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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명속의 불만>

묭롶 2009. 7. 9. 08:30

  프로이트는「나의 이력서」(1925)의 1935년 개정판에 덧붙인 글에서 지난 10년 동안 그의 저술 활동에 일어난 <의미 있는 변화>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여기에서 <의미 있는 변화>란 그의 관심이 자연과학과 의학 및 정신분석 치료를 거치면서 멀리 우회한 뒤, 오래전에 사로잡혔던 문명의 문제로 되돌아왔음을 의미한다.  『문명 속의 불만』은 오랫동안 프로이트가 주목해 온 본능적 요구와 문명적 제약의 대립 관계에 대한 고찰의 결과물이다.      초창기에 프로이트는 처음에는 인간의 신경증의 원인을 찾기 위해 여러 가지 방법론(정신분석 및 꿈 해석)을 적용하여 병인의 다양한 원인을 분석했고, 그 과정에서 신경증의 근저에 근본적인 공통점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신경증의 공통된 병인은 바로 ‘억압된(좌절된) 욕망’이었다.  프로이트는 이를 통해 또 한 가지 인간에게는 본원적 욕망이 존재하며, 이는 초자아와 자아에 의해 억압되어 있지만 사라지지 않고 무의식 속에 자리 잡아 다양한 반작용으로 표출된다는 점을 밝혀냈다.  결국 ‘히스테리’나 ‘신경증’은 초자아에 억제당한 무의식의 ‘음화’인 것이다.  

  인간의 본원적 욕망을 두 가지로 나누면 크게 성욕과 식욕으로 나눌 수 있다.  문명이 시작된 이래,  문명은 다른 분야에 비해 유난히도 성욕을 제한하고 금기시했다.  문명의 유지를 위해 승화된 성적 에너지(에로스)가 끊임없이 필요했기 때문에, 개인의 무한한 성욕은 반문명적(원시)인 행동으로 금기시 되어야만 했다.  이는 문명이 보다 고차원화 될수록 그 억압의 정도가 더 심해졌는데, 프로이트는 현대인에게서 신경병이 증가하는 원인이 바로 <문명적 성도덕>으로 인한 ‘좌절된 욕망’에 있다고 보았다.  하지만 시대가 변화하고 사람들의 교육수준이 높아질수록 문명이 강요하는 <성도덕>은 설득력을 잃어가고 있다.  문명은 이를 방어하기 위해 오랜 세월 종교에 의지해왔다.  종교는 사랑의 대상을 신(자아이상)으로 대체함으로써 이성에 대한 성욕에 대리만족을 제공하고, 그 과정에서 개인을 자아이상을 공유한 동질감을 가진 집단으로 결집시키며, 원초적 충동의 억제력으로 작용해 왔다.  하지만 문명의 체제유지에 봉사하는 종교의 본질을 프로이트는 ‘좌절된 욕망’을 가진 사람들의 동질감이 만들어낸 환상이라고 말한다.  그는 환상이나 최면에 의해 무의식을 억제하는 방법들을 부정적으로 인식하며 과학과 실질적 이성의 힘을 통해 자신의 욕망을 인간 스스로가 다스리거나 승화의 방법을 찾아야 한다고 믿는다.  문명이 지금껏 전통적 관습이나 민족 특유의 관성의 대물림으로써 아이들에게 그 조상들의 오래된 ‘욕망좌절’(죄의식)을 학습시키는 한 세대를 거듭할수록 인류의 ‘원망’은 커져만 갈 것이고, 이는 부정적인 반작용(전쟁)으로 폭발될 것이라고 예견하는 것이다. 

  그의 예견대로 현대문명이 보이고 있는 다양한 사회적․문화적 병리현상은 갈수록 심화되고 개별화되는 양상을 보인다.  이는 문명이 더 이상 개인에게 ‘죄의식’이라는 초자아로 군림할 수 없음을 증거 한다.  단적인 예로 죄책감을 느끼지 못하는 ‘사이코패스’가 있고, 개인은 에로스와 타나토스의 욕망을 실현시킬 자아이상을 문명 내에서 찾는 데 어려움을 느끼기 때문이다.  과거 종교와 예술, 전쟁을 통해 인간의 본원적인 욕망의 자아이상을 대리만족 시켰던 문명이 더 이상 인간에게 그 안에서 자아이상을 제시하지 못하게 된 점이 <현대 문명>이 갖는 가장 큰 문제점이다.  또한 사회․문화․제도 전반에서도 개인의 반작용기제를 수용하거나 승화시킬 수 있는 방법론을 갖지 못한 점 또한 문제를 더욱 심화시키는 요인이다.  개인의 ‘좌절된 욕망’을 개인의 문제로 방기함으로써 사회 더 나아가 <문명>전체가 큰 위험에 봉착하게 된 것이다.  프로이트가 제시한 방법론을 따른다면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개인 스스로가 자신의 ‘욕망’을 올바르게 실현할 기제(자아이상)를 문명 내에서 찾을 수 있도록 각자에게 맞는 교육제도가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과거의 일방적인 주입식 교육은 인류의 오래된 ‘원망’을 후대에게 물려줄 뿐이므로, 새로운 대안을 모색하는 것이 바로 <현대 문명>이 당면한 과제가 될 것이다. 


<문명적> 성도덕과 현대인의 신경병(1908)

  이 논문은 프로이트가 <문명적> 성도덕으로 인해 억압받은 문명과 본능적 삶의 대립 관계를 본격적으로 논한 최초의 저작으로, 그는 현대인의 신경병의 원인을 문명이 강요하는 개인의 욕구좌절에 있다는 점에 주목한다.

  폰 에렌펠스는 『성윤리』라는 책에서 성도덕을 <자연적> 성도덕과 <문명적> 성도덕으로 나누었다.  그는 오늘날 서구 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성도덕이 숱한 역효과를 낳는다고 보고, 문명적 성도덕의 필요성을 인정하지만 이를 개선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한다.  폰 에렌펠스 외에도 에르프W.Erb는 모든 계층에서 늘어난 개개인의 욕망과 요구가 신경병의 원인이라고 지적했으며, 빈스방거는 현대의 비약적인 과학기술의 진보에서 신경 쇠약의 원인을 찾는다.  폰 크라프트-에빙은 신경병의 원인을 문명인들의 생활양식 속의 비위생적 요소에서 찾고 있다. 

