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노트/<토마스 만>

토마스 만의 단편들.

묭롶 2010. 1. 21. 15:05

 

한 사람의 작가를 알고 싶다면 그 작가의 단편들을 읽으라는 글을 읽었던 적이 있다.

장편이 한 작가의 과거로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총체적인 작품세계의 결정체인 반면, 단편은 작가가 살아냈던 과거의 어느 지점, 즉 작가에게 현재였던 시간의 들숨과 날숨의 호흡이 실려있다.  사람이 하루를 살면서도 컨디션과 상황에 따라 호흡이 가빠지고, 빨라지며 또 느려지는 것과 같이 작가의 다채로운 작품세계의 변화가 단편에는 아로 새겨져 있다.  그래서 한 작가를

연구하는 데 있어, 장편을 통한 연구보다는 단편의 분석을 통해 작품세계의 연대기를 기록하는

방식이 유용하게 사용되어진다. 

 

  토마스 만의 초기 단편인 '토니오 크뢰거'는 이후 그의 작품들에서 보여지는 여러 전형들을 찾아볼 수 있는 소중한 작품이다.  그 자신은 자신을 너무 많이 드러낸 작품이라 싫어했다던 이 작품에서 그의 창작의 모태가 되는 원형을 발견하게 된다.  그의 작품세계는 바로 매혹당한자가 겪는 심리 상태인 양가감정에서 출발한다. 

그의 문학을 향한 열정은 사랑에 빠진 자의 자기연민과 혐오를 닮아있다.  자신의 사랑이 가치없음을 자각하면서도 그 사랑을 포기할 수 없는 사람의 매혹당한 심리(슈피넬 씨(트리스탄), 프리데만씨(키 작은 프리데만 씨)) 가 그의 작품의 씨앗이 되었다. 

 

 ~산다는 것, 내가 살아온 삶이 불러일으키는 구토.  모든 것들, 전체가 쏟아내는 구토가 내목을 조르고,

~길든 짧든 구토는 언젠가 한번은 내게 우습고 수치스러운 모든 일들을 정리하고

거기서 벗어나 도약하는 데 필요한 힘을 줄 것이다.  <어릿광대> P303

 

뤼백의 보수적이고 부유한 상인가문에서 태어났음에도 모계쪽에서 이어받은 보헤미안의 기질을 타고난 어린시절부터 자신이 보통시민으로는 살아갈 수 없는 이방인으로서의 운명임을 예감했고, 그 운명은 그를 그만의 언어세계(문학)로 이끌었다. 

시민 속에서 비시민으로 살아가는 자신의 삶을 그는 작품<토니오 크뢰거>에서 자신이 사랑했던 대상 앞에 다가서지 못하고 어둠 속에서 그들을 응시하는 형태로 표현하고 있다. 

 

~그러나 비록 그가 닫혀진 덧창 앞에 외로이,

국외자의 신세가 되어 희망도 없이 서서는 상심한 나머지 마치 창 밖을 내다볼 수 있는 척하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행복했다.  왜냐하면 그때 그의 심장이 살아 있었기 때문이다. <토니오 크뢰거> P32

 

  그는 어둠속에서 자신과 다른 일상인들의 삶의 관조를 통해 일반인들은 견지하지 못하는 결과물들을 만들어내는(그만의 언어=문학) 원천으로 삼았다.   이는 자신과 다른 삶을 사는 생활인들의 삶에 대한 관심과 애정이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문학이란 것은 소명이 아니라, 당신에게 분명히 말해 두고 싶습니다만, 일종의 저주입니다.  <토니오 크뢰거>P47

~만약 한 문사(文士)를 진정한 시인으로 만들 수 있는 그 무엇이 존재한다면, 그것은 인간적인 것,

생동하는 것, 일상적인 것에 대한 나의 이러한 시민적 사랑일 것이기 때문입니다. <토니오 크뢰거> P107

 

   '베니스에서의 죽음'은 이런 그의 작품세계의 특징을 한 송이의 매혹적인 문체로 꽃 피워낸 결정체이다.

이 단편에서 '작가'의 '소년'을 향한 감정은 문학을 향한 토마스 만의 이끌림과도 같은 것이어서, 이성으로 제어할 수 없는 주체할 수 없이 범람하는 아름다운 감정이 문체라는 형식을 빌어 어떻게 발화되는지를 발견하게 된다. 

~그의 평소 주장에 의하면, 모든 위대한 재능에는 품위를 향한 자연스러운 갈망과 욕구가

천부적으로 내재되어 있다는 것이었다.  말하자면, 그의 모든 작가적 발전은 회의와 반어라는

온갖 장애물을 뛰어넘어 품위를 향해 의식적으로, 그리고 반항적으로 기어오르는

상승의 도정이라고 할 수 있었다.  <베니스에서의 죽음>P431

~개인적으로 볼 때에도 예술은 정말이지 일종의 고양된 삶이다. 

예술은 더 깊은 행복을 주었다가 더 빨리 소모시킨다. 

~그래서 예술은, 외적 생활이 비록 수도원에서와 같이 조용히 영위된다 하더라도,

결국에 가서는, 몹시 무절제하게 격정과 향락에 푹 빠진 삶도 도저히 불러일으키지 못할

그러한 신경과민, 악습, 피로와 호기심을 낳게 되는 것이다. <베니스에서의 죽음> P435

 

  <베니스에서의 죽음>에서 작가가 자신이 체험한 시민사회를 문체로 표현하는 일의 어려움을 표현했던

윗 글에서 작중에서 작가가 끊임없이 두려워했던 것의 정체를 확인하게 된다.  가파른 감정의 과잉(문체로의 발화)이후에 오는 자기자신(현실)과 문체(자신만의 언어)사이의 괴리감을 이성적으로 제어한다는 것의 어려움이

바로 그것이다.  <베니스에서의 죽음>은 평생을 작품을 통해서 자신만의 언어로 이야기해야만 하는 비시민의 삶을 살았던 토마스 만 바로 그 자신의 이야기이다.  또한 죽는 그 순간까지도 사랑하는 소년에게서 시선을 돌리지 못하고 죽음에 의해서야 고개를 떨구게 된 작가의 이야기는 결국 이 세상에서 각자 다른 방향(각각의 언어와 소통방식)을 추구하지만 마지막까지도 현실과 자신의 괴리감을 온전히 극복할 수 없는 우리들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쉽게 읽히지도 빨리 읽지도 못했던 책이지만, 노작가의 죽음(매혹의 대상을 위해 자신을 불사른)이 주는 여운은 쉽게 잊혀질 것 같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