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노트/<덕혜옹주>

조선의 마지막 황녀, 덕혜옹주!

묭롶 2010. 2. 22. 22:33

 

  이 책을 읽고 나는 문득 인디언들의 모습을 떠올리게 되었다.  버팔로가 무리지어 다니는 넓은 황무지를 말을 타고 달리는 인디언들...., 그들 자신이 자연의 일부였으며 자연을 소중히 여겼던 사람들.  오만과 독선보다는 자연을 스승삼아 지혜를 구하고 겸양의 덕을 쌓았던 그 인디언들.  아마도 그들은 처음 미국인을 만났을 때 자연이 보내준 또 한 부류의 친구라며 손을 내밀었을 것이다.  하지만 내민 손을 뜨겁게 피를 흘리며 주검이 된 동족의 피로 적시게 된 인디언들은 이후 백인들과 처절하게 싸워야했다.  그렇게 그들은 백인들의 총, 칼 앞에 역사에서 사라졌다. 

 

  19세기의 중엽과 20세기 초반에 걸쳐 대대적으로 이루어졌던 인디오 숙청과 1. 2차 세계대전, 남북전쟁을 거쳐 미국은 세계의 최강자로 자리매김했지만, 국가정체성을 결정짓는 자신들만의 역사를 규정지을 수 없었다.  그런 이유로 자신들만의 역사를 갖지 못한 채 다민족으로 이뤄진 미국이라는 나라는 주연방제를 선택하게 됐는지도 모른다.  지금도 미국은 타국을 대상으로한 그들의 핏빛 역사를 계속해서 되풀이하고 있다.

 

  『덕혜옹주』를 읽으며 난 지금은 잊혀져버린 인디언들과 그들이 누렸던 시대를 상상해보며, 과연 내 나라 대한민국이 독립을 이루지 못하고 일제에 흡수되었더라면 지금 우리의 역사가 남아있었을까를 짐작해보게 된다.

일제강점기 치하 일본인들이 폭압과 수탈에 더불어 우리의 말과 글을 금지하고 역사를 왜곡했던 이유가 바로

'역사'에 있었다.  '역사'가 한 나라의 '국가정체성'과 '민족정체성'을 이루는 근간이기 때문이다.

 

  덕혜옹주가 끝까지 마음 속에서 놓지 않고 지켜내려 안간힘을 썼던 까닭도 조선왕조의 역사를 증거하기 위한

산증인으로서의 의무가 아니었을까.  인간이면 누구나 누리고자 하는  정상적인 삶을 포기하면서까지 역사의 한 끝트머리를 부여잡고 세찬 바람에 시달렸던 조선의 마지막 공주는 그렇게 산 채로 산화해갔다.  흡사 찬란했던 문화재가 오랜 풍파에 휩쓸려 색채가 바래고 부식되는 것처럼 그녀는 일제에 의해 급속도로 피폐화되었다.

 

~망국의 옹주로 태어나 서러운 생을 살았지만 이처럼 서러운 적은 또 없었다. 

세상의 어느 어머니가 이토록 외로울 수 있으며, 세상의 어떤 여인이 이토록 서러울 수 있을까. 

내 곁에는 바람소리도 머물지 않는다.  모든 것이 내 곁을 스쳐지나갈 뿐이다. 

세월이여, 진정 따스한 손길을 보내주오.  내속으로 낳은 아이마저 나를 모른다 하오. 

나와 살을 섞은 남자도 나를 모른다 하오.  나를 낳은 나라도 나를 모른다 하오. 

나는 부유하는 먼지처럼 이 세상 어디에도 마음을 내려놓을 수가 없소. 

이토록 삶이 무겁다니. 이토록 고단하다니..... p337

 

~그처럼 옛 인연들을 의식에서 몰아내지 않았다면 옹주는 여태 살아 있지도 못했으리라. 

옹주가 갈구하는 것들은 침묵 속에서만 지킬 수 있는 것들이었다. 

소리 내지 않고, 말하지 않고, 밝히지 않아야 하는 것들이었다. 

그러다 종내는 자신이 무엇을 갈구했는지조차 잊어야 하는 것들이었다. 

그래야만 하는 것들이었다.  p398 

 

  요즘처럼 어지러운 시국에 이 책이 베스트셀러가 된 이유는 그만큼 이 책이 하려는 (덕혜옹주가 하고 싶었던)

말에 사람들의 공감대가 형성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과거 제국주의의 이름 하에 이루어졌던 타민족의 역사말살은 오늘날 자본주의라는 이름하에 우리가 의식하지 못한 방식으로 우리를 잠식해가고 있다.  바로 얼마전 영화 아바타를 통해 자신들이 말살시킨 인디언의 정신이 마치 선의의 미국인들의 정신인 것처럼 표현한 미국인들처럼, 금력이 힘이 되고 돈이 역사가 되는 자본주의 앞에 제 3세계와 영세국가들은 그 역사적 가치조차도 무시당해 자기소멸의 길을 걷고있다.  자본의 논리를 내세우며 청산되지 않은 과거를 과거는 과거일 뿐이라며 역사 속에 묻어두자는 논리는 밑바닥이 시커멓게 썩어버린 하천에 새물을 붓는 격이다.   왜곡된 역사를 올바르게 바로 잡고 잊혀진 역사를 복원하며 그릇된 잔재를 청산하는 일, 이 모두가 바로 먼저 간 덕혜옹주가 그렇게 보고싶어했던 완전히 독립된 자유국가 대한민국의 모습이며 바로 우리가 새로 써 나가야 할 내일의 역사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