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기/2010.4.2 ~3 <제주도>

4.3 항쟁 기념관 참배와 한라산 등정

묭롶 2010. 4. 13. 12:10

  4.3 항쟁에 맞춰 수련대회 행사를 올해는 제주도로 가게 되었다.  4월 2일에 목포항에서 배로 출발하여 4월 3일 다시 배로 돌아오는 코스였다.  비행기를 타고는 많이 갔던 제주도라...내심..'에이~~

볼 것 다 본덴데....'라는 마음으로 별 기대없이 배에 몸을 실었다.

 

  퀸 메리호라는 여객선은 정말 엄청나게 큰 배였다.  유속의 흐름을 거의 느낄수가 없을 정도였고,

그 배에는 4.3항쟁 참배를 위해 제주도를 가는 참배객들도 많이 보였다. 

(ㅎㅎㅎ.. 제주도로 가는 내내 배 갚판 선미 부분에서 '김 태희'가 영화 '그랑프리' 촬영을 했다는...

물론스테프들이 접근을 통제해서 다들 가까이서 보진 못했지만, 멀리서 지켜보고는 태희 얼굴이 조막만하다는 둥.  어쩐다는 둥 흥분들을 해댔지만.. 나는 별 관심없이 PASS!!!)

  목포항에서 9시20분경 출발한 배는 제주항에 오후 2시 20분경 도착해서 우리는 각각 버스에 나눠서 탑승한 뒤, 참배를 위해 제주도 4.3 평화공원으로 향했다.

<이미지출처::http://www.jeju43.go.kr/sub/catalog.php?CatNo=45>

 제주 4.3 평화공원은 작고하신 노무현 대통령이 재임시절 준공하여 조성된 공원으로 굉장히 넓은 대지에 기념관과 추모탑  등의 시설로 구성되어 있었다.  우리가 도착한 날도  다른 단체에서 참배객들이 다녀간 직후인지 집기류를 정리하는 사람들을 볼 수 있었다. 

 

기념관 내부는 테마공원처럼 일반인들이 4.3 항쟁에 대해 쉽게 접하고 제대로 알 수 있도록 각종 전시물과 영상, 조형물들로 구성되어 있어서 제주도 특유의 검은돌로 만들어진 굴을 따라 전시관의 끝에 이르러 다녀간 추모객들의 추모글이 걸려있는 출구로 나설 즈음에는 자연스럽게 4.3을 추체험할 수 있게 조성된 공간이었다.   (전시물중 통일이 되면 비문을 적기 위해 마련해둔 백비가 인상적이었다.  언제쯤 통일의 그날이 되어 비문을 작성하게 될까?)

 

사실 언론에서 제주 4.3 항쟁에 대해 접해왔음에도 실상 그 항쟁의 이면에 어떤 사건들이 있었는지 전후관계를 알지 못했던 나에게 이번 제주 평화공원 기념관 참배는 뜻 깊은 계기가 되었다.

광주에서 태어나 광주에서 자란 내가 5.18을 잊지 못하는 것처럼, 제주도민의 가슴 속에서 4.3을 지울 수가 있을까?  아름다운 제주로만 알고 있었던 이곳 제주에서 무려 3만명이 넘게 학살되었다니,  제주가 달리보였다. 

 

가장 가슴이 아팠던 것은 4.3항쟁의 시발점이 우리 역사가 청산하지 못한 친일, 친미에서 시작되었다는 점이었다.  지금도 친일파의 자손은 떵떵거리고 자손만대 편히 사는데, 독립운동가들의 집안은 풍비박산 내지는 극빈의 생활을 이어가야만 하는 이 나라의 현실이 또 다른 비극을 불러오지 않을까라는 불안감마저 갖게 되었다. 

 

해방이후 미군정이 들어서고 이승만 정권이 친미를 하면서, 친일 경찰과 관료들을 다시 등용시킨데서 비극은 시작되었다.   요즘 돌아가는 걸 보면 친일을 청산하지 못한 대가를 앞으로도 자손 후대까지 치르게 될 것 같아 걱정이다.  을사오적은 나라를 팔아먹었고, 친일파를 후손으로 남겨주었으며, 이승만 정권은 친미를 위해 동족상진인 6.25 동란도 모자라, 제주도에 미군정을 주둔시키고 친미세력인 서청을 이용하여 제주도민을 학살시키고 제주도민을 무장진압하라는 명령을 내려서 여순사건의 단초를 제공했다.  그뿐인가 이승만의 독재를 타도하기 위한 6.29 항쟁에 이어 정권을 무력으로 장악한 군사정권은 5.18을 일으키기에 이르렀으니, 이 저주받을 친일과 친미의 역사의 굴레를 벗어던지지 못한 우리의 미래가 어찌 걱정되지 않을 수 있을까?

