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노트/<하인리히 뵐>

<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

묭롶 2010. 2. 1. 11:40

 

 우리는 작년 5월 재임기간 내내 보수언론의 집중포화를 맞다가 이 세상을 버린 한 사람을 알고 있다.  자신의 입으로 자신을 '바보'라고 지칭했던 그 사람은 언론의 집중 공격 속에서도 소신을 버리지 않았다.  부러질지언정 구부리지 못해서 끝내는 부러졌던 그 분의 일을 겪으며, 언론이 사람을 죽일수도 살릴수도 있는 무서운 무기임을 깨닫게 되었다.  그래서일까?  국민이 동의하지 않는 미디어법을 강행통과시키고, PD수첩 제작진들이 줄줄이 검찰에 소환되고 YTN노조원들이 연행되는 사태를 바라보며 언제부턴가 난 뉴스와 신문을 멀리하게 되었다. 

 일제강점기 시절 민중의 계몽과 조선의 독립을 목표로 창간되었던 독립신문을 필두로 이후 줄지어 창간된 신문언론들은 언론의 순기능보다는 지배권력층의 구조를 견고하게 떠받드는 축으로 성장했고, 언론과 권력은 악어와 악어새와 같은 공생의 길을 걸어 왔다.  그 결과 보수언론은 부를 쌓아왔고, 독재정권과 군사정권을 거치며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진실들은 언론에 의해 은폐되고 왜곡되어졌다.  실제로 외세의 강압에 의한 선거를 반대하며 항거했던 제주도의 4.3항쟁은 공산세력을 등에 업은 반란으로 매도되어 5만명이 학살당했으나 4.3사태로 왜곡보도된 채 오랫동안 역사 속에 은폐되었고, 독재정치에 반대하며 봉기했던 광주 5.18민주항쟁은 광주시민 모두가 빨갱이로 왜곡보도되어 5.18민주화특별법이 제정되기 전까지 5.18사태, 즉 국가반역을 의미하는 '사태'로 보도되어졌다.

 

  조지오웰의 소설 <1984>에서 과거의 역사는 언제나 현 정권의 권력자들의 체제유지를 위해 계속해서 고쳐지고(날조되고) 조금이라도 지식이 있는 자(의식있는 자)들은 체제 안에서 서로가 서로를 감시하고 감시당한 채, 비밀경찰에 의해 통제되는 삶을 강요당하고, 하층민들은 무지몽매한 상태로 억눌린 분노를 서로에게 터뜨리며 그저 고착화된 삶 속에서 정부의 의지대로 복권당첨의 헛된 꿈에 부풀어 살아간다.  사용하는 언어마저도 사람들에게 정치적인 반응을 이끌어내거나 부정적인 감정을 일으킬 수 있는 단어들은 끊임없이 삭제되고 신조어로 교체된다. 

<1984>에서 언어가 역사를 날조하고 중간계층을 감시하며 하층을 고착시키는 등 상층의 권력체계를 유지시키기 위한 구조적 틀로 사용되었다면 <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는 그 부제가 말하는 것처럼 <언론으로 인해> <개인의 명예 실추와 폭력은 어떻게 발생하고 어떤 결과를 가져올 수 있는가>를 성실하고 정직한 가정부 카타리나 블룸사건을 통해 우리 앞에 객관적으로 제시한다.

 

  카타리나 블룸은 불행한 가정사에도 불구하고, 명철한 사고와 성실하고 정직한 직장생활을 통해 주변사람들의 신임을 얻어 강변가의 아파트를 구입하기에 이른다.  하지만 댄스파티에서 우연히 만나 사랑에 빠진 괴텐이 경찰에 쫓기고 있음을 알게된 그녀는 경찰 몰래 그의 도주를 돕는다.  경찰은 그녀를 범죄자를 은닉하고 도피시킨 혐의로 구금시킨 채, 괴텐의 행적을 캐묻지만 그녀는 입을 다문다.  언론은 탈영병의 탈주보다는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킬 수 있는 탈영병의 애인, 즉 그녀의 숨겨진 사생활을 들춰내는 데 혈안이 되어 객관적 사실에 입각하지 않은 선정적 추측성 기사를 남발하게 된다.  이제 공개적으로 신문지상을 통해 성실하고 정직한 그녀의 삶은 냉혹하고 치밀하며 정체를 알 수 없는 남자들의 방문을 받는 삶으로 왜곡보도되고 모든 사람들이 그것을 진실로 받아들이게 된다. 

한 부인은 가면으로 얼굴을 가린 채 카타리나로부터 등을 돌리지도 않고 바로 옆에 서서

 '뻔뻔스럽고 가혹한 갈색 눈'으로 거리낌 없이 호기심에 가득 차서 그녀를 훑어보았다.(P79)

~나머지 열여덟 통의 우편물 중 익명의 엽서 일곱 통은 손으로 쓴 '음탕한' 섹스 광고였고

어떤 식으로든 "공산주의자들의 암퇘지'라는 말을 사용했다.