  프로이트는 현대사회에 급속히 증대되고 있는 신경병의 근본원인이 문명적 성도덕에 있다고 보고 이를 주목한다.  신경병의 명확한 형태만을 고찰하면, <문명적> 성도덕이 주로 개인의 성생활을 부당하게 억압하는 형태로 변형된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임상적 관찰에 의하면, 신경성 질병은 본래적<신경증>과 <정신 신경증>으로 나눌 수 있다.  본래적 신경증에서는 신체 기능과 정신 기능에 모두 <중독성>을 가진 장애가 일어난다.  흔히 <신경 쇠약>으로 분류되는 이런 신경증은 유전적 요인이 없더라도 성생활이 저해 받으면 유발될 수 있다.  정신신경증의 경우에는 유전적 영향이 더 두드러지고, 그 원인을 알아내기가 더 어렵다.  그러나 정신분석이라는 독특한 연구방법을 통해서, 우리는 정신 신경증의 경우 성생활을 저해하고 성행동을 억압하거나 그 목적을 왜곡하는 모든 요소를 발병의 원인으로 볼 수 있다. 

  인간의 끊임없는 성 본능은 문명 활동에 엄청난 에너지를 공급한다.  인간의 성 본능은 그 대상을 다른 것으로 바꿀 수 있고, 이처럼 대상이 바뀌어도 그 강도는 사실상 거의 줄어들지 않는 특징을 갖고 있다.  이처럼 최초의 성적 대상을 다른 것으로 바꿀 수 있는 이런 능력을 <승화>능력이라고 부르는데, 성 본능이 문명에 대해 갖는 중요성은 바로 이 승화능력에 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성 본능이 유난히 집요한 고착 현상을 보일 수도 있다.  최초의 성적 대상에 병적으로 집착하는 것은 성 본능을 문명 발전에 전혀 이바지하지 못하는 쓸모없는 것으로 만들 뿐 아니라, 때로는 변태라고 불리는 것으로 타락시키기도 한다.  승화 작용은 기계 장치에서 열을 기계적 에너지로 무한히 바꿀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무한히 연장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어느 정도의 직접적인 성적 만족은 대부분의 유기체에게는 필요한 것이기에 최소한의 성적 만족은 개인차가 있지만, 이것마저 좌절되면 기능 장애와 주관적인 불쾌감 때문에 병적이라고 할 수밖에 없는 현상(우울증, 히스테리, 신경병 등)이 일어나게 된다. 

  인간의 성 본능은 생식에 이바지하는 것이 아니라 특정한 종류의 쾌감을 얻는 것을 목표로 한다는 점에서 고찰하면 성 본능은 자기애 단계에서 대상애 단계로, 성감대가 자주성을 갖는 단계에서 성기에 종속되는 단계로 발전한다.  성 본능의 이런 발달을 염두에 두면, 문명의 세 단계를 구별할 수 있다.  첫 번째 단계에서는 생식이라는 목적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성 본능을 마음껏 발휘할 수 있다.  두 번째 단계에서는 생식이라는 목적에 이바지하는 성 본능을 빼고는 모든 성 본능이 억제된다.  세 번째 단계에서는 <합법적인> 생식만이 성행위의 목적으로 용인된다.  이 세 번째 단계는 오늘날의 <문명적> 성도덕에 반영되어 있다.  두 번째 단계를 표준으로 삼으면, 성 본능은 자기애 단계를 벗어나 성기 결합을 목표로 삼는 대상에 단계로 발전하지만, 이런 발전이 모든 부류의 사람들에게 정확하고 충분하게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  이런 발달 장애로 말미암아 정상적인 성욕에서 벗어나는 두 가지의 해로운 일탈이 생긴다.  우선 다양한 <성도착자>와 <동성애자>가 있다.  성 본능이 대체로 약한 성도착자의 경우에는 자신이 놓여 있는 문명 단계의 도덕적 요구와 충돌하는 성향을 완전히 억제할 수 있다.  하지만 그들은 성 본능을 억제하기 위해 있는 힘을 다 써버린 탓에 문화 활동에 투입할 수 있는 여력이 없는, 내적으로는 금지되어 있고 외적으로는 무기력한 상태가 된다.  성 본능이 상당히 강하고 도착적인 경우에는 두 가지 결과를 생각할 수 있다.  첫째, 성도착자로 남기를 택한 사람은 문명의 기준에서 벗어난 자신의 일탈 행위가 초래하는 결과를 참고 견뎌야 한다.  두 번째 결과는 훨씬 흥미롭다.  여기에 속하는 사람은 교육의 영향과 사회의 요구에 따라 도착적인 본능을 억제하는 데 성공하지만, 실제로는 진정한 억제가 아니라 실패한 억제라고 부를 수 있다.  그들의 금지된 성 본능은 다른 식으로 표출되기 때문이다.  성 본능을 억제한 결과 나타나는 대리만족 현상은 신경병을 일으킨다.  신경증은 성도착의 <음화>와도 같은 것이어서, 신경증의 경우에는 억제된 도착적 충동이 무의식의 부분에서 표출된다.  다시 말하면 신경증은 사진의 양화처럼 겉으로 드러난 성도착과 똑같은 성향을 갖고 있지만 그것이 <억압된> 상태에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타고난 소질이 허용하는 것보다 더 고결한 마음을 갖고 싶어 하는 사람은 모두 신경증 환자가 된다. 

  한 인간의 성생활은 삶에 대한 전반적인 <반응 양식을 규정>하는 경우가 많다. 금욕에 성공했다고 자랑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유아기의 자기애적 성행동과 연결되어 있는 성적 만족이나 자위행위의 도움으로 금욕할 수 있었을 뿐이다.  성생활이 유아기의 형태로 퇴화하면 다양한 종류의 신경증과 정신병에 걸리기 쉽다.  그 중 자위행위는 <탐닉>을 통해 여러 가지로 도덕적 품성을 타락시킨다.  또한 도착적인 성행위는 두 사람 사이의 애정 관계를 진지한 문제에서 편리한 유희로 타락시키기 때문에, 윤리적으로 온당치 않다.  정상적인 성생활의 어려움이 낳은 또 다른 결과는 동성애의 확산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런 상황이 초래하는 신경병은 당사자만이 아닌 자녀에게까지 영향을 미친다. 

