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창자료/C.G.융

<인격과 전이>

묭롶 2009. 7. 9. 08:22

 프로이트는 인간의 가시화된 의식의 수면 아래 잠재되어 있는 무의식에 주목하고 이를 의식에 의해 억압된 형태로 규정했다.  그에 의하면 인간의 정신적 병리현상은 억압이라는 형태를 벗어나려는 무의식의 반작용의 양상을 띤 것이다.  그러나 C.G.융은 잠재태로서의 무의식을 억압이라는 하나의 기재만으로 설명하기에는 한계점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프로이트와는 다른 길을 걷게 된다.  프로이트가 무의식을 자아와 초자아에 의해 억압된 어쩔 수 없는 부분으로 규정을 했다면, 융은 이와 달리 무의식을 의식에 의해 얼마든지 의식화(인격)할 수 있는 자가조절 기능을 가진 잠재태로 보았다.  그는 자신의 이론을 뒷받침하기 위해 ‘연금술’의 과정을 심리학적으로 재해석하기에 이른다.  『현자의 장미원』의 그림들이 보여주는 일련의 과정은 심리치료에 있어서의 과정과 유사하다.  먼저 수면에 가라앉아 있던 무의식이 어느 특정한 계기로 인해 의식의 일면에 떠오르게 되면 이는 인격의 팽창을 일으키게 된다.  이후 팽창화된 무의식이 무난히 동일화의 과정을 통해 ‘자기(의식)’로 전이가 이뤄지면 큰 문제를 일으키지 않지만, 무의식에 의식이 용해되어 버리면 ‘자아의 상실’을 불러와 정신은 해리와 분열에 이르게 된다.  융은 팽창화 된 집단 무의식과의 소통을 통해 원만하게 ‘자기’로 만들어가는 과정에 주목한다.  이 과정은 연금술에서 대극적 존재인 왕과 여왕이 비둘기로 상징되는 ‘영’의 영향을 통해 합일(융합 또는 용해)에 이르고 이후 죽음의 과정과 부활(정화)을 거쳐 새로운 하나의 합일체를 이루는 과정과 일치한다.  인격의 팽창으로 인해 활성화된 무의식을 인식한 인간은 이를 ‘자기’로 받아들이기 위해 투사를 통한 전이를 하게 된다.  이는 남성이 억압되어 온 자신의 아니마를 여성에게 투사하는 것과 같은 경우이다.  심리학적 치료의 과정에서 이 투사는 가까운 대상인 의사에게 이루어지는데, 투사의 가장 중요한 개념은 바로 집단무의식의 동질성에 있다.  의사에게 투사되는 전이의 부분이 집단무의식의 성질을 띠고 있는 것이기에 의사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 환자의 투사에 전이된다.   전이된 무의식이 원만하게 의식화되기 위해서는 바로 투사의 본질이 무엇인가에 대한 인식이 선행되어야 한다.  융은 이런 이유로 심리치료의 과정에서 의사가 먼저 환상성의 형태를 띠고 나타나는 투사의 본질과의 대화를 이끌어나갈 강한 의식과 끈기를 지녀야 한다고 말한다.  ‘무의식은 자기조절’의 기능을 가지고 있기에 ‘의식’을 ‘자아상실’에 이르기 전에 균형을 잡아줄 역할이 의사에게 있다는 것이다.  무의식의 환상성에 매혹당한 환자는 그 환상성의 배후에 존재하는 본질을 인식할 수 없기에 심리치료자인 의사가 자신에게 투사된 집단무의식의 본질과 대상이 무엇인지를 통찰, 분석할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연금술에서 대극의 합일(왕과 여왕)을 통한 ‘죽음’의 상태를 ‘정화’의 과정을 거쳐 ‘합일체’로 이끌 수 있는 연금술사의 능력과도 같다.  융은 이러한 능력을 기적과도 같다고 표현했다.  그만큼 무의식이 개인의 인격에 미치는 영향은 막강한 것이어서 주체가 의식의 확립이 강하지 않다면 무너질 만큼 위험한 것이다.  더군다나 우리가 살고 있는 현재는 확립되어 있는 의식의 세계마저도 혼란과 붕괴를 겪는 시대이다.  자의식이 혼란을 겪어 약화된 반면 대중문화로 지칭되는 페르조나와 집단무의식은 그 영향력을 더욱 키워가고 있다.  현대에 나타나는 정신적 병리현상과 심신상실은 바로 약화된 자의식에 범람하는 집단무의식의 영향이라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연금술에서 대극의 합일체를 만들어 내기 위해 근친혼이 선행됐던 이유는 무엇일까?  여기에서 근친혼이 상징하는 것은 실제적인 근친혼이 아닌 실제적 ‘자기’를 만들어내기 위한 과정으로 볼 수 있다.  ‘자기’를 먼저 확립하지 않고서는 다른 무엇도 만들 수 없다는 깨달음이 융이 『현자의 장미원』에 대한 심리학적 해석에 나타나 있다.  융은 그 해결책으로 인격의 개성화를 꼽는다.  집단 무의식에 용해되지 않는 ‘자기’의 확립도 중요하지만, 집단무의식의 범람 속에서 인격의 팽창을 통해 ‘자기’를 채워나가는 긍정적 계기로 삼을 수 있는 방법이 바로 ‘인격의 개성화’에 있다는 것이다.  ‘인격의 개성화’의 과정은 또한 집단무의식에 영향을 끼쳐 그 개인의 타인과의 관계를 통해 긍정적 영향력을 펼칠 수 있다는 믿음이 바로 융이 『인격과 전이』에서 하고자 했던 말일 것이다. 


