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창자료/<박주택>

'카프카와 만나는 잠의 노래'

묭롶 2009. 7. 1. 13:25

시는 크게 서정시, 서사시, 주지시 등으로 분류된다고 배워왔지만, 시를 읽어나갈수록 시의 발화점을 기준으로 그 중심축을 현존하는 실재에 둔 시와 정신세계에 기반을 둔 시로 분류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실례로 조지훈의 <승무僧舞>에서 시인은 승무를 추는 비구승을 바라보고 있다.  이 시의 일부를 살펴볼 때, 실재하는 이미지에 시인의 정신이 서로 융합된 지점에서 시는 언어로 발화된다.


얇은 사(紗) 하이얀 고깔은

고이 접어서 나빌네라


파르라니 깎은 머리

박사(薄紗) 고깔에 감추오고


두 볼에 흐르는 빛이

정작으로 고와서 서러워라......


  기존의 서정시 대부분이 이와 같은 발화에 힘입어 언어화된 부류였다면, 기형도 시인을 주축으로 하는 부류의 시는 이와 반대로 연마된 정신이 사물이나 대상에 투영되어 실질적 몸을 얻는 지점에서 시가 발화되는 차이점을 보인다.  그 차이는 사물을 바라보는 주체인 ‘시인’자신에게서 기인한다.  과거 세계를 관조하는 견자로서의 시인이 개별적인 자아를 가진 존재로서 대상과 일대 일의 관계를 이룬 반면, 이와 대별되는 시인들의 시 세계에서는 자아가 유일무이의 단일성을 가진 존재가 아닌 무수히 많은 자아가 대상과 함께 혼재하는 양상을 보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자아의 주체성을 확립하지 못한 채, 타자와 구별되지 않는 보통의 삶을 살아가며 정신적 황폐화를 경험하고 있는 현대인과 소통하기 위해서 시적 언어는 변화를 필요로 한다.  그 새로운 언어적 변화의 시도를 『카프카와 만나는 잠의 노래』에서 살펴보자.


......나는 방금 떠나온 異域의 숙소에 누워 들창머리를 어른거리는

꽃가지에 아직도 잠 못 이루는 사람이 나의 또 다른 몸이거나

가까운 혈통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어서

한켠이 아려오기도 하는데......

「백석의 『사슴』풍으로」

나는 나를 떠나 수많은 이들의 기억 속에 잠들어 있는

내가 다시는 깨어나지 않기를 바라며

......나를 향해 몰려드는 수많은 내가

畢生을 거는 푸른빛에 시비를 걸 때

......나는 나무가 꽃을 살피는 틈을 타

빛이 밴 창문을 열어젖히며 수많은 내가 싸늘하게

시간 속에 능멸을 퍼뜨리는 것을 본다......

「門」


  ‘자신’이라고 이름붙이지 못한 수많은 자신들을 바라보며 시인은 자신의 눈으로 보는 현재가 ‘실재’인지를 되묻게 된다.  ‘실재’를 찾기 위해 시인은 ‘자신’을 사물에 투영시켜 그 모습을 바라보는 제 2의 눈을 통해 자신을 인식하는 방식(‘귀 속의 귀로 듣고 입 속의 입으로 말하고 눈 속의 눈으로 보자!  이것은 내가 나를 향해 말해온 것이다’-「물의 저녁 시집」)을 선택한다.  그렇기에 이 경우에 해당되는 시는 온전한 주체의 확립 속에서 흘러나오는 진정한 언어와 만나는 과정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카프카와 만나는 잠의 노래』에서 잠은 현실공간에서 파편화된 자아가 하나의 대상(하얀 말)으로 완성되는 공간이다.  그 공간은 ‘흰말’들이 ‘빗속을 가로지르다’ 돌아가는 ‘하늘의 오래고 푸른 房’(「오래고 푸른 房」)이다.  현실세계가 아닌 잠의 공간에서 주체가 역동성과 실존성을 느낀다는 사실은 아이러니한 상황으로, 온전치 못한 현재에 반발하는 시인의 자의식을 상징한다. 