  신경병은 증세의 경중을 떠나 그 대상이 누구든지 간에, 언제나 문명의 목적을 좌절시키고, 그리하여 사실상 억제된 정신력과 마찬가지로 문화에 대해 적대 행위를 한다.  문명사회는 선한 행동을 요구하지만, 이런 행동의 본능적 바탕에 대해서는 전혀 개의치 않는다.  그리하여 수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본성에 따라서가 아니라 이기적인 목적을 위해서 문명사회에 복종했다.  이런 성과에 고무된 나머지 사회는 도덕 기준을 최대한 엄하게 하는 실수를 저질렀고, 그 결과 그들은 본능을 끊임없이 억제해야 하고, 이로 말미암은 긴장은 반동과 보상이라는 주목할 만한 현상으로 나타나고 있다.  본능을 가장 억제하기가 가장 어려운 성(性)의 영역에서, 그 결과는 신경병이라는 반동 형성으로 나타난다. 


  

<전쟁과 죽음에 대한 고찰>(1915)은 전투원들이 느끼는 정신적 고통의 원인이 되는 요인 가운데 전쟁이 불러일으킨 환멸과 이번 전쟁이 우리에게 강요하는 죽음에 대한 태도변화에 주안점을 두어 살펴보고 있다.

  이번 전쟁에서는 두 가지가 우리에게 환멸을 불러일으켰다.  대내적으로는 도덕규범의 수호자인 척하는 국가가 대외적으로는 저급한 도덕성을 보여 준 것이 그 하나고, 또 다른 하나는 개인들이 최고 수준에 이른 인간 문명의 참여자로서 도저히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잔인성을 행동으로 보여 준 사실이다.  두 번째 점에서 정신분석학적 연구는 인간성의 가장 깊은 본질은 원초적 성격을 가진 본능적 충동(파괴와 공격본능)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우리는 충동이 인간 공동체의 욕구 및 요구와 어떤 관계를 갖고 있느냐에 따라, 충동과 그 발현을 선과 악으로 분류한다.  이 원초적 충동들은 성년기에 활발한 활동을 시작하기 전에 오랜 발달과정을 거친다.  이런 <본능의 변천>이 모두 끝난 뒤에야 비로소 우리가 성격이라고 부르는 것이 형성되는데, 사람의 성격을 <선한> 성격과 <악한> 성격으로 분류하는 것은 지극히 부적당하다.  <악한> 본능을 변화시키는 것은 같은 방향으로 작용하는 내적요인과 외적요인이다.  내적 요인은 에로티시즘이 악한 본능에 행사하는 영향력이다.  <에로틱한> 요소가 혼입되면, 이기적 본능은 <사회적>본능으로 바뀐다.  외적 요인은 가정교육이 행사하는 강박이다.  문명은 본능 만족을 포기함으로써 얻어진 것이고, 문명 세계에 새로 들어오는 모든 사람에게도 그것을 포기하도록 요구한다.  개인이 평생을 살아가는 동안, 외적 강박은 끊임없이 내적 강박으로 대치된다.  문명의 영향은 이기적 경향에 에로틱한 요소를 첨가하여 그것을 이타적이고 사회적인 경향으로 바꾸고, 그런 변화는 계속 늘어난다.  문화에 대한 감수성은 본능의 변화에 바탕을 두고 있지만, 이 변화는 세상을 살아가면서 받는 여러 가지 충격 때문에 영구적으로나 일시적으로 취소될 수도 있다.  전쟁의 영향은 분명 그런 퇴화를 가져올 수 있는 힘이다.  전쟁이 우리에게 그토록 많은 고통을 안겨준 또 다른 증세는, 바로 최고의 지성들이 보여 준 통찰력의 결여, 냉혹함, 논란의 여지가 있는 불확실한 주장을 무비판적을 믿어버리는 증세다.  옛날부터 인간의 본성을 연구하는 학자와 철학자들의 가르침에 따르면, 우리의 지성은 강한 감정적 충동의 영향에서 벗어났을 때에만 비로소 믿을 만하게 기능을 발휘할 수 있다.  필요한 통찰이 감정적 저항에 부딪치면 가장 날카로운 통찰력을 가진 현명한 사람이 갑자기 천치처럼 멍청하게 행동하지만, 그 저항을 극복하면 지적 능력을 완전히 되찾는 사례는 거의 날마다 볼 수 있다. 

  죽음에 대한 우리의 태도는 결코 솔직하지 않다.  우리는 마치 죽음이 피할 수도 있는 일인 것처럼 행동하고 있다.  죽음이 일어나면, 우리는 기대를 배신당하기라도 한 것처럼 심한 충격을 받으며, 죽음의 우발적 원인을 강조하려는 버릇이 있다.  우리가 죽음을 인정하는 것은 허구의 세계에서만 일어날 수 있다.  이렇듯 죽음을 따로 떼어 놓고 삶을 생각하는 경향은 많은 것을 단념시키고 배제하는 결과를 낳는다.  전쟁은 죽음에 대한 이런 관습적인 태도를 일소해 버린다.  죽음은 더 이상 부인되지 않는다.  전쟁을 통해 수많은 죽음이 축적되면, 죽음이 우연이라는 느낌은 사라진다.  그 결과 삶은 다시 흥미로워진다. 

  원시인은 죽음에 대해 모순적인 태도를 취했다.  그들은 한편으로는 죽음을 삶의 종말로 인정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죽음을 부인하고 아무것도 아닌 하찮은 것으로 격하시켰다.  이 모순은 원시인이 타인의 죽음과 자신의 죽음에 대해 근본적으로 다른 태도를 취한 사실에서 생겨났다.  타인의 죽음은 싫어하는 자의 소멸을 의미했기 때문에, 원시인은 거리낌 없이 타인을 죽였다.  죽음에 대한 원시인의 상반된 태도에서 오는 갈등은 광범위한 결과를 낳게 되는데, 그것은 바로 원시인이 자기한테 속해 있는 사람의 죽음을 목격하는 경우였다.  인간은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에 대한 고통 속에서 죽음을 맛보았기 때문에, 이제 더 이상 죽음을 멀찌감치 떼어 놓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래도 자기 자신의 죽음을 상상할 수는 없었기 때문에, 그는 타협안을 생각해 낸다.  자신도 죽을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되, 소멸의 의미를 죽음에서 배제한 것이다. 

