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창자료/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두이노의 비

<두이노의 비가>

묭롶 2009. 7. 1. 13:19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두이노의 비가」를 완전한 존재로서의 천사와 인간의 대결과 극복, 내지는 삶과 죽음을 아우르는 존재적 성찰의 기록으로 보는 시각이 대다수이다.  하지만 릴케가 장장 10년이라는 시간 속에서 녹여낸 이 역작을 읽으며 나는 그가 추구하고자 했던 존재적 시원의 뿌리가 동양의 ‘無’와 맞닿아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문명과 인종이 다름에도 인류의 정신세계를 구성하는 본질의 뿌리는 하나임을 이 작품을 통해 알 수 있었다. 

이 작품을 읽으며 릴케가 무소유와 고독의 삶 속에서 찾고자 했던, 그리고 말하고자 했던 것이 무엇인지를 찾아보고자 한다.


......그대는 아직 모르는가?  두 팔에서 공허를 떼어내어

우리가 호흡하는 공간을 향해 던져라.  아마도 새들은

이 넓어진 공간을 은밀히 날면서 감지하리라.

<제 1비가>

......슬프다, 우리는 그러한 것이기에.  세계 공간이, 우리가

녹아드는 세계 공간이 우리의 맛을 지니고 있는가?

<제 2비가>

......사랑하고 있는 여인이여, 내부 외에는 아무데도 세계가 없으리라.

우리의 생은 변용과 더불어 나아간다.  외부는 자꾸만 작아지고는 사라진다.

......시대 정신은 힘의 넓은 창고들을 짓지만, 그것들은 시대 정신이 모든 것에서

얻어내는 긴장된 충동처럼, 모습이 없다.

<제 7비가>


 동양에서 ‘無’를 향한 수련의 과정은 禪을 통해 ‘나’를 버림으로써 그 빈 공간에 자연과 대상을 채우고, 이들과 하나 된 소통을 통해 진정한 ‘頓悟’에 이르는 것을 목표로 한다.  ‘無’는 삶과 죽음은 물론 자연과 ‘나’를 포함한 모든 것들이 하나가 되는 궁극의 상태로서, 이를 위해 肉을 버리고 자신을 비워나가는 연마의 과정을 필요로 한다.  현재의 모습만으로는 ‘우리는 구경꾼’이 될 수밖에 없어서 ‘모든 것을 향해 있으면서도 결코 나아갈 수’가 없다.  미래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기존의 그릇되고 한정된 시야를 갖고선 반듯하게 일어서지 못하고 자꾸 ‘자신’마저 ‘무너’지기 때문이다.  대신 ‘아티카의 입상에 새겨진 사람 몸짓의 조심성’에서 자신의 ‘한계’를 알고 ‘스스로를 제어할 줄’ 알았던 그들의 ‘표정’을 닮아야 한다.  세계 공간에서 녹아내리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맛’을 지키기 위해서는 ‘자신의 뿌리를 넘어 엄청난 원초에 다다’라야 하기 때문이다.  원초적 본질의 인식을 통해 우리가 내부에서 ‘사랑하는 것’의 본질이 ‘미래의 것’이 아니라 ‘수 없이 들끓는’ 과거임을 직시한 후에야 자신의 ‘미래’를 만들어 나갈 수 있다. 


소리, 소리를.  내 마음이여 들어라, 일찍이 성자만이 듣던 소리를,

......저 젊어서 죽은 이들의 속삭임이 이제 그대에게 들려온다.

......그것들이 내게서 무엇을 바라는 것일까?

......인간 미래의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다는 것, 무한히 걱정

하던 손의 보호를 받던 사람이

이제는 그렇지 않다는 일, 자기 자신의 이름마저

부서진 장난감처럼 내버려야 한다는 일이.             <제 1비가>


  그렇다면 미래를 만들어 나가기 위해 자신의 내부를 인식한 후에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그는 내부의 공간에서 들려오는 자신만이 들을 수 있는 ‘일찍이 성자만이 듣던 소리를’ ‘내  마음이여 들어라’고 외친다.  그 소리를 듣기 위한 길은 보통의 ‘인간 미래’에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 삶이며 심지어는 ‘자기 자신의 이름마저 부서진 장난감처럼 내버려야’하는 고통의 길이다.  또한 그는 <반만 채워진 가면은 싫다, 차라리 인형이 좋다.  ~나는 그 몸통을 견디련다, - 제 4비가 >고 말하며 사회가 강요하는 인습에 시야가 얽매인 삶<어려서부터 각박하게 누구, 누구를 위해서인지, 한 번도 만족하는 일이 없는 의지에 의해 주물리는 유랑의 무리들은? - 제 5비가>을 거부한다.  위 구절에서 릴케가 평생 동안 무소유와 고독 속에서 방랑하며 보통 인간의 삶을 살 수 없었던 이유를 짐작하게 된다.