  1. 아니마(아니무스), 페르조나의 개념과 인격에 미치는 영향

  정신적 대상성이라는 생각은 가장 오래되고 가장 보편적인 인류의 업적이다.  원시적인 귀령은 무의식적 콤플렉스의 표현이다.  현대 심리학이 ‘부모 콤플렉스’에 부여하는 중요성은 부모 귀령이라는 위험한 영향력에 관한 원시적 체험의 직접적인 연속이다.  이마고는 부모의 영향과 어린이의 특수한 반응으로 생성된다.  어떤 사람의 의식 영역이 제약되면 될수록 정신 내용은 마치 밖에 있는 귀령이나 마술적 세력처럼 나타나며 이것은 살아 있는 사람에게 투사된다.  그 내용들은 심리학적으로는 의식에 아직 완전히 통합되지 않은 자율적인 콤플렉스라고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콤플렉스는 비교적 높은 단계에서, 특히 모든 서구의 문화민족들에서는 항상 여성성이다.  조상숭배는 본래 ‘유령’을 달래는 데 이바지했지만 보다 높은 문명 단계에서는 본질적으로 도덕적이며 교육적인 제도가 되었다.  남성의 심리와는 너무도 다른 심리의 여성은 남성이 전혀 볼 줄 모르는 일들에 관한 정보의 원천이다.  여성은 남성에게 영감을 의미한다.  남성은 여성적인 특징을 가능한 한 억압하는 것을 미덕으로 여기며 살아간다.  그러나 무의식 속에서는 이에 대한 여성(심혼)의 이마고가 계속해서 축적된다.  그러기에 남성은 바로 자신의 심혼의 투사를 될 수 있는 대로 주저 없이 수용할 수 있는 여성을 얻으려는 유혹에 빠진다.  심혼의 여성성에 대해서는 모든 시대의 예술이 증거를 제시하고 있다.  그런 작품들이 세상에서 널리 인정받고 있다는 사실은 여성적인 아니마 상에는 어떤 초개인적인 것이 있다는 것을 시사한다.  그것은 우리 조상의 모든 경험의 침전물이지만 그와 같은 경험 자체는 아니다.  남성의 무의식 속에는 여성이라는 유전된 집단적 상이 존재한다.  남성은 그 여성상의 도움으로 여성의 본질을 파악한다. 

  페르조나는 개인의 참된 본성을 가리기 위해 궁리된 것이다.  사회는 이것을 일종의 안전보장책으로써 요구한다.  이 과정에서 인위적 인격의 구축은 피할 수 없는 필연성이 되고 있다.  집단적으로 어울리는 페르조나의 구축은 외부 세계에 대한 엄청난 양보와 진정한 자기희생을 의미하며 이러한 사회적 역할과의 동일시는 풍부한 신경증의 원천이다.  모든 통상적인 경우에 자기 자신을 무시하고 사회적 역할과 동일시하려는 시도가 일어나는 그 즉시 벌써 무의식은 반응을 나타낸다.  그가 되어야 할 이상적인 남성상인 페르조나는 안으로는 여성적 유약성으로써 보상된다.  그리고 개체가 밖으로 강한 남자의 역할을 하는 것처럼 안으로는 여성, 즉 아니마가 된다.  왜냐하면 페르조나에 대립하여 나타나는 것이 아니마이기 때문이다.  개성화, 즉 자기 실현의 목적을 위해서는 그가 자기 자신에게, 그리고 남들에게 무엇으로 보이는가를 서로 구별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물론 페르조나의 문제에서는 그 사람과 그의 직위가 서로 다르다는 것을 그에게 분명히 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다.  그에 반하여 아니마로부터 자신을 구분하는 것을 매우 어렵다.  아니마가 보이지 않는 것이기 때문이다.  페르조나라는 단어로부터 현대적 개념의 ‘개인적’이라는 말과 ‘인격’이 유래되었다는 것은 우연한 사실이 아니다.  개인적이든 인격이든 내가 나의 자아를 주장할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나는 나의 페르조나를 내가 얼마간 동일시하고 있는 인격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렇게 되면 두 개의 인격을 가지게 되는데 이 사실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모든 자율적인 또는 상대적으로만 자율적인 콤플렉스는 인격으로서, 또는 인격화되어 나타나는 특이성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페르조나와 일반적으로 모든 자율적 콤플렉스에 해당되는 것은 또한 아니마에도 해당된다.  아니마도 하나의 인격이기 때문에 그 이유로 여성에게 쉽게 투사될 수 있다.  심혼상의 일차적 담지자는 어머니이다.  남성에게 그 어머니를 의미하는 무의식에 대한 보호는 현대인에게는 무엇으로도 대치되지 않는다.  하지만 그가 아니마의 형상은 어떤 자율적 인격으로 파악하고 아니마에 대하여 개인적인 물음을 제기한다면 그는 올바른 방법을 찾은 것이다.  아니마와 말을 주고받으며 만족할 만한 토론의 종결이 이루어질 때까지 대화를 계속해야 한다.  내면세계의 것은 무의식적인 것이기 때문에 주관적으로는 우리에게 더 강하게 영향을 끼친다.  그 때문에 자기 고유의 문화에서 계속적인 진보를 이루고자 하는 자는 아니마의 영향을 객관화하고 어떤 내용이 그 영향의 기초에 있는지 이해하고자 시도하지 않으면 안 된다. 