  우리가 <무의식>이라고 부르는 것은 부정적인 것을 전혀 모르고, 어떤 부정(不定)도 모른다.  무의식 속에서는 서로 모순되는 일이 동시에 일어난다.  이런 이유 때문에 무의식은 자신의 죽음을 모른다.  무의식이 살인을 실행하지는 않는다.  단지 살인을 생각하고 원할 뿐이다.  하지만 이 정신적 현실을 실제적 현실과 비교하여 과소평가하는 것은 잘못이다. 따라서 무의식적 소망 충동으로 우리를 판단한다면, 우리도 원시인과 같은 살인자 집단이다.  극소수의 상황을 빼고는 가장 다정하고 친밀한 애정 관계에도 약간의 적개심은 따라다니며, 이 적개심은 상대가 죽기를 바라는 무의식적 소망을 자극할 수 있다.  <양가 감정>에 따른 이런 갈등은 과거에는 영혼에 대한 교리와 윤리학을 만들어 냈지만, 이제는 신경증을 낳는다.  전쟁이 우리가 가진 이 이중구조와 어떻게 충돌하는지는 쉽게 알 수 있다.  전쟁은 우리가 나중에 얻어 입은 문명의 옷을 발가벗기고, 우리 모두의 마음속에 숨어 있는 원시인을 노출시킨다.  전쟁은 우리에게 또 다시 자신의 죽음을 믿지 못하는 영웅이 될 것을 강요한다.  전쟁은 사라질 수 없다.  민족들의 생활 여건이 그토록 다르고, 서로에 대해 그토록 격렬한 반감을 품고 있는 한, 전쟁은 존재할 수밖에 없다.


  <집단 심리학과 자아 분석>은 개인 심리에 일어나는 변화를 토대로 하여 집단 심리를 설명하고 있으며, 또 한편으로는 정신의 해부학적 구조에 대한 프로이트 자신의 연구를 한 단계 진전시키고 있다는 점에 의의가 있는 논문이다.

  집단 심리학은 다양한 집단의 구성원으로서의 개인, 또는 일정한 시간에 일정한 목적을 위해 집단으로 조직된 군중의 일원으로서의 개인에게 관심을 갖는다.  집단을 구성하는 개인을 관찰하기 위해서는, 먼저 개인이 집단을 구성하게 된 최초의 원인이 무엇인가를 살펴봐야 할 것이다.  원시적 집단의 아버지는 아들들이 직접적으로 성 충동을 만족시키는 것을 금지했다.  그는 아들들에게 금욕을 강요했고, 그 결과 아들들은 목적이 금지된 성 충동에서 생겨날 수 있는 감정적 결합(동일시를 통한 감정적 유대)을 형제들과 갖게 되었다.  원시적 군집 내에서 아버지가 성적 만족을 경계하고 용납하지 않은 것이 결국 집단 심리의 원인이 되었다.  이후 각 개인은 저마다 수많은 집단의 구성 요소가 되었고, 동일시의 결합을 통해 유대감을 공유하며, 다양한 모델을 본떠서 자아 이상을 만들어 내었다.

   일시적인 집단에서는 개인의 후천적 능력이 비록 잠정적이나마 완전히 사라지는 경이를 만날 수 있다.  이 집단에서 볼 수 있는 경이는 자아 이상을 포기하고, 그것을 지도자 안에서 구현된 집단 이상으로 대치한 것을 의미한다.  집단에서 지도자의 선택은 쉽게 이뤄진다.  대개의 경우 지도자는 관계된 개인들의 전형적 특징을 유난히 뚜렷하고 순수한 형태로 지니고 있으면 충분하고, 남들보다 더 위대한 힘과 더 자유로운 리비도를 가지고 있다는 인상만 주면 된다.  그렇게 되면 집단의 다른 구성원들은 <암시>, 즉 동일시를 통해 집단의 나머지 구성원들과 함께 휩쓸리게 된다.  집단 속에서 개인이 경험하는 이 정신적 변화의 요인을, 르 봉은 개인의 상호 암시와 지도자의 위신 탓으로 돌리고 있다. 

  집단을 지도자의 유무로 분류할 때, 가장 흥미로운 사례는 교회와 군대에서 찾아볼 수 있다.  교회와 군대라는 인위적인 집단에서 개인은 한편으로는 지도자와 다른 한편으로는 집단의 다른 구성원들과 리비도적 결합으로 묶여 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집단의 본질이 집단 속에 존재하는 리비도적 결합에 있다는 것을 시사하는 사례는 군대 집단에서 가장 잘 연구된 <공황>현상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공황>현상과 마찬가지로, 공통된 위험이 증대되거나 집단을 결속시키는 감정적 유대가 소멸되면 공황이 일어난다.  그리고 감정적 유대가 사라지는 것은 신경증적 불안의 증세와 비슷하다. 

  정신분석학이 증명한 바에 따르면 두 사람 사이에 한동안 지속되는 친밀한 감정적 관계는 거의 다 혐오감과 적대감의 앙금을 내포하고 있지만, 억압되어 있어서 인식하지 못할 뿐이다.  우리는 그 반감과 혐오감의 이면에 자기애가 드러나 있는 것을 알아볼 수 있다.  그러나 집단이 형성되면, 이런 과민증은 집단 내부에서 일시적으로 또는 영구적으로 사라진다.