그 무렵 잠에서 나 배웠네

기적이 일어나기에는 너무 게을렀고 복록을 찾기엔

너무 함부로 살았다는 것을, 잠의 해안에 배 한 척

슬그머니 풀려나 때때로 부두를 드나들 때에

......내게 炳은 높은 것 때문이 아니라 언제나 낮은 것 때문이었다네

유리창에 나무 그림자가 물들고 노을이 쓰르라미 소리로

삶을 열고자 할 때 물이 붙잡혀 있는 것을 보네

......나 다시 잠이 드네, 잠의 벌판에는 말이 있고

나는 말의 등에 올라타 쏜살같이 초원을 달리네

......폐와 팔다리가 모두 떨어져나가

마침내 말도 없고 나도 없어져 적막만 남을 때까지

「카프카와 만나는 잠의 노래」


  실제로 시인의 자의식과 현실 사이에는 언제나 유리가 놓여있다.  사물의 상을 반대로 비추는 거울처럼 유리를 통해 바라보는 현재는 본질이 아닌 표면적 실제이다.  찰나의 순간에 맺힌 이미지의 조각들에는 그 이미지로 인해 발생한 심상들이 덧씌워져 있다.  프란츠 카프카의 『변신』에서 주인공 그레고르는 어느 날 벌레로 변한 자신을 발견한다.  가족들을 부양하기 위한 역할에 충실한 채 자신을 잊고 살았던 그가 벌레로 변하자 가족들은 그를 외면한다.  이 작품에서 벌레는 상징적 의미를 갖는다.  실제 그레고르는 자신을 벌레라고 규정지었을 뿐(가족들이 그를 벌레로 규정지었으므로), 실제로 그는 여전히 사람이었는지도 모른다.  주체가 자신의 존재를 인식하기 위해서는 타자를 필요로 한다.  하지만 가족들이 그를 벌레로 규정짓기 이전부터 사회적 역할에 침잠되어 자아를 상실한 채 살아 왔던 그는 육체는 지녔지만 정신이 깃들지 못한 한갓 벌레와도 같은 존재였다.  어느 날 벌레의 모습인 자신을 통해 자신이 실존적 자아를 상실한 존재였음을 뒤늦게 자각한 그레고르의 모습을 상징하는 것이 이 시집의 ‘카프카’가 아니겠는가?  과거로부터 내려온 사회적 역할에 의해 자신을 규정짓는다면 그레고르의 가족들이 그를 벌레로 인정한 것처럼 자아는 사회성의 페르조나에 용해되어 사라질 것이다.  그러나 21세기의 말엽을 살아가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대중문화에 잠식당한 채 모두 비슷한 생각과 행동을 하는 군중에 전락한 채 자신을 잊고 살아간다.  그 속에서 시인은 사회가 부여하는 ‘오징어 냄새’(‘살 썩는 냄새’)-「시간의 육체에는 벌레가 산다」로 가득 찬 바깥세상과의 단절이 아닌 온몸으로 파고드는 ‘비린내’에 항거하며 온건한 자신을 찾고자 한다.  시인은 이를 위해 ‘잠’이라는 적요의 공간속(沒我의 공간)에서 진정한 자신과의 만남을 시도한다.  그 길에서 시인은 ‘봄비에 얼굴을 닦’고, ‘한눈 파는 문들’이 있는 세속의 ‘그림자’를 뚫고서 ‘구름이 있고, 비가 있고 흰말’이 있는 ‘혼자 있는 강’을 ‘보러「봄비의 저녁」’간다. 


입을 열지 않아 어금니가 아픈 하루

다시는 가지 말자던 술집에 앉아 기우는 저녁해를 바라본다

저 해의 상형문자, 저곳에는 어떤 망령의 책들이 있길래

기다림의 문장들이 실명한 채 바람에 나부낄까......

......

먼지에는 울음소리가 박혀 있다

.......

또 누군가는 잠이 들다 깨어

스스로 독이 되는 긴 편지를 쓰리라......

                                                 「판에 박힌 그림」


  시인은 해저물녘 술집에 앉아 저녁해를 ‘창’(「窓」) 너머로 ‘바라보고’ 있다.  여기에서 시적화자는 시인자신을 바라보는 또 다른 자신이다.  하지만 ‘자신’을 만들어가는 불완전의 여정에서 ‘내려다보는’ 또 다른 ‘나’에 대한 인식은 낯설음과 의구심을 들게 한다.  그렇기에 「풍경이 상처를 만든다?」에서 생각의 주체인 자신의 판단이면서도 ‘만든다?’는 물음표로 되묻고, ‘아름다운 풍경이 상처를 만들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표현했던 것은 아니겠는가?  자신을 바라보는 자신의 인식체계 또한 불완전한 것이어서 ‘어금니’가 아프도록 온종일 구체화되지 않는 ‘말’(言)을 끌어올리기 위해 애를 쓰지만 ‘기다림의 문장들’은 ‘실명한 채’ 바람에 나부낄 뿐이다.  현실은 밝은 해가 떠 있는 공간이지만 ‘판에 박힌 그림’처럼 표면성만을 지닌 알맹이 없는 껍데기에 불과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글을 쓴다는 이유로 미명(밝음)에 현혹된 채 ‘망령의 책’과 ‘스스로 독이 되는 긴 편지’로 채우고 있는 현실을 시인은 ‘먼지에는 울음소리가 박혀 있다’고 말한다.  시인에게 현실의 거짓된 언어들은 「정육점」 ‘진열 대 속 자동 분쇄기에 가지런히 썰려 있는 살점들’과 같은 죽은 언어이다.  「所聞」에서 ‘거리’는 ‘가늘고 긴 말’들과 ‘살아남은 말들’로 ‘시끄’러운 공간이다.  그곳에서는 ‘말이 말끼리 교미’하고, ‘말이 말에게 잡아먹’히며 ‘말의 귀신은 검은옷과 흰옷을 번갈아 입’는 언어(말)의 진정성이 없는 ‘망령의 책’으로 가득하다.