모든 눈으로 생물들은 열린 것을 본다.  우리들 눈만이 그것을 등진 것처럼 온전히

그 주위에, 그 자유로운 출구의 언저리에 고정되어 있다, 마치 함정처럼.

......우리는 아이의 눈을 아주 어려서부터 돌려놓고, 동물의 얼굴에 그리도 깊이 새겨진

열린 것, 죽음에서 해방된 것이 아니라, 뒤쪽으로 사물을 보도록 강요한다.

......하지만 아무도 그를 넘어가지는 못한다, 그리고 세계가 다시 돌아온다.

......우리의 그늘로 어두어지는 반사.  아니면 말없는 동물이 시선을 들어 조용히

우리를 통해서 사물을 본다.

......만일 우리의 것과 같은 의식이 우리를 향해 와서 우리와는 다른 방향으로 가는

의젓한 동물에게도 들어 있다면, 다른 방향으로 감으로 해서 우리의 방향도 돌려놓을 수

있으련만.

<제 8비가>


  릴케는 관습이 부여한 표면적 실제가 아닌 대상의 궁극적인 본질을 보기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비워갔다.  비움의 공간이 없이는 어떠한 대상도 내부의 공간에 스며들 수가 없고, 스며든 존재들을 인식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그렇게 비워진 내부의 공간 속에서 대상과의 합치를 통해 그 사물의 진정한 본질에 이르기 위한 노력의 산물이 그의 「사물시」이다.

 「두이노의 비가」는 「사물시」에서 한발 더 나아가 인간의 본질적인 물음에 대한 성찰을 담고 있다.  내부의 공간 속에서 사물을 관찰함으로써 그 본질에 다가갔던 그가 이제 사물을 넘어서 삶과 죽음이라는 인류의 모순된 감정을 대상으로 하게 된 것이다. 


......영원한 물줄기는 항상 두 세계를 뚫고 나이와는 상관없이 모두 다

휩쓸어가며 두 세계에서 이들의 소리를 압도하며 흐른다.

<제 1비가>

오 언젠가 죽어서, 끝없이 알고 싶다, 모든 별들을. 

어찌 그것들을, 어찌 그것들을 잊을 수 있으리!

<제 7비가>

......죽음을 보는 것은 우리들 뿐,

 ......우리들은 한번도, 단 하루만이라도 우리 앞에 순수한 공간을 갖지 못한다.

<제 8비가>

무명으로 나는 그대에게 가려고 마음먹었다, 멀리에서부터.

항상 그대 말이 옳았다, 그리고 그대의 성스러운 착상은 우리에게 친숙한 죽음이다.

<제 9비가>


  그에게 보통 사람들이 살아가는 세계는 자신의 주관적인 잣대에 의해 제도된 것만이 보이는(보려고 하는) 불완전한 모습들이다.  그들에게는 실재를 보고자하는 의욕도 열의도 없다.  <우리는 앞지르고 뒤늦게야 갑자기 바람의 힘을 빌어 휘몰리어 올라가서 무정한 연못 위에 떨어진다.  -제 4비가 中>  그저 부정하고 있는 죽음을 역설적이게도 앞당기는 삶을 살고 있다.

또한 인습에 의해 자신을 잃고 사는 삶은 그 자신의 불행으로 끝나지 않고, 그 사람이 살고 있는 세상의 바탕까지도 <이들의 영원한 뜀질로 인해 닳고닳은 자꾸만 얇아져 가는 양탄자 -제 5비가 中 >로 소모시킨다.  릴케는 그러한 사람들의 삶에 안타까움을 느꼈던 것 같다.  자연 속에서 동전의 양면과도 같은 삶과 죽음의 동시적 실재를 자각하며 자신의 현재 소명을 다하는 새<새의 미비한 안정성을 보아라, 출발할 때부터 거의 두 가지를 다 아는 새 - 제 8비가 中>, 무화과나무<무화과나무여,~때맞추어 여물기로 마음 먹은 열매 속에 너의 순수한 비밀을 담아넣는가 - 제 6비가 中 >, 분수<그것은 휘망찬 유희 중에 솟아오르는 물줄기에 앞서 미리 낙하를 예감하는 분수 -제 7비가 中>등과 다르게 인간은 타인의 삶을 질시하고 모방하며 <쉴 줄 모르는 지상의 길들을, 모조리 거짓으로 채색된 레이스, 꽃장식, 휘장과 인조 열매- 제 5비가 中> 등으로 덧없이 채우며 ‘꽃을 피운다고 자랑한다’.  하지만 이 모든 덧없는 삶의 모습들은 인간의 유한한 시간을 기준으로 내면의 시각으로 비춰볼 때 배반의 행위이다. 