이런 나르시시즘의 제한은 오직 타인들과의 리비도적 결합에 의해서만 생겨날 수 있다.  자신에 대한 사랑을 가로막는 장애물은 타인에 대한 사랑, 즉 대상애뿐이다.  개인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인류 전체의 발전에서도 오직 사랑만이 이기주의에서 이타주의로의 변화를 가져온다는 의미에서 인류를 문명화하는 요인으로 작용한다.  그러므로 집단 안에서 작용하는 자기애적 사랑이 집단 밖에서는 작용하지 않는 제한을 받는다면, 그것은 집단 형성의 본질이 집단 구성원들 사이에 존재하는 새로운 유형의 리비도적 결합에 있다는 증거다. 

  이상을 통해 살펴본 심리학적 집단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다음과 같다.  심리학적 집단을 구성하고 있는 개인들은 집단 심리를 갖게 되어, 그들은 각자 고립된 상태에서 느끼고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느끼고 생각하고 행동하게 된다.  또한 개인들이 집단 속에 들어가게 되면 집단 내에서 저항할 수 없을 만큼 강력한 감정을 얻고, 혼자 따로 있었다면 억제 했을 게 분명한 본능에 몸을 내맡긴다고 말한다.  집단 내의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갖는 강력한 감정은 전염이라고 볼 수 있으며, 이러한 전염은 피암시성으로 인해 발생하는데 심리학적 집단을 이루는 개인은 더 이상 자신의 행동을 의식하지 못한 상태에서, 강력한 암시를 받게 되면 저항할 수 없는 충동에 사로잡혀 어떤 행동을 수행하게 될 것이다.  이 충동은 최면에 걸린 사람의 경우보다 집단의 경우에 더 격렬하다.  집단을 이루는 모든 개인에게 똑같은 암시가 주어지면, 상승 작용이 일어나 암시의 강도가 더욱 높아지기 때문이다.  암시의 영향을 받으면 집단도 욕망을 자제하고 이기심을 버리고 이상에 헌신할 수 있다.  집단의 윤리적 행동은 개인의 윤리보다 훨씬 낮게 떨어질 수도 있는 반면 개인의 윤리보다 더 높이 올라갈 수도 있다.  집단은 충동적이고 변덕스럽고 성급하며, 거의 전적으로 무의식의 지배를 받는다.  집단은 무엇이든 쉽게 믿으며, 영향도 쉽게 받는다.  비판력은 전혀 없고, 아무리 있을 법하지 않은 일도 사실로 믿어 버린다.  집단은 이미지로 생각한다.  이미지와 현실이 일치하는가를 이성의 작용으로 검증하는 경우는 결코 없다.  따라서 집단은 의심할 줄도 망설일 줄도 모른다.  집단은 곧장 극단으로 치닫는다.  의심이 표현된다 해도 그것은 당장 명백한 확신으로 바뀌고, 약간의 반감도 격렬한 증오로 바뀐다.  집단은 편협하며 권위에 순종적이다.  집단은 기본적으로 철저히 보수적이어서, 모든 혁신과 진보에 대해서는 깊은 반감을 품고 전통에 대해서는 무한한 경외심을 품는다.  집단은 말(語)이 갖는 마술적 힘에 굴복한다.  끝으로, 집단은 결코 진실에 목마른 적이 없다.  집단은 환상을 요구하고, 환상 없이는 견디지 못한다.  꿈이나 최면술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집단의 정신 활동에서는 사물의 진실성을 검증하는 기능이 뒷전으로 물러나고, 그 대신 감정적 리비도 집중을 받은 욕망적 충동이 강하게 대두한다.  르 봉은 지도자만이 아니라 지도자가 광신하고 있는 사상에 대해서도 불가사의하고 저항할 수 없는 힘을 부여하고, 그것을 <위신>이라고 부른다.  위신은 개인이나 작품이나 이념이 우리에게 발휘하는 일종의 지배력이다.  맥두걸은 <조직화하지 않은> 단순한 집단의 심리적 태도에 대해 제멋대로 날뛰는 개구쟁이 어린애나 정식 교육을 받지 않는 격정적 야만인이 낯선 상황과 비슷하다고 말한다.  이런 퇴행은 특히 평범한 집단의 본질적 특징이고, 조직화한 인위적 집단에서는 퇴행을 상당히 억제할 수 있다.  집단이 의존하고 있는 모든 결합은 목적 달성이 금지된 본능의 성격을 띠고 있다.  이는 직접적인 성 본능이 집단 형성에는 바람직하지 못하다는 사실도 알려준다.  직접적인 성 본능을 충족시키기 위해서 단 둘만 있기를 바라기 때문에 군거 본능, 즉 집단 감정에 위배될 수밖에 없다.  또한 신경증도 사랑에 빠짐과 똑같이 집단을 붕괴시키는 효과를 갖는다.  하지만 집단 형성에 강력한 자극이 주어지면 신경증은 줄어들고, 일시적으로는 신경증이 사라지는 것처럼 보인다. 


<환상의 미래>는 1927에 쓰여 졌으며, 이 논문에서는 종교적 힘을 역사적인 진리에 비추어 고찰하고 있다. 

  문명의 첫 번째 사명은 인류를 자연으로 보호하는 것이다.  그 첫 단계는 자연을 인간화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인간은 단순히 자연력을 자신과 대등한 존재처럼 만드는 대신, 자연력에 아버지의 성격을 부여한다.  인간은 유아기의 원형만이 아니라 계통발생적인 원형에 따라 자연력을 신으로 형상화한다.  여기에서 신들은 세 가지 임무를 계속 수행하고 있다. 첫째는 자연의 공포를 제거하는 것이고, 둘째는 인간으로 하여금 특히 죽음에서 나타나는 <운명의 여신>의 잔인함을 감수하게 하는 것이고, 셋째는 문명생활이 강요하는 고통과 박탈을 보상해 주는 것이다.  이 세 가지 기능 가운데 강조되는 부분은 때에 따라 조금씩 이동한다.  자연이 더 자동적이 되고 신들이 자연에서 후퇴할수록, 인류는 더욱 진지하게 신들의 세 번째 기능에 모든 기대를 걸었고, 도덕은 신들의 진정한 영역이 되었다.  이제는 문명의 결함과 폐해를 없애고, 인간이 공동생활에서 서로에게 주는 고통을 치유하고, 인간이 그토록 불완전하게 복종하는 문명의 가르침이 실행되도록 감시하는 것이 신들의 임무가 되었다.

