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노트/<정의란 무엇인가>

현재 우리에게 필요한 정의는 무엇인가?

묭롶 2010. 8. 19. 23:00

 

 

'  정의'라는 단어를 듣고 나는 지난주 토요일에 EBS에서 방영된 '식코'가 떠올랐다.  미국에서는 의료보험제도를 민영화로 운영(시장의 자율에 맡김)한 결과 아이를 출산하는데 한화로 1000만원 정도가 들고 사랑니를 발치하려면 100만원 가량이 손가락이 잘려서 봉합수술을 하게 되면 300~500만원 가량을 부담해야한다.  오죽하면 자식이 희귀병에 걸려 민간 보험회사에 병원비를 청구했는데 약관상의 질병이 아니어서 지급이 안된다는 말을 듣고 절망한 한 흑인 아버지가 인질극을 벌이는 영화가 나오겠는가.......

  9.11 사태때 인명구조를 위해 직무활동 중 재해를 당했음에도 국가가 의료보험 혜택을 주지 못해 쿠바에서 무상의료 써비스를 받는 미국민을 보며 과연 정의가 무엇이며 정의로운 사회가 무엇인가를 되묻게 된다.

마이클 샌델은 위와 같은 질문들을 우리에게 던지며 진정 정의란 무엇이며 어떠한 것이어야 하는지를 묻는다.

 

  시대에 따라 정의에 대한 개념도 변하게 되는데, 아리스토텔레스로 대표되는 고대의 정의론은 미덕에서 출발하는 반면, 18세기의 이마누엘 칸트부터 20세기의 존 롤스로 대표되는 근현대의 정의론은 자유에서 출발한다고 볼 수도 있다.  샌델은 행복, 자유, 미덕의 관점에서 각각 번갈아가며 해당 관점에서의 '정의'가 무엇인지를 우리에게 설명한다.   이 세가지 관점은 또 각각 행복은 공리주의로 자유는 자유시장주의로, 미덕은 사회복지우선으로 대표되는데, 그는 실례를 들어 각각의 입장에서의 모순과 해결점이 무엇인지 우리게게 제시한다.

 

  과거 이데올로기 시대의 '정의'는 미국을 대표로 하는 자유진영의 벤담, 밀 등을 대표로 하는 공리주의자와 자유의 보장을 가장 최우선 가치로 여기는 자유지상주의자와 그 반대편에 만민의 평등을 외치는 공산주의로 대립되었다.  사실 '정의'는 만민의 공감대와 이해를 구할 수 있는 '무엇'이어야 한다고 말하는 저자의 강의내용처럼, 공산주의의 실패는 만민의 공감대 획득 부재에 있었다.

  이후 '정의'는 '자유'를 최우선의 가치로 여기는 자유시장주의자들과 공리주의자들의 이론적 뒷받침 속에서 급속도로 성장했지만, 그 자유의 결과 소득분배의 불균형과 환경오염, 전쟁이라는 심각한 결과를 초래하였다.  시장경제를 시장의 자율에 맡기라는 자유지상주의자들의 주장과는 다르게 부의 재분배는 이뤄지지 않았고 사회적 양극화로 인한 갈등과 불안감은 나날이 커져가고 있다. 

 

  이 부분에 대해 마이클 샌델은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미국인의 삶에서 불평등 심화를 걱정하는 더 중요한 세 번째 이유는, 빈부 격차가 지나치면 민주 시민에게 요구되는 연대 의식을 약화시킨다는 사실이다. 

 

~풍족한 사람들은 아이들을 사립학교에 보내고, 그 결과 도심 공립 학교에는

대안이 없는 가정의 아이들만 남는다.  학교뿐 아니라 다른 공공 제도나 시설에서도

비슷한 현상이 일어난다.  ~이처럼 부유층이 공공장소나 공공서비스를 이용하지 않게 되면서, 그것들은 달리 대신할 수단이 없는 서민들만의 몫이 되어버린다. 

이때 두 가지 악영향이 나타나는데, 하나는 재정 문제이고,

또 하나는 시민 의식 문제다. 