  2. 전이의 정체상태의 치료과정-인격의 팽창과정에서 겪는 균형 상실이 가져오는 영향

 무의식을 동화同化해가노라면 주목할 만한 현상이 일어나게 된다.  무의식에 떠오르는 모든 것을 정확하게 알고 있다고 믿는 부류와, 이에 비해서 의기소침하고 심지어 무의식의 내용에 억눌리는 부류이다.  두 사례 모두 객체에 대한 관계가 강화되는데 전자에서는 자기의 행동 영역을, 후자는 자기의 고뇌의 범위를 확대하는데 이를 다른 말로 정신적 팽창이 일어났다 로 바꿀 수 있다.  정신적 팽창의 가장 흔한 사례는 많은 남성들이 자기의 일과 칭호에 고지식하게 동일시하는 경우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때 팽창을 일으키는 것은 사회적 직무의 품격이 아니라 의미 있는 환상이다.  하나의 경우가 사회적인 역할 속에 사라지는 것처럼 다른 하나의 경우는 환상 속에 사라지며 그로써 자기의 주변도 잃어버리게 된다.  이러한 인격의 해체가 바로 정신병이다.  병적인 인격 팽창은 물론 집단적 무의식 내용의 자율성에 대면한 인격의 타고난 유약함에서 기인하는 경우가 많다. 

  개인적 억압이 제거되면, 개성과 집단정신이 서로 혼합된 체 떠오른다.  그리하여 이전까지 억압되어 있던 개인적 환상이 소멸된다.  이 과정에서 집단정신이 출현할 가능성이 넘쳐나면 그것은 혼란스럽고 현혹스러운 영향을 끼친다.  페르조나의 해소와 더불어 원치 않은 환상이 고삐가 풀린 듯이 뿜어져 나오게 된다.  무의식의 영향력의 우세, 이와 결부되어 일어나는 페르조나의 해소나 의식의 주도력의 격감은 정신적 균형이 장해된 상태이며 이런 상태는 분석치료의 경우에서 인위적으로 만들어진다.  이러한 균형 상실은 겉보기에 절망적인 착종錯綜에 직면해서 일어난 공황 상태, 자포자기의 상태이다.  이 과정을 통해 해방된 에너지는 의식에서 사라져 무의식으로 떨어지면서 무의식을 활성화 시킨다.  그 다음의 결과는 의미의 기분변화이다.  그렇기에 나는 균형 상실을 어떤 합목적적인 것이라고 본다.  이것은 새로운 균형을 만들어 내는 것을 목적으로 하며 또한 그 목표를 달성한다.  -다만 전제되어야 할 것은 의식이 무의식으로부터 산출된 내용을 동화시킬 수 있어야 한다는 것, 다시 말해 그것을 이해하고 소화시킬 수 있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균형상실로 인한 무의식이 의식과의 동화를 통해 긍정적인 인격을 형성하는 경우와는 다르게 정신적 좌절이 삶을 파괴하는 파국을 의미하는 사례도 많다.  그러나 중요한 사실은 무의식의 자기조절이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무의식은 ‘요구’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욕구를 다시 거두어들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무의식에 대립해서 힘을 발휘할 수 있는 것은 단 한 가지뿐이다.  그것은 외부의 어쩔 수 없는 곤경이다.  외부로부터의 진정한 곤경이 있는 한, 심적인 문제는 효력을 잃게 되는 것이 보통이다.  오직 그 사람에게 진정으로 존재하는 것만이 치유력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집단정신을 향한 통로를 여는 것은 개인에게 삶의 새로운 변화를 의미한다.  그 때문에 집단정신 속에 감추어져 있는 큰 가치를 버리지 않으려는 사람들은 모두 새롭게 획득한 인생의 심연과의 연결을 어떤 방법으로든지 유지하려고 노력한다.  동일시는 그것을 향한 가장 가까운 길인 것 같다.  왜냐하면 집단정신 속에서의 페르조나의 해체는 그가 이러한 심연과 맺어지고 모두 잊어버린 채 그 속에 몰입하도록 확실하게 초대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동일시의 과정에서 개성의 자립성은 손상을 입는다.  전이의 정체상태를 넘어서 도달하게 될 가능성과 목적지가 있다면 그것은 바로 개성화의 길이다.  개성화란 본래의 자기가 되는 것이다.  개인의 특이성이 충분히 고려되면 개인의 특성을 소홀히 하거나 심지어 억압한 것보다 더 나은 사회적 능력을 기대할 수 있게 된다. 즉, 개인의 특이성이란 혼합 관계의 특이성, 혹은 그 자체로는 보편적인 여러 기능이나 능력의 등급 있는 분화라고 이해될 수 있는 것이다.  개성화는 모든 요소들의 생동하는 협동  작용을 지향한다.  개성화의 목적은 한편으로는 페르조나, 다른 한편으로는 무의식적 상像들의 암시적 강제력의 그릇된 굴레에서 자기를 해방시키는 것과 다름없다. 