  나는 종교적 관념들도 문명의 다른 성취들과 똑같은 필요, 즉 압도적으로 우월한 자연력에서 자신을 지켜야 할 필요에서 생겨났다는 점을 입증하려고 애썼다.  그리고 여기에 두 번째 동기, 즉 인간이 고통스럽게 느끼는 문명의 결함을 수정하려는 충동이 추가되었다.  게다가 종교적 관념들은 문명이 개인에게 주는 것이라는 표현이 특히 적절한 까닭은 개인이 문명 속에서 이미 종교적 관념들의 존재를 발견하기 때문이다.  교리의 형태로 주어지는 종교적 관념들은 경험의 침전물도 아니고 사색의 최종 결과도 아니다.  그것들은 환상이며, 인류의 가장 오래되고 강력하고 절박한 원망의 실현이다.  종교적 교리가 그토록 강력한 힘을 발휘하는 비결은 원망의 강력함에 있다.  종교적 환상의 특징이 인간의 원망에서 유래한다는 점에서, 환상은 정신병적 망상과 비슷하다.  그러나 망상의 구조가 더 복잡하다는 점은 별도로 하더라도, 망상과 환상은 여러 가지로 다르다.  망상의 경우에는 현실과 모순된다는 점이 불가결한 요소로 강조되는 반면 환상은 반드시 허위일 필요는 없다.  이런 믿음을 환상으로 보느냐 아니면 일종의 망상으로 보느냐의 판단은 각자의 개인적 견해에 달려 있을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어떤 믿음을 갖게 된 주요 동기가 원망 실현일 때 그 믿음을 환상이라 부르고, 환상 자체가 입증을 중시하지 않기 때문에 환상과 현실의 관계는 고려하지 않는다.   이렇게 볼 때 모든 종교적 교리는 입증할 수 없는 환상임을 알 수 있다. 

  하지만 나는, 인류가 종교에 대한 현재의 태도를 포기하지 않고 계속 고집한다면 문명이 더 큰 위험에 직면하게 된다는 견해를 강력히 주장할 작정이다.  종교가 인류 문명에 크게 공헌한 것은 분명하다.  종교는 반사회적 본능을 길들이는 데 크게 이바지했다.  종교가 인류의 대다수를 행복하게 하고, 위로해 주고, 삶과 조화를 이루게 하고, 문명의 수단으로 만드는 데 성공했다면, 현재 상태를 바꾸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 눈앞에 전개되고 있는 현실은 어떠한가?  그렇다면 오늘날의 상황을 생각해 보자.  우리는 종교가 더 이상 과거와 같은 영향력을 사람들에게 행사하지 못한다는 고백을 들었다.  그리고 그 이유는 종교가 약속하는 것들이 줄어들었기 때문이 아니라, 사람들이 그 약속들을 과거만큼 신뢰하지 않기 때문이다.  지식의 보물창고에 접근할 수 있는 사람의 수가 많아질수록 종교적 믿음에서 멀어지는 현상은 더욱 광범위하게 일어난다.  문명은 교양인이나 정신노동자들에 대해서는 두려워할 필요가 거의 없다.  그러나 문명을 적대시할 충분한 이유를 갖고 있는, 교육 받지 못하고 억압당하는 대중의 경우에는 문제가 다르다.  따라서 이 위험한 대중을 최대한 엄하게 다스림으로써 그들이 지적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 모든 기회를 철저히 봉쇄하거나, 아니면 문명과 종교의 관계를 근본적으로 고쳐야 한다.  오랫동안 축적된 종교적 관념들 중에는 원망실현만이 아니라 중요한 역사적 사실들도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우리는 관찰했다.  과거와 현재가 함께 행사하는 이 영향력은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풍부한 힘을 종교에 부여할 게 분명하다.  따라서 역사적 사실들이 전승된 종교는 인류의 보편적인 강박 신경증일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독실한 신자들이 어떤 신경증에도 걸릴 위험이 거의 없다는 사실과 잘 부합된다.  그들은 보편적 신경증을 받아들이기 때문에, 개인적 신경증을 형성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종교적 교리에 포함되어 있는 진실은 결국 심하게 왜곡되어 있고 체계적으로 위장되어 있어서, 일반 대중은 그것이 진실임을 알아볼 수도 없기 때문이다. 

  나는 인간은 종교적 환상의 위안이 없이는 도저히 살아갈 수 없으며, 그 위안이 없이는 삶의 어려움과 현실의 잔인함도 견딜 수 없다는 주장에는 반대할 수밖에 없다.  인간은 영원히 어린애로 남아 있을 수는 없다.  결국에는 <적대적인 생활>속으로 나아가야 한다.  우리는 이것을 <현실에 대한 교육>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진보의 필요성이 지적하는 것이 이 책의 유일한 목적이라고 굳이 고백할 필요가 있을까?  과학적 지식은 노아의 홍수 시대부터 인간에게 많은 것을 가르쳤고, 앞으로도 인간의 힘을 한층 강화해 줄 것이다.  우리 유럽 문명에서 종교를 추방하고 싶으면, 그 방법은 다른 교리 체계로 종교를 대체하는 것뿐이다.  그런데 그런 교리 체계는 자신을 지키기 위해 처음부터 종교의 심리적 특성을 모두 이어받을 것이다.  교육의 필요조건을 충족시키기 위해서는 그런 특성을 가진 것이 절대 필요하다.  그리고 교육은 필수불가결한 것이다.  오랜 세월에 걸쳐 이루어진 인류의 발달이 불과 몇 년 동안의 어린 시절에 압축되어 있기 때문이다.  우리 문명을 보존하기 위해서는 개인이 문명에 걸맞게 성숙해질 때까지 개인에게 영향을 주는 것을 미룰 수 없기 때문에, 비판할 여지가 없는 절대적 원칙으로 작용할 교리 체계를 자라나는 어린애들에게 부과하는 것은 우리의 의무고, 내가 보기에 이 목적에 가장 걸 맞는 교리 체계는 적어도 지금까지는 종교 체계인 것 같다.  그러나 지성의 목소리는 낮고 부드럽지만, 주인이 들어줄 때까지 쉬지 않는다.  이것은 인류의 미래를 낙관할 수 있는 몇 가지 이유 가운데 하나지만, 그 자체도 적지 않은 중요성을 지니고 있다.  지성이 우위를 차지하는 날은 머나먼 미래일 게 분명하지만, <끝없이> 먼 미래는 아닐 것이다.  지성은 인간이 서로 사랑하고 삶의 고통이 줄어드는 것을 목표로 설정할 것이다.  우리의 과학은 결코 환상이 아니다.  그러나 과학이 우리에게 줄 수 없는 것을 다른 데서 얻을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는 것은 환상이다. 


