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노트/마누엘 푸익

<거미여인의 키스>: 금기는 누가 만드는가?

묭롶 2009. 7. 1. 21:23

 

  <피고인 3018호.  루이스 알베르토 몰리나.>

1974년 7월 20일 부에노스아이레스 시 형사법원에서 미성년자 보호법 위반으로 징역 8연 선고.  1975년 4월 4일 D동 7호 방으로 이감되어 정치범 발렌틴 아레기 파스와 함께 수감.  모범수.

 

  <피구류자 16115호.  발렌틴 아레기 파스.>

1972년 10월 16일 노동자들이 파업하고 있던 두 자동차 공장에서 소요를 선동하던 급진 행동파 그룹의 일원으로 바랑카스 부근 5번 국도에서 검거됨.  국가 행정권에 의해 임시 구속되어 현재 판결을 기다리고 있음.   경찰 심문 중에 죽은 정치범 환 비센테 아파리시오의 사망에 항의하여 단식농성에 가담.  1975년 4월 4일 D동 7호 방으로 이감되어 미성년자 보호법 위반범인 루이스 알베르토 몰리나와 함께 수감됨.  행동이 반항적이며 위에 언급한 단식투쟁 및 각 동의 위생 상태 개선과 사신(私信)검열에 대한 항의 소동의 주모자로 지목됨.

 

  사람은 선천적으로 사회적인 존재는 아니었다.  늑대와 살았던 늑대소년에게서 인성을 찾아볼 수 없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야생의 상태였던 인간이 생존을 위한 이해목적에 의해 집단을 이루면서부터 군집을 유지하기 위한 사회적인 체계와 개념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그러나 문명이 고도화되어질수록 사람을 사회조직체계에 부합한 인간으로 만들어내기 위한 눈에 보이지 않는 억압들로 인해 오히려 인간은 주체로서의 인간을 잃어버린 피동적인 존재들로 양산되어졌다.  그 과정에서 기존의 체계를 거부하는 사람들을 '사회 부적응자', '테러리스트' 등 여러 명칭들로 부르며 이들을 적대시하고 있다.  그 적대감의 근원에는 사회적응자들이 갖고 있는 묵시적인 동질감을 위협하는 그들에 대한 경계심이 자리잡고 있다. 

  몰리나와 발렌틴도 사회로부터 부적응 판정을 받은 존재들로서 그들에 대한 사회적 정의에 의하면, 몰리나는 동성애자이고 발렌틴은 반체제테러리스트이다.   몰리나는 사회 속에서 이미 자신에게 가해지는 온갖 종류의 편견들에 익숙해져서 자신이 받는 불이익과 피해를 어쩔 수 없는 것으로 받아들이지만, 발렌틴은 정치현실에 대한 부조리를 혁명적 이상을 통해 바꿔나가려는 주도적 인물이다.  사회적 관점에서 위험인물인 발렌틴을 사회로부터 격리하고 그 조직을 뿌리뽑으려는 계획에 의해 몰리나와 발렌틴은 같은 감방을 쓰게 된다.  처음엔 서로를 혐오했던 그들이지만 밤마다 몰리나가 들려주는 영화이야기를 통해 몰리나와 발렌틴은 서서히 서로를 이해하게 된다.

발렌틴에게서 반체제 운동의 근거지를 알아내기 위해 교도소장은 음식에 약을 넣고, 몰리나에게 정보를 빼내올 것을 사주하지만 몰리나는 자신의 영화 속에서 여자들이 사랑을 지키기 위해 헌신했던 것처럼 발렌틴을 보호하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이러한 그의 사랑의 진정성으로 인해 발렌틴은 사람의 감정에 사회적 금기는 의미가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난 표범여인이 아니야"

"그래 맞아, 넌 표범여인이 아니야"

"표범여인이 된다는 건 아주 슬픈 일이야.  아무도 그녀에게 키스를 할 수가 없으니까.  아무도"

"넌 거미여인이야.  네 거미줄에 남자를 옭아매는......"

"아주 멋진 말인데!  그 말, 정말 맘에 들어"

"발렌틴, 너한테 한 가지 약속할게.  널 떠올릴 때마다, 난 행복할 거야.  네가 나한테 가르친 대로 말이야"

"그리고 한 가지 더 약속해 줘......다른 사람들이 널 무시하지 않도록 행동하고, 아무도 널 함부로 다루게

하지 말고, 착취당하지도 말아.  그 누구도 사람을 착취할 권리는 없어."  P344

 

  세상은 그들의 잣대로 그들을 치죄하고 단정지었지만, 서로 간에 주고 받은 마음으로 인해 '너'와 '나'의 경계가 무화된 그들 사이에  사회적 금기는 더 이상 효력을 발휘할 수 없다.  '금기'는 그것을 받아들이는 대상이 '금기'로 여길때만 효력을 발휘한다.  어린아이에게 세상의 악함을 설명하면 잘 이해하지 못하는 것처럼, 사회성의 금기를 넘어선 지점에서 금기는 더 이상 금기가 아닌게 된다.  그렇게 '사랑'하지만 '키스'를 할 수 없는 '표범여인'이 아니라 발렌틴만의 '거미여인'이 되고 싶었던 몰리나의 마음과, 몰리나가 사회적인 억압과 굴욕에 무릎 꿇지 않기를 바라는 발렌틴의 마음은 감방이라는 좁은 제약된 공간을 넘어 그 둘을 하나가 되게 했다.    몰리나가 석방 이후에도 발렌틴의 부탁을 들어주기 위해 그의 조직과의 접선과정에서 목숨을 잃었지만, 발렌틴에게 '짧지만 행복했던 기억'으로 존재하는 '그'(그녀)는 영원한 '거미여인'으로서 존재한다. 

누가 누군가에게 무언가가 된다는 것이 사람에게 어떤 의미가 될 수 있는지 그들은 보여주고 있다.  사회가 부여하는 이해타산과 목적들은 사람이 사람에게 갖는 의미 앞에서 힘을 잃기도 한다.  갈수록 소통이 부재하고 사회성의 가면 뒤에 본 모습을 가린 채, 가식의 기계적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넘쳐나는 지금, 사람의 진심이 무엇인지, 순수한 사랑이 무엇인지를 다시금 되돌이켜보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