 

 <<이미지출처>> http://blog.daum.net/yaconyp/7057343

이완용과 을사오적의 주인공 5인 사진

을사오적(乙巳五賊)은 1905년 을사조약의 체결을 찬성했던 학부대신 이완용, 군부대신 이근택, 내부대신 이지용, 외부대신 박제순, 농상공부대신 권중현의 다섯 사람을 말한다.  (여기 곧 하나 추가 예정이요)

 

 

 

 

명단

이름 생존연대 (당시 나이) 당시 직위 이후 경력
이완용 (李完用) 1856년~1926년 (50세) 학부대신 후작, 중추원 고문 겸 부의장
이근택 (李根澤) 1865년~1919년 (41세) 군부대신 자작, 중추원 고문
이지용 (李址鎔) 1870년~1928년 (36세) 내부대신 백작, 중추원 고문
박제순 (朴齊純) 1858년~1916년 (48세) 외부대신 자작, 중추원 고문
권중현 (權重顯) 1854년~1934년 (52세) 농상공부대신 자작, 중추원 고문

 

<제주도에 주둔한 미군정:제주4.3 진상 조사 위원회 자료 펌>

 

<그래도 고 노무현 대통령은 재임시절 공권력에 희생당한 제주도민들의 억울한

죽음에 대해 국가의 수장으로서 사죄한다고 까지 했는데, 고개는 이럴때 숙여야 하는게

아닐까?  다시 봐도 천불나서 님들을 위해 모자이크 처리했다.  -뉴스는 모자이크

처리를 안해줘서 못 보고 있다>

숙연했던. 4월 2일을 보내고, 얼마전 1박2일 팀이 숙박을 했다는 유스호스텔에서 숙박을 한 우리

일행을 4월 3일 아침 한라산 등반에 나섰다.

어리목-> 윗세오름-> 영실

코스로 대략 4시간가량 걸리는 코스였다

내가 듣기로는 한라산은 맑은 날이 일년에 며칠 되지 않는다고 들었는데

우리가 간 날은 정녕 축복받은 날이었는지 너무나 쾌청했다.

 

 

 어리목에서 윗세오름까지는 1시간 20분가량 계속된 오르막길이었다.  오르기 편하게 계단식으로

조성이 되어 있었지만, 다들 저질 체력 탓에 숨이 끊어질 듯 힘들어했다.  음... 내 걸음으로는(ㅎㅎ

빠르게 간다면) 영실까지 3시간 정도면 주파가 가능할 것 같던데....음파파파파파

암튼.. 중간에 버리지 않겠다고 약속했던 후배를 결국 과감하게 버리고 앞선 자들을 모두

제치며 산에 오른 나는 윗세오름에서 얼어죽을 뻔 했다.  등산복 바지가 없어서 여름바지를

입고 간 결과, (윗세오름에는 얼음이 얼어 있었고, 바람이 얼마나 거세게 불던지..ㅜ.ㅡ 온 몸이

얼어붙는 것 같았다.) 밥만 (땡땡 얼은) 훌라랑 먹고 바로 내려와야 했다.

 한라산의 등산로는 거의 이렇게 계단식으로 포장되어 있었다.  영실로 내려가는 길에 반팔에 반바지 입고

땀 뻘뻘 흘리며 올라오는 등산객들을 보니, ㅎㅎㅎㅎ 윗세오름가서 얼어죽기 딱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우... 저 낮은 구릉들....말 타고 달리면 딱 좋겠단 생각이....한라산의 애마부인!!!

 내려가는 길에 제주도민으로 보이는 두분의 아주머니 등산객과 마주쳤다.  잘 알아들을 수 없는

제주도 방언으로 대화를 하셨지만, 근래 들어 이렇게 좋은 날씨는 처음이라는 말씀에 기분이 좋았다.

 제주도에는 '바람', '돌', '여자'가 많다고 삼다도라 하던데, 하나 추가해야 할 듯, 살찌고 털에 윤기가

반들반들하고 몸치가 독수리 만한 까미귀들이 얼마나 많던지,   캬!!! 요놈들.. 풀은 줘도 안 먹고

계속 고기만 주라고 깍깍 거린다.

 자랑스런 대한민국 아줌마의 포스!!! 같이간 남자동료들은 날 보고 "누구씨.  그냥 이 참에 군대가!"

라며 적성을 살려야 한다고 날 군대로 보내려 했다.

 날씨가 너무 좋아서 해안선 끝가지 다 보였다.  크게 외칠걸 지금도 후회된다.

"야 이놈들아!!! 독도는 우리땅이고 대마도도 우리땅이다!!!"  다음번에 꼭 가서 쩌렁쩌렁하게

외쳐줄테다(그렇잖아도 동료들이 군대보낼려고 하는데, 목청까지 좋은거 들키면 정말 보낼까봐 참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