  

 <문명 속의 불만>

  우리는 지구를 인간에게 쓸모 있게 만들고 자연력의 폭력에서 인간을 보호하는 데 도움이 되는 모든 활동과 자원을 문화적인 것으로 인정한다.  오래전에 인간은 전지전능이라는 이상적 개념을 형성했고, 그 개념을 신으로 구체화했다.  그리고 인간이 아무리 소망해도 도달할 수 없을 것처럼 보이거나 인간에게 금지되어 있는 모든 것을 이 신들의 속성으로 부여했다.  따라서 이 신들은 문화적 이상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오늘날 인간은 이 이상에 가까이 도달하여, 그 자신이 거의 신이 되었다.  미래에는 문명 분야에서 상상할 수 없을 만큼 크고 새로운 진보가 이루어질 테고, 인간은 지금보다 훨씬 신을 닮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신에 버금가는 지위에 있으면서도 그 위치에서 행복감을 느끼지 못한다. 

  인간이 자연을 완전히 지배할 수 없다는 없지만, 우리는 모든 고통을 제거할 수는 없다 해도 일부는 제거할 수 있고 또 일부는 완화할 수 있다.   하지만 사회적 원천이 우리 모두에게 보호와 이익을 제공하지 못함으로써 유발되는 고통에 대해 생각해보면, 놀라운 주장에 부딪치게 된다.  이 주장에 따르면, 우리를 비참하게 만드는 원인이 우리가 문명이라고 부르는 것에 있으며, 따라서 문명을 포기하고 원시적 상태로 돌아가면 우리는 훨씬 행복해질 것이라고 한다.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문명에 대해 이처럼 기묘한 적대적 태도를 취하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나는 당시의 문명 상태에 대한 깊고도 장기간에 걸친 불만이 이 적대적인 태도의 토대이며, 문명에 대한 비난은 어떤 특정한 역사적 사건을 계기로 하여 그 토대 위에 세워졌다고 믿는다.  문명에 적대적인 요소는 기독교 신앙이 이단 종교에 승리를 거두었을 때 이미 작용했을 게 분명하다.  두 번째 계기는 원시적 민족이나 종족과 접촉하게 되었을 때였다.  가장 최근의 계기는 문명인들이 누리는 약간의 행복마저 무너뜨리려 하는 신경증의 메커니즘에 대해 사람들이 알게 되었을 때 일어났다.  사회가 자신의 문화적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강요하는 욕망 단념을 견디지 못하는 사람은 신경증 환자가 된다는 사실이 밝혀졌고, 여기에서 사회의 요구를 폐지하거나 줄이면 다시 행복해질 가능성이 생길 것이라는 결론이 나왔다.

  문명의 특성 중 가장 두드러진 것은 문명이 고도의 정신작용을 높이 평가하고 격려하며 인간 생활에서 관념에 지도적 역할을 부여하고 있다는 점이다.  문명의 특징 가운데 마지막은 인간의 상호 관계를 규제하는 방식이다.  문명의 본질은 개인적으로는 만족을 얻을 수 있는 가능성을 전혀 제한하지 않았던 사람들이 공동체 구성원으로서는 그 가능성을 스스로 제한한다는 사실에 있다.  따라서 문명의 첫 번째 필수 조건은 정의다.  인간의 공동체에서 나타나는 자유에 대한 욕망은 사회에 존재하는 불공평에 대한 반항일 수도 있고, 따라서 문명이 더욱 발전하는 데에는 오히려 바람직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자유에 대한 욕망은 원래의 개성 가운데 아직도 문명에 길들지 않고 남아 있는 부분에서 나온 것일 수도 있고, 따라서 문명에 대한 적개심의 토대가 될 수도 있다.  그러므로 자유에 대한 욕망은 문명의 특정한 형태나 요구에 저항하거나 문명 전체에 저항한다.   문명이 본능 억제에 얼마나 의존하고 있는지, 문명이 강력한 본능을 만족시키지 않는다는 전제 조건에 얼마나 많이 의존하고 있는지는 간과할 수 없다.  이 문화적 <욕구 단념>은 인간의 사회관계의 대부분을 지배한다.  이미 알고 있듯이, 욕구를 단념하는 것이야말로 모든 문명이 맞서 싸워야 하는 적개심의 원인이다.  또한 문명은 자신의 고유한 목적에 사용하는 정신적 에너지를 대부분 성욕에서 전용해야 하기 때문에, 문명이 성욕을 대하는 태도는 다른 민족이나 계층을 착취해 온 민족이나 계층의 태도와 마찬가지이다.  억눌린 자들이 반란을 일으킬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문명은 더욱 엄격한 예방 조치를 취하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명의 본질 속에는 문명을 개혁하려는 어떤 시도에도 굴복하지 않는 장애가 존재한다고 볼 수 있다. 