  릴케는 이러한 불완전한 인간의 대별점에 완전한 존재로서 천사를 두고, 과연 인간이 가야할 방향이 무엇인가를 되묻는다.  하지만 그는 완전한 존재인 ‘천사’의 도움을 바라거나 그를 모방하려 하지 않는다.  불러도 오지 않을 천사를 기다리기 보다는 자기의 내면에서 들려오는 외침에 귀 기울이며 고독과 비움의 세계 속에서 진정한 자신의 외침을 구하라고 말한다. 


~만일 천사가 하나

갑자기 나를 가슴에 끌어안는다면 그 강한 존재에 눌려

나는 사라지리라.

......천사는 모두 무서운 존재.  <제 1비가>


이제 더 이상 사랑을 구하지 마라, 구하지는 마라, 잘못 성장해 버린 목소리여,

네 외침의 본연이 되어라,                                    

......지상을 찾고 있는데.  그대들 어린이들이여, 이 세상에서 한번 잡았던 것은 다른

모든 것에도 적용되리라.                                              <제 7비가 中>



  자신이 중심을 잡지 못한 채, 완전한 존재를 자신의 빈 공간에 채우기에는 ‘천사’는 수용 불가능한 존재이므로 오히려 자신을 잃어버릴 위험이 크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먼저 자신의 확립을 통해 자신의 비움을 채워나갈 수 있다면 그 채움의 경험(시)을 통해 거짓된 세상에 올바른 시야를 확보할 수 있으리라 믿고 이를 자신의 소명으로 받아들인다. 



......천사여, 그대에게 그것을 보여주리라, 여기 있다!  그대의 시선 속에 그것은 결국

살아남아 있다, 이제 드디어 올바른 몸을 세우고.  망해 가는 도시의, 또는 낯선 도시의

대사원에 있는 잿빛 원주들, 성문들, 스핑크스, 버티고 있는 지주들.

그것은 기적이 아니었던가?  오 경탄하라, 그것을 이룩한 것은 우리들이었으니,

<제 7비가>

사물에 대해 천사에게 말하라,......사물이 얼마나 행복할 수 있는가를 천사에게 보여주라,

<제 9비가>


  그는 인간이 갖는 불완전함에 좌절하기 보다는 이와 반대로 이 완전하지 않음을 하나의 가능성으로 인식했다.  완전한 존재인 천사는 보다 완전해지기 위한 그 어떠한 노력도 하지 않는다.  그 완벽함의 영원한 순환 재생산 속에서 그 자체로 완전무결하기 때문이다.  그는 신이 만든 가장 완벽한 피조물임에도 불구하고 창조의 능력은 갖지 못한 존재이다.  릴케는 이 부분에 주목한다.  천사와 달리 인간은 불완전하지만 그 불완전의 빈 공간 속에서 무수히 많은 창조를 이루어낼 수 있는 가능성의 존재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무한한 사자(死者)들이 우리에게 비유를 불러내어준다면, 보아라, 그들은 비어 있는

개암나무의 꽃차례(花序)를 가리키리라,

.....아니면 초봄에 검은 흙 위에 내리는 비를-그리고 우리, 솟아오르는 행복을 생각하는

우리는 감동을 느끼리라, 행복함이 내려떨어질 때

우리를 거의 당황하게 하는 감동을.

<제 10비가>


  「두이노의 비가」는 천사와 다르게 운명에 무릎 꿇으며 살아가는 인간의 삶을 비가의 형식을 빌려 노래하지만 실상은 희망의 노래이다.  인간의 현재 속에 삶과 죽음은 동시성으로 진행된다.  동시에 하나로 혼재하는 실재의 자신 중 그 일부분인 죽음만을 따로 떼어내어 부정한다는 것은 결국 자신의 실존 자체를 부정하는 행동이다.  모든 것을 가진 자가 채워짐의 기쁨을 알지 못하는 것처럼, 죽음이 없는 삶은 의미를 갖지 못한다.  오히려 죽음을 생명의 또 다른 부분으로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각성을 통해 삶의 시간들은 보다 축복받은 뜻 깊은 시간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릴케의 오랜 시간 동안의 존재적 성찰의 산물이 ‘희망’이었음에도 ‘비가’의 형식을 이용했던 까닭은, 보통 사람들이 갖는 삶과 죽음에 대한 모순된 인식에서 기인한 것으로 보여 진다.  자신의 삶과 함께 하는 죽음을 인식함으로써 보다 뜻 깊어지는 삶처럼, ‘비가’의 형식 속에서 사람들이 자신의 잘못된 기존의 시야를 깨닫고 이 자각의 계기를 발판으로 자신의 ‘미래’를 세워나가기를 바랐던 그의 희망이 이 작품 속에 살아 숨 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