......어둠이 유리창에 흘러내리는 날, 공허한 불빛은 시작의

노래에 헛배가 불러 어둠에 단맛이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지


자정너머, 이슥한 밤이 자신을 들여다보며 편지를 쓸때

안에 깃들어 있던 것들이 미적미적 깨어나 새벽 비에 몸을

맡긴다, 사과 꽃잎이 흩날리는 마음의 방

水仙의 그림자가 곰곰이 번지고 어둠에 보태는

자신의 마음을 밝히는 霧笛 소리에 귀 기울이면


길의 한가운데가 건너온다, 안으로 어둠이 청하는 악수에

......단맛 든 어둠을 빨아먹으며 벼른다

......마음을 들여다보는 동안

빗소리에 귀를 가다듬으며

물관을 부지런히 들락거리는 山竹들

「바람을 건너는 법」


  그렇다면 거짓된 ‘말’들 속에서 진정한 ‘말’을 찾는 길은 어디에 있을까?  단지 ‘비린내’가 뼛속 깊이 스미는 현재를 또 다른 자신의 시선을 통해 바라보는 것만으로 세상의 혼란 속에서 ‘자아’를 건져 올리는 길은 요원해 보인다.  시인은 그 길을 현실과는 대별된 ‘잠’의 세계를 통해 찾고자 한다.  왜냐하면 고요와 어둠이 감싸인 적요의 심상을 통해서만 사물의 실체를 만날 수 있기에 ‘잠’의 세계는 해가 떠 있는 거짓과 위선의 공간과 대별성을 갖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보통사람들이 ‘공허한 불빛’에 경사되어 자신을 알지 못하는 사이 어둠이 허락하는 ‘진실’의 ‘단맛’을 아는 ‘山竹’처럼 ‘잠’의 공간은 ‘水仙의 그림자’가 비추는 ‘안’과 ‘밖’이 소통하는 열린 공간으로 그 안에서는 깊은 울림을 가진 ‘언어’로 ‘편지’를 쓸 수 있는 곳이다.  그 공간에 다다르기 위해 시인은 하염없이 ‘책상 위에 놓인 물병 속으로 숨어들어가 몸이 노래가 될 때까지 내 器官 안의 강과 나무와 새 그리고 풀잎까지를 일으켜 세우며 작은 물고기 인간들과 함께 삶을 바라다’(「물고기 인간」)보는 것이다. 


이곳에서 저곳으로 발길을 옮겨

정처 없음을 핑계로 마음의 길에 꽃 지는 줄 몰랐으니

마음 밖의 풍경이 꽃처럼 아름답다

흰구름이 제 몸의 흔적을 지우며 흘러간다

이제 햇빛 아래에 서서

말이 말과 섞이고 풍경과 풍경이 섞이고

자신의 길부터 열기 시작하는 이파리들이

바람을 받아들이는 것을 본다, 사평로

서초에서 양재까지 마음의 극한이 만들어낸 저 아름다운 것들.....