~공적 영역이 비어버리면 민주 시민 의식의 토대가 되는

연대와 공동체 의식을 키우기가 어려워진다.  P368

 

  그 결과 현재 자본주의(자유시장경제)의 문제점을 수정하는 대안으로 다시 '정의'가 대두되고 있다.  여기에서의 '정의'는 '공동선'을 지향하기 위한 방법론으로의 '정의'를 의미한다. 물론 여기에서 말하는 '공동선'은 공리주의자들의 '최대다수의 최대행복'과는 다른 의미를 갖는다.  공리주의자들이 인간의 행복을 계량화하여 단순히 더하고 빼는 등의 행위를 통해 본질적인 모순을 드러냈던 것과는 다르게 수정자본주의(공공의 복지에 국가가 일정이상의 역할을 이행하는)라고 흔히 명명되는 방법론으로의 '공동선'은 자발적인 다수의 노력과 참여, 그리고 다수의 공익을 지향한다. 

 

  마이클 샌델의 '공동선'개념은 일정부분 미국 정치철학자 존 롤스의 <정의론>에 이론적 근거를 바탕으로 한다.  존 롤스는 <정의론>이라는 책에서, 정의를 고민하는 올바른 방법이 행복, 자유, 미덕 세 가지를 기준점으로 삼는 것에 있지않고 원칙적으로 평등한 상황에서 어떤 원칙에 동의해야 하는가를 묻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롤스는  평등한 상황에서의 동의를 통해 얻어진 가언계약에서 정의의 원칙 두 가지가 나온다고 생각한다.  하나는 언론의 자유와 종교의 자유 같은 기본 자유를 모든 시민에게 평등하게 제공한다는 원칙(인권)이고, 두 번째는 사회적, 경제적 평등과 관련한 원칙이다. 

 

  결국 저자는 자유를 옹호하는 지금까지의 '정의'로는 국가라는 공동체의 존속이 어렵다는 주장을 하기 위해 하버드에서 20년이 넘도록 강의를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의 책을 읽고 갈수록 다문화 가정이 늘어나고 국가의 경계가 약화되는 현실 속에서 국가라는 공동체로의 결속을 위해서는 자신이 사는 세상을 좀 더 나은 세상으로 만들고자 노력하는 공동체원들의 참여와 노력, 그리고 공동체의 결속에 위험요소로 작용하는 부의 불평등 해소(부의 재분배)를 통한 사회복지시설의 확충이 시급한 문제라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PS:  <정의란 무엇인가>의 저자는 공동체의 이해와 동의 속에서 만들어진 가언계약을 '헌법'이라고 말한다.  이 헌법은 타인이나 국가 등으로부터 보호받아야 할 개인의 인권과 자유를 내용으로 한다.  그런데 '유전무죄, 무전유죄'인 우리나라의 현실을 놓고 볼 때 과연 우리나라가 정의로운 나라인지 되묻지 않을 수 없다.

국민의 알 권리를 침해하고 개인을 국가가 사찰하는 등 온갖 불법과 부정이 판치는 현실에서 과연 정치인들은 '정의'를 입에 담을 자격이 있을까?

 

PS2: 샌델이 주장하는 정의론은 지극히 미국식의 '정의(자본주의에 입각한)'에 국한된다.  사회, 문화, 제도에 따라 '정의'는 상대성을 띠는데 그러한 상대성에 따른 분석의 부재가 아쉽다.  우리가 보기에 부당하다고 생각되는 이슬람의 율법 들이 아랍권에서는 '정의'로 통용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누가 누군가에게 '정의'의 이름으로 뭔가를 명명하며 판단의 근거로 삼는다는것 자체가 어불성설이다.  또 그런 이유로 행사되는 '정의(예로 미국의 모스크바 공습)'가 결국은 '힘의 논리'에 의해 주장될 수 있는 것이어서 아쉽다.  실제로 우리가 외치고 원하는 공익을 위한 '정의'는 언제나 묵살되며 정부와 집권층에 의해 '정의'라는 미명하에 이뤄지는 모든 것들만이 정당성을 갖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