  3. 의식과 무의식간의 대결, 변환 과정을 통한 인격의 형성과정

  우리의 현재까지의 경험에 비추어, 우리는 무의식 과정이 의식에 대하여 ‘보상적’ 관계에 있다는 주장을 내세울 수 있다.  그 이유는 의식과 무의식은 상호 대립해 있는 것이 아니라 서로 전체, 즉 자기가 되기 위해 보완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자기는 이른바 우리가 있는 그대로인 하나의 인격이다.  자아의식을 보상하는 무의식 과정은 전체 정신의 자가조절에 필요한 모든 요소를 지니고 있다.  그러나 자기인식과 그에 따른 행위로 자기 자신을 의식화하면 할수록 집단적 무의식에 덧씌워져 있던 개인적 무의식의 층은 사라진다.  그로써 이제는 더 이상 편협하고도 사사로이 예민한 자아-세계에 갇혀 있지 않은 더 넓은 세계, 객체에 참여하는 의식이 생기는 것이다.  이 단계에서 발생되는 착종이란 더 이상 이기적인 욕구 사이의 갈등이 아니라, 나와 다른 사람에게 모두 관계되는 어려움들이다.  이 단계에서 중요한 것은 궁극적으로 집단적 무의식을 움직이게 하는 집단의 문제이다.  왜냐하면 그런 착종은 개인적인 보상이기보다 집단적 보상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무의식이 어떤 내용을 산출한다는 사실을 경험하게 된다.  무의식의 정신이란 본능적인 것이다.  무의식에는 분화된 기능이 없으며, 우리가 ‘사고思考’라고 이해하는 그런 방법으로 사고하지 않는다.  무의식은 단순히 의식의 정황에 응답하는 상像을 만들어낼 뿐이다.  이러한 고찰로 인해 무의식이 자기 고유의 주도권을 갖지 못한 단순한 반응일 뿐이라는 판단을 한다면 그것은 착오이다.  그와 반대로 무의식은 자발적일 뿐만 아니라 그 통솔을 자기의 것으로 만드는 능력까지 가진 것으로 입증될 만한 수많은 경험이 있다.  목표를 향한 무의식의 추진 동기는 본질적으로는 다만 자기실현을 향한 충동으로 보인다. 

  무의식과의 대결은 변환을 목표로 삼는다.  만약 변환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무의식은 그 제약적인 영향력을 변함없이 갖게 되어 신경증이 유지되거나 강박적 전이에 사로잡히기 때문이다.  무의식과의 대결에서 중요한 것은 환상의 형태로 의식에 출현하는 무의식적 과정을 풀어내는 것이다.  그러나 환상을 이해하는데 있어 환상상을 그 배후에서 작동하는 것과 같은 것이라고 간주해서는 안 된다.  가상은 사물 그 자체가 아니라 단지 그 표현일 뿐이기 때문이다.  환상 현상에 능동적으로 참여함으로써 무의식적 환상을 계속 의식화하는 작업은, 첫째로는 수많은 무의식적 내용이 의식화됨으로써 의식이 확대되고, 둘째로는 무의식의 주도적 영향이 점차로 감소하며 그리고 셋째로는 하나의 인격의 변화가 일어나는 성과를 거두게 된다.  나는 무의식과의 대결을 통해서 지향된 이 변화를 ‘초월적 기능’이라고 일렀다.  그러나 우리는 초월적 기능의 길이 정신적 은둔주의, 즉 삶과 세계로부터의 괴리와 동일한 것이라고 믿어서는 결코 안 된다.  전혀 그 반대로 그 길은 대개 그런 개인들에게 부과된 특이한 세상의 과제를 현실에서도 착수할 때 비로소 가능하고 성공할 수 있는 길이다.  환상이란 생명체의 대치물이 아니라, 삶에 대해 자기의 몫을 지불하는 자에게 돌아가는 심혼의 열매이다.  자율적 콤플렉스인 아니마를 극복하고 그것이 성공적으로 의식과 무의식 사이의 관계 기능으로 변환될 때, 자아는 모든 집단성과 집단적 무의식과의 뒤얽힘에서 자신을 성공적으로 해방시킬 수 있다.  하지만 우리 문제의 출발점은 아니마 현상과 아니무스 현상을 일으키는 무의식적 내용이 충분히 의식으로 이동되었을 때 뒤따르는 상태이다.  이 때 비개인적 무의식의 환상이 전개되는데 그것은 본질적으로 집단적 상징을 포함하는 것으로써, 일정한 목표를 향하여 집중적으로 진행되는 특정한 무의식적 방향성을 따르고 있다.  무의식과의 대결의 다음 목표는 무의식적 내용이 무의식에 머무르지 않고 더 이상 간접적으로 아니마와 아니무스 현상으로서 표현되지 않는 상태에 도달하는 것이다.  이 상태에 도달하지 않는 한 무의식의 내용들은 자율적 콤플렉스, 즉 장해 요소가 된다.  이 목표에 도달하기 위한 과정에는 개인차가 있으며 우리에게 현실을 외면할 수 있는 방법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우리는 자신을 깊이 생각해야 한다.  이렇게 하여 무의식 내용의 의식화를 통한 마나-인격의 해소는 당연히 그렇게 존재하며 또한 살아 있는 ‘어떤 것’으로서의 우리 자신에게 돌아가도록 인도한다.  이와 같은 ‘어떤 것’은 우리에게 낯설면서도 매우 가깝고, 우리 자신이면서도 우리에게 인식되지 않은 그토록 비밀스러운 체질을 갖춘 잠재적 중심이다.  나는 이 중심을 ‘자기’라고 불렀다.  ‘자기’는 내부와 외부 사이의 갈등에 대한 일종의 보상이라고 규정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하여 자기는 또한 삶의 목표이며, 그것은 개별적 인간뿐 아니라 그 속에서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완벽한 상으로 보충하는 전체 집단의 표현이기도 한다. 