「私有地에서」


  ‘잠’의 공간은 ‘마음 밖의 풍경’으로 ‘꽃처럼 아름’다운 곳이다.  그곳에서는 ‘흰구름이 제 몸의 흔적을 지우며 흘러’가고 ‘말이 말과 섞이고 풍경과 풍경이 섞이’는 공간 속에서 ‘저 홀로됨의 완성’을 이루어내는 희망의 공간이다.  이에 비해 ‘잠’의 공간과 대별되는 현재는 ‘먼지 자욱이 쌓인’ ‘교회 앞 사철나무’(「교회 앞 사철나무」)와 세파의 더러움으로 흐려진 ‘유리창’으로 표현된다.  사람들은 혼란스럽고 더럽혀진 공간 속을 살면서도 더러움을 인식하지 못하고, 대신 ‘사철나무’가 ‘사람들의 삐걱거리는 편지를 읽는다.’  ‘교회’는 더 이상 세상을 구원하지 못하고 ‘더 많은 죄를 낳는’ 공간으로 변질되고 사람이 아닌 ‘사철나무’만이 그 모습을 바라보며 ‘제 몸에서 울려나오는 노래에 부르르’ 세속의 ‘먼지’를 털어내고 있다.    사회적 페르조나 속에 용해되어 자신의 삶을 갖지 못한 무수히 많은 이 시대의 그레고르를 시인은 ‘사철나무’와 ‘가로등’에 시각을 부여하여 이들을 관찰하고 있다.  앞만 보며 달리며 시간을 소모하는 존재가 되어 자신을 돌아보지 못하는 사람들과 다르게 「가로등」은 그것도 ‘쭈그러진 가로등’은 고요한 저녁의 평온 속에 ‘제 몸 속을 비’춘다.   자신의 몸을 비추는 행위는 ‘죽음을 밀어내며 기를 쓰고 인기척을 내는’, 현재(보편타당의 실재)에 산 채로 봉인당한 「미라」의 안간힘과도 같다.  하지만 안간힘만으로는 부족하다며 시인은 ‘봄이 와야지, 안 되겠다’고 말한다.  시를 통한 ‘발화’의 안간힘만으로는 현실을 바꾸지 못하고 오히려 ‘領土’를 ‘빼앗기고 있다는 느낌’마저 들기 때문이다.  세파로 얼룩진 ‘유리’에 비치는 왜곡된 세상이 아닌 진정한 언어로 「生界」를 만나기 위해 시인은 ‘차고 먼 길’에 ‘희디흰 손을 치켜 뻗는’다. 

  ‘잠’은 또한 잠에서 깨어나는 행위와 겨울을 지나 찾아온 ‘봄’(「봄비」,「봄밤」)과 같이 부활을 상징한다.  ‘새 움이 틀려면 또 한번 시린 그림자에 달을 새기고 서리내린 창문을 지나 선잠 자는 시간을 건너야’(「흰구름 書札」)만 한다.  떨어진 낙엽이 겨우내 썩어 봄에 새잎을 틔우는 것처럼 잠은 현재를 살며 의식적․무의식적으로 인식한 현재가 자아로 융화되는 과정을 의미한다.  그 과정은 ‘제 몸에 비린내가 더 물속 멀리 퍼질 때까지 후회와 두려움 사이를 ~나의 것이어서 돌아갈 수 없는 많은 것들을 두고’ ‘남겨진 곳의 무늬를 만들어 헤엄쳐 가는 것’(「봄밤」)이며, 세상의 ‘길’과 ‘싸움을 걸며’ ‘서투른 혀끝으로 새를 부르’며 ‘고요히 물을 밀며 가’(「이것이, 시월의 일이었다」)는 과정이다.  그리고 ‘남의 것이 된 나의 말과 내 것이 된 남의 말’(「客土」)이 섞이는 과정이기도 하다.  ‘남의 것’과 ‘나의 것’이 혼재된 현재에서 ‘나’이기 위해서는 대상 속에 투영된 자신의 의식을 추출해낼 수 있어야 한다. 

 「연못」에서처럼 ‘길이 되지 못한 것들’이 ‘서로에게 모여 서로의 기원을 찾아’가기 위해서는 ‘침묵 속으로 들어가’서 ‘서로의 살아 있음을 노래’하며 본질을 보기 위한 주의 깊은 관찰이 필요하다.  본질을 보는 시각을 갖기 위해 시인은 ‘오래도록 천식을 앓’는 ‘골목’(현재의 삶)을 향해 ‘조그만 창문’을 ‘밖을 향해’ 열어둔다.  현재를 직시하는 것은 고통을 불러오지만 ‘주체’는 ‘너의 것에 힘입어’ 「占 집 앞에서」 창문을 여는 행위로써 ‘차라리 병을 키우다 깎아지른 절벽에 생의 기록을 새기는 이름 없는 것들’(「꽃지에서 폭설까지」)이 될지언정 수동적인 삶 대신 능동적인 주체적 삶을 살고자 한다.  온전한 자신을 만들기 위한 시인의 노력의 결정이 「소금의 포도」일 것이다. 