  공격 본능은 사람들 사이의 모든 정애 관계와 애정 관계의 토대를 이룬다.  이 공격 본능을 인간이 단념하는 것은 쉽지 않다.  우리의 연구가 억압된 힘에서 억압하는 힘으로 나아가고 대상 본능에서 자아로 나아감에 따라,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은 나르시시즘의 개념이다.  이 나르시시즘적 리비도는 대상으로 돌려지고, 그리하여 대상 리비도가 된다.  그리고 대상 리비도는 또다시 나르시시즘적 리비도로 바뀔 수도 있다.  하지만 모든 본능이 같은 종류에 속하지는 않는다.  생물 개체를 보존하려는 본능과 그것을 점점 큰 단위로 결합시키려는 본능 이면에는 그것과는 정반대인 또 다른 본능, 즉 그 단위를 해체하여 원래의 무기물 상태로 돌려보내는 본능이 존재한다.  다시 말해서 에로스만이 아니라 죽음의 본능도 존재하는 것이다.  생명 현상은 이 두 가지 본능의 협력 또는 상호 대립 행위로 설명할 수 있다.  죽음의 본능의 일부는 외부 세계로 돌려져 공격과 파괴 본능을 나타낸다.  이렇게 되면 유기체는 자신을 파괴하는 대신 생물이든 무생물이든 다른 것을 파괴한다는 점에서, 죽음의 본능 자체를 강제로 에로스에 봉사하게 할 수 있었다.  반대로 외부에 대한 이 공격성을 제한하면 어쨌든 은밀히 진행되고 있는 자기 파괴가 더욱 촉진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파괴 본능을 만족시키는 것은 전능에 대한 자아의 오랜 원망을 충족시켜 주기 때문이다.  따라서 공격 본능이 인간에게 원초적이고 독립된 본능적 소질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문명은 에로스에 봉사하는 과정이며, 에로스의 목적은 개인을 다수로 결합시켜 결국 하나의 커다란 단위로 만드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인간이 타고난 공격 본능은 문명의 이 계획을 반대한다.  바로 이점에서 문명 발달이 갖는 의미는 분명해졌다.  문명은 인류를 무대로, 에로스와 죽음, 삶의 본능과 파괴 본능 사이의 투쟁이라는 형태를 띠고 있는 게 분명하다.  그 과정에서 문명의 구성원인 개인은 자신의 공격 본능을 무해한 것으로 만들기 위해 공격 본능을 안으로 돌려 내면화한다.  문명이 가족에서 인류 전체로 나아가는 필연적인 발달 과정이라면, 양가 감정에서 생겨나는 타고난 갈등의 결과, 즉 사랑과 죽음 사이에 벌어지는 영원한 투쟁의 결과, 죄책감의 증대는 문명과 뗄래야 뗄 수 없는 복잡한 관계로 얽혀 있을 수밖에 없다.  문명이 더욱 발달하면, 죄책감은 개인이 참을 수 없는 수준까지 도달하게 될 것이다.  신경증의 사례를 살펴본 결과, 개인적 초자아와 문명적 초자아는 공통점을 갖는다.  개인적 초자아가 엄격한 명령과 금지만 제시할 뿐 그 명령과 금지에 복종하는 것을 방해하는 저항을 충분히 고려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자아의 행복에는 거의 신경을 쓰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문명적 초자아는 명령을 내릴 뿐, 사람들이 그 명령에 복종할 수 있는지 어떤지는 문제 삼지 않는다.  이 유사점으로 인해 문화적 초자아로 인해 일부 문명이나 문명 시대가 <신경증>에 걸렸다는 진단을 내릴 수도 있지 않을까?

 

  <왜 전쟁인가?>는 1933년 3월에 아인슈타인과 프로이트 사이에 오간 편지 내용이다.

  먼저 아인슈타인은 인류를 전쟁의 위협으로부터 해방시킬 수 있는 방법이 과연 존재하는지를 프로이트에게 묻는다.  그는 전쟁의 근본적인 원인이 증오와 파괴를 열망하는 인간의 이상심리에 있다는 점에 주목하여 이러한 심리에 저항할 수 있도록 인간의 정신 발달을 통제하는 것이 가능한 일인가에 대한 자문을 구한다.  프로이트는 이 질문에 대해 인간의 본능을 심리학적으로 고찰해왔던 경험을 토대로 의견을 제시한다.

   인간의 군집이 생긴 후 물건의 분배는 상대적인 힘에 의해 이루어졌고, 이는 무기가 도입되면서부터 지적 우위가 야만적 힘을 대신하게 되었다.  이후 공동체는 다수의 약자가 단결하면 한 사람의 강자와 대등하게 겨룰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고 강자의 <폭력>에 맞선 다수의 힘을 <정의>라고 불렸다.  이렇게 단결한 집단의 구성원들 사이에 감정적 유대는 강했고, 공동체가 공유하는 이 감정이야말로 공동체가 갖고 있는 힘의 진정한 원천이 되었다.  하지만 공동체를 유지하기 위한 법률은, 공동체 구성원들이 자발적으로 자신의 자유를 양보해야 유지될 수 있는 것이었다.  다시 말해서 공동체의 정의는 그 내부에 성립되어 있는 불평등한 힘의 관계를 포현하게 된다.  그때부터 공동체 내부의 불평등한 힘에서 오는 구성원들의 억압된 분노는 전쟁을 통해 표출되는 양상을 보였다.  이 억압된 분노는 인간의 공격과 파괴에 대한 욕망이 포함된 것이어서, 이런 파괴적 충동이 에로스적 본능이나 이념적 본능과 뒤섞이면, 그 충동을 더 쉽게 만족시킬 수도 있다.  이러한 인간의 본능으로 인해 공격적 충동을 완전히 제거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공격적 충동을 전쟁으로 발산할 필요가 없도록 그 충동의 방향을 다른 데로 돌리려고 애쓰는 것이 고작이다.  우리는 본능이론 덕분에 전쟁의 <간접적인>방법에 대한 공식을 쉽게 찾을 수 있다.  인간이 전쟁에 기꺼이 호응하는 것이 파괴본능의 결과라면, 가장 두드러진 방책은 파괴본능의 적수인 에로스로 하여금 거기에 저항하도록 하는 것이다.  인간들 사이에 감정적 유대가 생겨나도록 조장하는 것은 전쟁에 불리하게 작용할 것이 분명하다.  이 감정적 유대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는데, 첫째는 비록 성적 목적은 갖고 있지 않지만 사랑의 대상에 대한 관계와 비슷한 관계인 종교에서 찾을 수 있고, 둘째는 동일화이다.  그 이외에도 전쟁을 반대하는 평화주의자가 있다.  평화주의자들은 전쟁에 대한 <체질적>인 과민증, 말하자면 극도로 증대된 병적 혐오감을 갖고 있다.  문명의 발전을 촉진하는 것(평화주의자로 교육하는 것)은 동시에 전쟁을 억지하는 작용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