 4. 전이의 심리학

  연금술의 그림들에는 전이 관계가 포함되어 있는데 의식적이기보다 무의식적 전제로서 포함되어 있으며 그래서 그것은 전이 현상의 설명에 최소한의 길잡이로 이바지하는 데 적합하다.  신비적 결혼이라는 관념은 연금술에서는 융합으로도 표현되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다.  융합의 관념은 한편으로는 화학적 결합의 알 수 없는 비밀을 밝히고 다른 한편으로는 신화소로서 대극 합일의 원형을 표현하며 그로써 신비적 융합의 상이 되었던 것이다.  원형은 물론 그때그때의 형상을 드러낼 때 환경 세계에서 얻은 인상들의 도움을 받지만 결코 외적인 것, 비 심혼적인 것을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과 상관없이 비개인적인 심혼의 삶과 본질을 묘사한다.  그것은 각 개인이 태어날 때부터 갖추고 있는 것이지만 개인의 인격에 의하여 수정되지도 않고 소유될 수도 없는 것이다.  이 심혼은 개별적 정신의 전재조건을 이루며 수많은 물결을 실어 나르는 바다와 같다.  두 개의 화학물이 서로 결합하면 둘은 변화한다.  의사의 심리적 상태는 전이에 의하여 그 자신도 눈치 채지 못한 사이에 변한다.  그는 전염되고 환자와 마찬가지로 자기 자신과 그를 사로잡고 있는 것을 구별할 수 없다.  긍정적인 것과 부정적인 것, 신뢰와 불안, 희망과 불신, 호의와 반항의 모순된 교차는 치료 초기의 의사․환자 관계의 특징이다.  그것은 연금술사들이 태초의 세계의 혼돈과 비견한 성분의 미움과 사랑이다.  활성화된 무의식은 쇠사슬이 풀린 대극들의 뒤죽박죽처럼 나타나고 무의식은 이 대극들이 서로 화해하도록 시도할 것을 요구하며 여기에서 연금술사들이 말하듯 만병통치약이 생겨난다.  연금술사들이 말하는 왕과 여왕의 결혼의 비유는 대극의 합일을 말한다.  이에 선행되는 사건은 여러 가지 대극들의 대결 또는 충돌의 의미를 가지므로 혼돈과 검음이라고 명명될 수 있다.  의사-환자 사이의 의식적 신뢰 관계에 대해서 이때 배열된 무의식적 내용은 투사됨으로써 하나의 착각적 분위기를 만들어내어 오해를 일으키거나 반대로 두 사람이 정말 황당할 정도의 조화를 이루고 있는 것처럼 만든다.  나는 왜 연금술사들이 메르쿠리우스에 그의 어두운 성질과는 심하게 대조되는 최고의 심혼적 성질들을 부여하는지 그 까닭을 이해할 수 있다.  무의식적 내용은 사실 고도로 의미 깊은 것들이다.  궁극적으로 무의식은 인간 정신의 모체이며 그 발명들이기 때문이다.  무의식의 이 전혀 다른 측면이 그토록 아름답고 의미 깊은 것이라 해도 바로 누미노제 특성 때문에 때로는 위험스럽게도 착각을 일으키는 데 기여하는 것이다.  원질료 즉 무의식적 내용을 다듬어가는 작업은 의사에게는 끝없는 인내, 끈기, 안정된 기분, 앎과 능력을, 환자에게는 최선의 힘을 다한 노력과 고통을 지탱하는 능력을 필요로 하는데 이것은 의사에게도 무관하지 않다.  그 혼돈을 폭력적이 아닌 방법으로 남김없이 극복하는 것은 ‘신이 허락하는 것’과도 같은 기적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위험을 헤아리고 이에 견딜 수 있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  이는 그가 다루는 무의식의 재료 속에 어떤 살아 있는 것, 하나의 모순된 메르쿠리우스가 있다는 사실을 의식하고 있는 사람의 특정한 자세를 표현한다.  무의식의 인격화인 메르쿠리우스는 바로 본질적으로 ‘복합적인’ 모순된 이중 성질이며, 마귀, 거인, 짐승인 동시에 치료제 ‘현자의 아들’, 신의 지혜, 그리고 성령의 선물이다.  영원한 진리는 시대정신과 함께 변하는 인간의 언어를 필요로 한다.  원초적 상들은 끝없이 변환할 수 있고 그러면서도 항상 그대로인 채 있지만 오직 새로운 모습을 통해야만 새롭게 파악되는 것이다.  그렇기에 인간 또한 그의 무의식에 의하여 제시된 여러 가지 가능성과 경향들의 모순된 다종다양성 속에 소멸하는 것이 아니고 그 포괄된 단일성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니그레도나 테네브로지타스(암흑)에서 시작되는 고통에 찬 갈등을 연금술사는 분리, 용해, 하소 또는 네 원소들의 분할 등으로 묘사하고 있으며, 이와 같은 극도의 분리 과정에서 영靈으로의 변환이 일어난다.  그것은 언제나 신비한 메르쿠리우스로서 드러난다.  수많은 다양한 과정과 양식을 통하여 연금술사는 이 모순, 또는 이율배반을 극복하고 둘에서 하나를 만들고자 시도한다.  대극의 융합은 연금술에서 너무도 중요한 위치에 있기 때문에 때로는 신성혼과 그의 신비한 수반 현상의 형태로 모든 과정이 묘사되기도 한다.  이와 같은 종류의 가장 온전하면서도 동시에 가장 단순한 묘사는 아마 1550년의 『현자의 장미원』에 있는 일련의 그림일 것이다.  의사가 환자와 함께 무의식과 대결할 때 관찰하고 경험하는 것이 놀랍게도 이 그림의 의미 내용과 일치하는 것이다. 