......육체를 감싸는 뒤대한 스승들을 보라

한결같이 혓바닥을 말며 죄의 시간 속에서

덜그럭거리고 있는 창고와 만나

저주 받은 먼지로 씌어진 책들을 읽는다


소금의, 손 닿지 않는 곳에서

눈보라가 거쳐간 거리에 꽃잎이, 흩날린다

땅이 깊은 밤을 폐허에게 빼앗기고

분노를 참은 나무가 제 집으로 돌아가지 못한

달빛 옆에서 잠을 잔다


......자신을 오랫동안 들여다본 꽃 핀 사람은

우물의 물을 퍼서 자신의 뿌리로 가져간다

---낮고도 오래 떠 있는 太陽 아래서

「소금의 포도」

  시인에게 현실세계는 ‘육체를 감싸는 위대한 스승들’이 써놓은 ‘저주 받은 먼지로 씌어진 책들’로 채워진 공간이다.  그 속에서 사람들은 거짓된 역할에 경사되어 자신의 주체성을 잃어버린 채 황폐화되어 간다.  시인은 자아로 채워져야 할 ‘땅’에 회복의 기운을 불러일으킬 ‘잠’의 공간인 ‘깊은 밤’을 빼앗아간 ‘거짓된 세상’에 분노한다.  그럼에도 ‘오래 떠 있는 太陽’으로 상징되는 고난의 시간이 길 것임을 예감하면서도 황폐화된 자아에 뿌려진 한 점 ‘꽃잎’을 희망삼아 시심의 ‘우물’에서 ‘물을 퍼서’ ‘자신의 뿌리’(자아)를 적신다.  저주받은 상형문자를 물려받은 ‘세상의 입들과 귀’(「立夏附近」)가 거짓된 ‘저 빛나는 햇살을 받아들여’ ‘눈이 부’시지만 시인은 비록 자신이 걷는 길(온전한 언어)이 ‘내가 뜯어먹다 버린 앙상한 뼈다귀’(과정으로서의 ‘시’)일 지언정 ‘후회’가 없다고 말한다.  그 길은 거짓된 언어로 포장된 고속도로가 아니라 자신이 개척해 나가야할 길이기 때문이다.  기존의 인습의 굴레 속의 언어를 벗어난 새로운 언어를 개척하기 위한 시도를「능선」에서 찾아볼 수 있다.  표면적 삶의 실재 속에 드리운 대상의 본질은 주체와 대상 사이의 경계 너머에 있는 듯하다.  「능선」에서 화자의 시선은 ‘저녁 능선’을 ‘본다’의 일차적인 주체의 것이다.  그러나 어느덧 주체는 ‘저녁 능선’으로 옮겨져서 ‘능선’은 ‘깊은 종소리를 내’며 ‘마을에 퍼지’고 ‘밭을 에워싼다’.  ‘능선’은 ‘밤의 한가운데로 걸어 들어’가고, ‘적막’이 대신 남아 ‘길이며 지붕의 주름 따위를 몸서리치게 바라본다.’  주체->능선->적막으로 넘어갔던 시선은 다시 4연의 마지막 부분 ‘새들 산을 넘어간다’에서 다시 주체로 넘어와서 다시 ‘텅 빈 몸만이 말없이 능선을 바라’본다.  ‘텅 빈 몸’은 주체의 인식이 완전하지 못함을 드러내며, 대상에 드리운 자아의 그림자를 통해 주체를 채워나가려는 의지를 보여준다. 

  『카프카와 만나는 잠의 노래』를 읽으며 시인이 그 경계 너머에서 보려고 했던 것이 무엇인가를 넌지시 짐작해본다.  아직은 ‘인간’의 몸을 찾지 못한 그레고르가 사람이 되기 위해 필요했던 것은 무엇일까?  타자와의 대별성을 갖추기가 갈수록 어려워지는 현재 속에서 나만의 주체성을 획득하는 길은 기존의 언어체계로는 한계가 있어 보인다.  알맹이 없는 문자기록들로서는 현대인의 정신적 공허감을 메울 수 없기 때문이다.  ‘시’도 그러하다.  과거의 서정만으로는 단순히 감정의 발화 그 이상의 역할을 발휘하지 못할 것으로 보인다.  죽음과도 같은 적막한 평화인 ‘잠’의 제의를 거친 진정한 언어가 대안이 될 것이라는 시인의 고민이 시집 전반을 통해 전해진다.  시의 서정보다는 시의 ‘정신’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시인의 고민에서 ‘육체’를 갖고 있으나 ‘정신’을 잃고 살아갔던 ‘그레고르’에게 시인이 하고 싶었던 ‘말’을 짐작해본다.  ‘벌레’의 ‘말’이 아닌 ‘사람’의 ‘말’을 전달하고자 했던 시인의 정신적 노력의 결과물인 ‘말’이 다음 작품에서 어떠한 ‘소금의 포도’로 빛나는 결정을 맺었는지 새삼 궁금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