼 내가 개입할 공간을 주지 않는다.  실례로 신경숙의 『엄마를 부탁해』가 소설이 아니라 다큐멘터리 실화로 제작되었다고 가정해볼 때, 사람들은 엄마를 찾아주고 싶어할 테지만, 그것뿐일 것이다.  엄마의 실종이 소설이 되어 읽혀지는 순간 사람들은 그 주인공의 자리에 나를 대입시켜 그 이야기가 주는 고통을 몸소 체험하게 되고 그로 인한 여운이 오래 남게 되는 것이다.

  또한 소설로 쓰여지는 고통은 서로 다른 형태의 고통과 소통하며 그 고통의 현재의 나의 고통과 연결될 수 있는 힘을 지닌다.  사랑은 사랑으로 극복하고 슬픔은 더 큰 슬픔으로 위로받는다는 말이 있는 것처럼....... 

 

  김연수의 『세계의 끝 여자친구』는 그런 의미에서 살펴볼때, 다양한 형태의 고통이 글이라는 매개체를 통해 구체화되어진 작품이다.  「케이케이의 이름을 불러봤어」에서 연인을 잃은 미국인 작가의 슬픔이 아이를 잃은 해미의 고통과 연결되는 것처럼, 고통은 그 실체를 드러냄으로써 치유의 가능성을 내보인다.  아마도 그 가능성이 김연수가 소설의 은유적 표현(「다시 한달을 가서 설산을 넘으면」-에서도 주인공은 고통을 망각에 맡겨두지 않고, 그 아물지 않은 속살을 벌려내는 과정을 글쓰기를 통해 형상화하고 있다)을 통해 길어올리고 싶었건 것인지도 모르겠다.

 

엄마는 고통 속에서 죽어갔다.  삶의 마지막 순간까지 엄마와 고통을 함께한 것은 주기적으로 엄마의 몸속으로 들어가던 진통제뿐이었다.  고통 앞에서는 평생 가졌던 신앙마저도 진통제가 먼저 몸속으로 들어가기를 기다려야만 했다.  

나는 엄마 덕분에 삶과 죽음 사이에는 고통이 있다는 걸 알게 됐다.  

전적으로 개인적인 고통.  

엄마가 죽던 그 순간까지 나는 정신을 잃은 엄마의 손을 어루만지며 침이 마르도록

사랑한다고 말했으나, 그 마지막 순간까지도 나는 엄마의 고통만은 이해할수

없었다.p17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