<연금술서: 『현자의 장미원』의 일련의 그림들>

  메르쿠리우스의 샘은 네 귀퉁이에 네 개의 별이 있는 정사각형의 4위성으로 되어 있다.  이 넷은 네 개의 원소들이다.  위의 중앙에는 다섯 번째 별이 있는데 그것은 다섯 번째 존재, 넷에서 생긴 하나, 제5원소를 의미한다.  밑에 있는 물받이는 헤르메스의 그릇이며 변환이 일어나는 곳으로 그것은 하나의 캄캄한 바다, 혼돈이다.  그릇은 자궁이라고도 부르는데 그 속에서 호뭉쿨루스가 자란다.  샘 테두리 바깥쪽으로 여섯 개의 별이 있는데 그것은 메르쿠리우스와 함께 일곱 항성 또는 금속을 나타낸다.  메르쿠리우스는 인격화하면 일곱 항성의 통일체인 안트로포스가 되며 그의 몸은 이 세계이다.  메르쿠리우스의 샘은 세 개의 관에서 흘러내리는데 처녀의 젖, 샘의 식초, 그리고 생명수라고 부르는 것이다.  그림의 세 개의 관보다 좀 높은 곳에 신비적 변환의 부모이며 없어서는 안 될 시자侍者들인 태양과 달이 있고 이보다 높은 곳에 제 5원소의 별, 적대적인 4원소들의 통일의 상징이 있다.  그 위에 쪼개진 뱀이 뒤따르는데 이 불길한 둘이라는 수를 도르네우스는 마귀라고 불렀다.  이 뱀은 메르쿠리우스의 이중 성질이다.  머리들은 불을 뿜고, 불에서 마리아의 ‘두 개의 연기 기둥’이 나온다.  거기에 두 줄기 증기가 아래로 침전하여 연금술 과정을 처음부터 시작하며 그로서 여러 차례 승화 또는 증류를 유도하여 ‘나쁜 냄새’, ‘무덤의 악취’ 그리고 시원의 집요한 검음으로부터 정화한다.  ‘바다’는 무의식의 정적인 상태이고 ‘샘’은 그 활성화, 그리고 ‘과정’은 그 변환이다.  무의식적 내용의 통합은 치료제의 관념에 표현된다.  그릇에서 솟아오르는 메르쿠리우스 샘이 다시금 그릇으로 되돌아와 떨어지고 그로써 하나의 폐쇄된 순환을 표현한다는 사실은 메르쿠리우스의 본질적인 성질을 의미한다.  즉, 메르쿠리우스가 자기 자신을 잉태시키고, 죽이고, 삼키고 다시 잉태하는 그 뱀이라는 것이다.

  메르쿠리우스의 샘에서 묘사되지 않은 기법의 비밀, 즉 적대적 대극의 지고한 합일로서의 태양과 달의 융합이 일련의 그림들 속에 그 의미에 걸맞게 잘 묘사되고 있다.  근친상간적인 동기가 아폴로와 디아나의 남매 관계에서 나타난다.  오른손은 다섯(4+1)개의 꽃으로 이루어진 형상을 들고 있다.  앞의 것은 남성에게, 뒤의 것은 여성에게 바쳐진다.  높은 곳에서 또 하나의 다섯 번째 꽃이 내려오는데 아마도 제 5원소를 묘사하는 것 같다.  오른손에 의한 합일은 진정한 비밀을 묘사하고 있다.  이 합일은 성령의 선물, 즉 왕자의 기법에 의해 매개되기 때문이다.  세 개의 가지는 세 개의 이름을 가진 메르쿠리우스, 또는 샘의 세 개의 관의 ‘솟아오름’에 일치된다.  이 삼중 구조는 다른 한편으로는 중요한 사실을 가리키는데 그것은 ‘장미’를 만들어내는 것은 세 개의 살아 있는 존재라는 사실이다.  즉, 왕, 여왕과 그들 사이에 있는 성령의 비둘기가 그것이다.  또한 이 형태에서 그는 삼중의 성질, 즉 남성적, 여성적 그리고 신적인 성질을 갖는다.  이 그림의 심리학에 관해서 무엇보다 강조할 것은 그것이 우선 인간적인 만남을 묘사하고 있다는 사실이며, 이 경우에 사랑이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왕과 여왕의 왼손의 접촉이 암시하는 근친혈족의 결합은 왕의 특권이다.  근친간은 자기 고유의 존재와의 합일, 개성화, 또는 자기화를 상징한다.  근친간은 그저 자가수태의 원초적 관념 뒤에 직접 이어지는 단계, 같은 것과 같은 것끼리의 융합의 단계일 뿐이다.  이러한 정신적 사상은 전이의 주의 깊은 분석으로 확인할 수 있는 것을 묘사하고 있다.  인습적인 상황에 뒤이어 동반자의 무의식적인 ‘가족화’가 저 유아적인 환상상들의 투사를 통해서 이어지는데 그 환상상들은 처음에는 자기 가족의 성원에게 투입한 것으로, 의사에 대한 전이는 의사에게 가족적인 친밀감을 갖도록 강요한다.  이는 매우 바람직하지 않은 것이지만 그래도 작업에 유용한 원질료임을 보여준다.  전이의 의학적 치료는 투사를 되돌려오고 상실된 실체를 보상하며 인격을 통합할 수 있는 좀처럼 자주 오지 않는 대단히 값진 기회이다.  그러나 상대자와의 철저한 대결 없이 유아적 투사의 해소는 흔히 불가능하다.  투사의 해소는 전이의 합법적이며 의미 깊은 목적이기 때문에 ‘화해’의 방법이 무엇이든, 전이는 언제나 어디서나 불가피하게 토론과 대결을 유도하고 그와 함께 보다 높은 의식화로 인도한다.  이것은 인격 통합의 분도기이다.  참모습을 가리고 있는 인습 너머의 토론으로부터 참다운 인간이 출현한다. 