~다섯 통의 편지에는 <차이퉁>의 기사가 오려 붙여져 있었는데, 대부분의 편지가,

그러니까 대략 서너 통은 가장자리에 빨간 잉크로 코멘트가 달려 있었다. 

주로 "스탈린이 할 수 없었던 것은 너도 못 한 것이다."라는 내용이었다.(P80)

그녀는 자신의 명예를 실추시킨 <차이퉁>지를 고발하려 하지만 경찰로부터

"논쟁의 여지가 분명한 형태의 저널리즘을 형사적으로 추적하는 일"은 경찰이나 검찰청의 소관이 아니라는 사실을(P67)

통보받는다. 

선정적 언론보도로 인한 충격으로 블룸의 어머니가 죽음을 맞게 되자, 사건을 보도했던 <차이퉁>지는

"블룸 부인의 진술을 다소 바꾼 것에 대해 그는 기자로서 '단순한 사람들의 표현을 도우려는'

생각에서 그랬고, 자신은 그런 데 익숙하다고 해명했다. (P107)

카타리나의 고용주인 블로르나는 그녀를 돕기위해 <차이퉁>지에 카타리나의 아버지가 위장한 공산주의자라고 제보했던 게멜스 브로이히의 한 신부를 찾아가 사실유무를 묻지만, 사실여부가 아닌 그 기사가 개인의 추측에 의지한 추측보도였음을 확인하게 된다.

~우선, 이 신부는 자신의 질술을 거듭 확인해 주었고, <차이퉁>이 그의 말을 그대로 올바르게 인용했다고 인정했으며,

자신의 주장에 대한 근거는 제시할 수 없고 그러고 싶지도 않다고 했다.  심지어 그럴 필요가 없다고까지 말했다. 

그는 자신의 후각이 항상 믿을 만하다며, 블룸이 공산주의자라는 냄새를 그냥 맡았다고 했다.(P124)

 이에 카나리나 블룸은 개인적인 인터뷰권을 전제로 자신의 사건기사를 담당했던 기자를 만나 정정보도를 요구하려 하지만, 자신을 기자가 기사속에서 보도했던 왜곡된 그녀의 모습으로 취급(성적으로 희롱)하려는 기자의 행동에 격분하여 준비해간 권총으로 기자를 살해하고 만다.  불과 일주일전까지 평범하고 성실하게 자신의 꿈을 위해 한발자국씩을 더디게 내딛으며 밝게 살았던 카타리나는 언론공개 일주일후 살인자의 신분으로 전락하게 된다..

 

  작가인 하인리히 뵐은 이 작품을 소설로 분류하는 것을 거부했다.  물론 소설로서 읽히는 것도 거부했을 것이다.  그 까닭은 이 작품이 가상의 픽션에 의한 소설이 아니라 실제에 기반한 이야기(팸플릿)로 전달되기를 원해서였다.  그는 언론으로 인해 한 소시민의 삶이 얼마만큼 망가질 수 있는지를 카타리나 블룸이라는 가공의 인물을 들어 그 위험성을 증거한다.  그가 일부러 이 이야기의 서두에서 이야기의 사건과 인물이 픽션임을 강조하면서도 그당시의 보수언론과의 유사성을 독자들이 느낀다면 이는 불가피한? 일이라고 밝혔던 것도 어찌보면 이 글로 인해 또 다시 보수세력과 보수언론이 자신을 공격할 것임을 역설적으로 비틀어 꼬집었다고 볼 수 있겠다.  

이후에도 보수언론들의 부도덕함은 변함이 없었는지, 이 작품을 쓰고 10년 후 하인리히 뵐은 이렇게 말했다.

 

<차이퉁>은 그들 자신들의 범죄 행위만 좋아하고, 맘에 들지 않거나 분명하지 않은 사실은 모조리 조작한다. 

심지어 조작되지 않은 사실조차 그 신문에서는 거짓말로 보이게 되어 완전히 거짓으로 흡수된다. 

 간단히 말해, 그 신문은 진실을 '진실에 맞게' 재연해도 진실을 더럽힌다.(P148)

~신문들이 정말 금수 같은 그들의 '무지함'으로 무엇을 야기할 수 있는지 한 번쯤 연구해 보는 것은 범죄학의 과제일 것이다.(P151)

~추신.  그 사이 <빌트>지는 거의 정부 기관지나 다름없어졌다. 

중요한 정치 현안에 대한 정부의 공지 사항들이 일요일이나 월요일에 발행되는 <빌트>의 자매지 중 하나에 발표된다.(P153)

이작품이 독일에서 발표된 것은 1974년이지만 그 당시 독일의 보수언론과 보수세력의 행동들이 어쩌면 이렇게도 지금 우리의 보수언론의 행태들과 닮아있는 것인지 참으로 가슴이 아프다.  현정권의 치부를 꼬집으면 무조건 빨갱이의 주구라고 공격하는 것 또한 보수언론이 우리에게 씨뿌려놓은 무서운 고정관념의 결과가 아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