  심리학적 단계에서 본 교차-종형제-결혼은 무엇보다 전이의 문제이다.  그 딜레마는 아니마와 아니무스가 인간적 상대자에게 투사됨으로써 원초적 친족상을 만들어 암시적으로 집단혼의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는 데 있다.  친족 특성은 집단혼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전향적으로, 인격의 통합, 즉 개성화를 가리키는 것이다.  그러나 점차 증가하는 국제 간 관계와 종교의 약화는 경계지움을 없앴거나 완화시켰고 앞으로 이 현상은 더 심해질 것이다.  그로인해 형체 없는 대중을 만들어낼 것이며 그 전조를 우리는 이미 집단정신의 현대적 현상에서 보고 있다.  이 대중화 때문에 원초적 족외혼적 질서는 차츰 그동안 힘들여 억제해왔던 혼돈 상태에 가까이 다가간다.  이것을 해결할 방법은 오직 하나, 그것은 바로 내적인 강화이다.  개체의 내적인 증강이 의식적으로 수행되지 않으면 그것은 자동적으로 일어나서 집단 인간이 동포에게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냉혹해지는 것과 같은 형태의 현상으로 나타난다.  내적인 일치의 의식적인 실현은 그 필수 조건으로 인간관계를 고집한다.  왜냐하면 의식적으로 인정하고 수용한 이웃과의 관계지움 없이는 인격의 합성 또한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전이 현상은 아직 하나의 투사 이외의 다른 것이 아닌 동안, 그 현상은 분리만큼이나 결합도 일어나게 한다.  그러나 경험에 의하면 전이에서의 어떤 종류의 결합은 투사가 해소되어도 무너지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그 뒤에는 하나의 고도로 의미 깊은 본능적 요소, 즉 친족 리비도가 있기 때문이다.  친족 리비도는 하나의 본능이기 때문에, 종파, 당, 민족이나 국가에 의한 어떤 대치물도 충분치 않다.  그것은 인간적 결합을 원한다.  이것이 무시되어서는 안 될 전이 현상의 핵심이다.  왜냐하면 자기와의 관계는 동시에 인간 동포와의 관계이며 어떤 누구도 먼저 자기 자신과 결합하지 않고 후자와 결합할 수 없다. 

  그림 3에 대해 심리학적으로 언급할 것은 이 상황이 인습적인 피복을 벗어던졌고 거짓된 너울과 그 밖의 미화 수단 없이 진실과의 대결을 형상화하였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이전에 인습적인 적응의 가면 밑에 숨어 있던 것, 즉 그림자를 보여준다.  그림자는 의식화로써 자아에 통합되며 그로써 전체성에 접근할 수 있게 된다.  그와 함께 그림 사례에서는 ‘친화력’의 위험이 높아진다.  그 친화력은 착각을 일으키는 투사들과 객체를 투사의 뜻대로 동화하려는, 측 친숙하게 만들어 은밀한 근친간 상황을 실현하려는 충동을 수반한다.  이 모든 위험에도 불구하고 그 상황의 이점은 꾸미지 않는 진실이 드러남으로써 대화가 본질적인 것에 다가온다는 사실과 자아가 그림자와 더 이상 이중성, 또는 분열 상태에 머물지 않고, 갈등에 찬 것이기는 하지만 하나의 통일체로 구성된다는 점에 있다.  그러나 이러한 전진과 함께 상대자와의 차이가 더욱 분명히 드러나게 된다.  그렇게 되면 무의식은 보통 매력을 상승시킴으로써 현재의 거리를 이으려고 시도하며, 바라던 통합을 어떤 식으로든 실현하려 한다. 

  그림 4는 그것이 무의식으로의 하강을 다루고 있음이 분명하다.  욕조에 몸을 담그는 것은 마치 밑에서의 합일, 즉 영靈의 대극인 물속에서의 합일을 수행하는 것처럼 보인다.  현대적인 형태로는 이 단계가 성적인 환상의 의식화에 해당되며 이와 일치되는 전이의 색조이다.  그림에서 두 쌍이 아직 두 손으로 성령에 의해 매개된 방사형 상징을 들고 있다는 것은 결합의 의미를 묘사하며 바로 인간의 초월적 전체성을 뜻하는 것이다. 

  그림5의 그림들이 강조하는 점은 신비적 합일이다.  배우자들은 스스로 상징이 되어 처음에는 각각 두 요소를 대변하고 그 뒤에는 각기 하나로(그림자의 통합!), 그리고 마침내 둘이 함께 제3자와 하나의 전체가 된다.  ‘둘이었던 몸이 마치 하나처럼 된다.’  이는 심리학적으로는 ‘전이의 해소’를 의미한다. 

  그림 6이 의미하는 죽음은 의식의 절대적인 소멸의 의미하며 그로써 그것이 의식 가능한 한 심적 생활의 전적인 정지 상태를 의미한다.  투사된 내용을 의식화하는 과정에서 전체성에의 충동은 너Du속에 투사되어 있는 것까지를 필요로 한다.  이 충동이 나타나면 그것은 먼저 근친 간 상징으로 가장된다.  다시 말해서 통합되는 내용과 동일시하면 긍정적이거나 부정적인 팽창이 생긴다.  어떤 경우든 항상 무의식적이며 투사되어 있던 내용들의 통합은 자아의 중대한 손상을 입히는 것이다.  연금술은 이것을 죽음, 주상 독해의 상징들로 표현한다.  연금술에서 표명하듯, 죽음은 동시에 현자의 아들의 잉태를 의미한다.  이 ‘아들’은 왕과 여왕의 합일로 생기는 새로운 인간이며 그는 여기서 여왕으로부터 태어난 것이 아니고 여왕 자신이 왕과 더불어 새로운 탄생으로 변환한 것이다.  심리학적 언어로 번역하자면 이 신화소가 말하는 것은, 의식 또는 자아 인격과 아니마로서 인격화된 무의식과의 합일은 두 요소를 포괄하는 새로운 인격을 산출한다.  새로운 인격은 결코 의식과 무의식 사이의 제 3의 인격이 아니고 둘 다이다.  그 인격은 의식을 초월하므로 더 이상 자아가 아니고 자기라고 불러야 하는 것이다.  자기는 자아이면서 비-자아, 주관적이면서 객관적이고 개별적이면서도 집단적이다.  그것은 전체적 대극 합일의 화신으로서 융합의 상징이다. 

  그림7은 심리학적으로는 지남력指南力 상실이라는 어두운 상태와 일치된다.  원소들의 와해는 지금까지의 자아의식의 해리와 분해를 의미한다.  흔히 오랜 시간 지속되는 이와 같은 의식의 분해와 지남력 상실은 분석적 치료의 가장 어려운 과도기이며 때로는 의사와 환자의 인내, 용기, 신에 대한 신뢰를 고도로 요구한다. 

   융합 현상의 전회점에 속하는 또 하나의 과정들이 『현자의 장미원』마지막 그림에 묘사되어 있다.  여기서 다뤄지고 있는 것은 그 융합에 있어서 의식의 인격을 포함시킨 대극 간의 만남 뒤에 일어나는 후속 작용이다.  이에 관한 극단적인 결과는 무의식 속으로의 자아의 용해, 즉 이른바 오염 때문에 생긴다.  심리학적으로 신체는 우리의 개별적이며 의식된 실존의 표현으로서 우리는 그것이 무의식에 의해 범람되거나 중독된 것으로 느끼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자아의식을 무의식에서 떼어내고 무의식의 위험한 포옹으로부터 해방되고자 시도하는 것이다.  정화는 그러니까 뒤섞인 것을 구별하는 것을 말한다.  그것은 개체가 그 안에 포함되어 있는 대극의 일치이다.  이 세상의 이성적 인간은 일회적 개체이면서 또한 바로 ‘인간’이며 집단적 무의식이 움직이는 모든 것에 참여한다.  우리의 심리학은 그 경험 자료의 특수한 상황 때문에 무의식의 의미를 강조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지만 그렇다고 의식의 중요성을 과소평가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다만 의식의 일방적이며 과장된 적용을 일종의 상대화로써 제약할 필요가 있을 뿐이다.  그러나 상대화는 원형적 진실을 통한 매혹이 자아를 지배할 정도에 이르기까지 진행되면 안 된다.  그러므로 오늘날처럼 인격의 대중화가 위협적으로 진행되고 있는 떼에 경험적 자아를 ‘영원한’ 보편적 인간과 구별하는 일은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자아와 무의식 사이를 구별하는 과정은 정화에 해당된다.  그리고 정화가 혼이 다시 신체 속으로 내려올 수 있는 조건이라면, 신체 또한 무의식이 자아의식에 대해 파괴적 작용을 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없어서는 안 될 것이다.  즉 신체는 인격에 제약을 주는 것이다.  그런데 무의식의 통합은 자아가 비판을 견딜 만큼 확고해야만 가능하다.  연금술에서는 정화가 여러 차례의 증류를 통해서 이루어진다.  심리학에서는 통상적인 자아 인간을 온갖 무의식의 팽창된 혼합으로부터 그와 마찬가지로 철저하게 분리함으로써 이루어낸다.  이 과제는 하나의 면밀한 양심의 검증과 자기 도야陶冶를 뜻하며, 그것은 스스로 그것을 성취한 자가 또한 다른 사람에게도 전할 수 있는 것이다.  집단적 무의식의 여성적 대변자로서 심리학전인 아니마 또한 ‘집단성’의 성질을 가지고 있다.  집단적 무의식은 자명自明한 것이며 어디에나 보편적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만약 장기간의 철저한 비판과 투사의 해소를 통해서 자아와 무의식 사이의 구별이 수행되면 아니마는 차츰 자율적 인격임을 그치게 된다.  그러나 선행된 정화에 힘입어 무의식적 혼합에서 해방된 의식 현실에서 아무리 두 개체의 의식된 관계가 조화롭다 하더라도 그것은 하나의 갈등 상황을 말한다.  의식이 무의식의 경향과 동일시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무의식과 대결하여 어떤 형식으로든 그것을 배려해야 한다.  그래서 아무리 그것이 어려울지라도 무의식의 성향이 개체의 삶에 참여토록 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