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창자료/횔던린의 <빵과 포도주>

<빵과 포도주>

묭롶 2009. 7. 1. 13:18

이 작품에서 횔덜린이 이상향으로 삼은 고대희랍 세계는 모든 것이 하나의 공동체를 형성하여 조화를 이룬 곳이었다.  과거 그곳에서는 신, 자연, 인간이 모두 하나였다.  신은 언제나 인간의 곁에 머물렀고, 인간은 그러한 신에게 겸손한 경배와 기쁨의 찬미를 바쳤다.  자연은 신의 은총을 인간에게 전달하여 그 속에서 인간이 신성을 자각하게 만들었고, 고대 희랍인들은 자연의 힘을 빌려 후대에게 문화적 유산을 전승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시인이 보는 현재는 신과의 소통이 끊기고, 인간들은 각자 개별화되어 서로 간에도 반목하는 어둠의 세계, 즉 밤의 세계이다.  하지만 횔덜린은 밤이 지나고 나면 아침이 찾아오는 것처럼 지금은 비록 빛이 없는 암흑이지만, 잠들지 않고 깨어서 맑은 정신으로 새벽을 기다리는 자가 바로 시인이라고 말한다.  시인은 신과 인간의 중간 매개자와 같은 존재이므로, 어둠 속에서 신이 남겨 놓은 희망의 약속들을 지켜내며 ‘시’를 통해 암흑 속에 잠들어버린 사람들을 깨워야 한다는 것이다.  그럼 구체적으로 작품에서 깨어있는 자로서의 시인의 소명과 시인이 복원해야 한다고 믿는 낮의 세계가 어떻게 표현되고 있는지를 살펴보자.  (시 전문을 옮기기에는 리포트 분량을 훨씬 넘을 것 같아, 중요부분만을 발췌하였다.)


 <빵과 포도주 1연>

도시 주위는 쉬고 있다.  횃불로 장식한 환한 빛

골목길은 고요해지고, ~

~분주하던 시장에는 포도송이와 꽃들

비워져 있고,

~향기 퍼지는 정원 근처의 분수, 항상 솟아오르며 신선한 소리를 낸다.

~야경꾼은 몇 시인지 생각하며 큰 소리로 시각을 알린다.

보라!  우리의 지상에 드리운 그림자의 상을, 달 또한

비밀리에 나타난다.  열광적인 여인, 밤이 별들을 가득

데리고, 아마 우리를 전혀 개의치 않은 듯 다가온다.

~사람들 사이 휩쓸린 낯선 여인은 슬프게

장려하게 산정 위를 향해 환한 빛을 비춰준다.


   1연에서 가장 눈에 띠는 존재는 ‘야경꾼’이다.  그는 남들이 잠들어 있는 밤에도 홀로 깨어 시간을 사람들에게 알림으로써 다가올 아침을 준비한다는 점에서 ‘야경꾼’은 ‘시인’을 상징한다.  또한 ‘낯선 여인’도 시인을 뜻하는 데, 이 ‘낯선 여인’은 밤의 세계에서 사람들 속에 휩쓸려 상처받으며 살아가는 시인 자신의 모습이기도 하다.  사람들은 신성을 잃고도 아무렇지 않게 살아갈 수 있지만 시인은 예민한 감수성으로 어둠에 미혹된 ‘산정’에 ‘환한 빛’을 비춘다.  ‘횃불로 장식한 환한 빛(신성)’의 골목길은 고요해지고 과거 신, 그리고 자연과 인간이 하나였던 축제의 증거인 ‘포도송이와 꽃들’은 비워져 있지만, 그럼에도 사람들이 의식하지 못했을 뿐 언제나 신은 인간과 함께 라는 사실을 보는 사람이 없음에도 ‘향기 퍼지는 정원 근처의 분수’는 ‘항상 솟아오르며 신선한 소리를’내면서 인간에게 돌아오라고 손짓한다.  ‘분수’ 외에도 어둠 속에서의 희망은 ‘별’, ‘달’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특이한 점은 낮의 세계와 대조를 이루는 밤의 세계가 부정을 뜻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 예를 ‘밤이 별들을 가득 데리고’라는 부분에서 찾아볼 수 있다.  새벽의 미명이 오면 사라질 밤이 절대적인 어둠으로 인간들을 가둔 것이 아니라, ‘별’들을 데리고 와서 사람들의 가슴에 ‘빛’에 대한 기억(낮의 세계)을 전해준다는 점에서 어둠이 이미 아침을 준비하고 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빵과 포도주 2연>

숭고하디 숭고한 밤의 호의는 놀랍기만 하다.  ~

~세상을, 인간의 갈구하는 영혼을 생동하게 해준다.

설령 현자라 해도 밤이 무얼 준비하는지 알지 못하리라,

~마치 잠들지 않으려는 연인들처럼

밤새도록 깨어 있을 때 끝없이 흐르는 말,


  2연에서는 최상의 신이 인간을 위해 준비한 배려가 밤이라는 사실을, 밤은 ‘숭고하디 숭고한 호의’를 베풀어 ‘인간의 갈구하는 영혼을 생동하게 해준다.’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렇기에 밤은 인간의 신성을 일깨워서 낮의 세계로 가기 위한 하나의 시련이요, 과정이다. 시인은 이를 위해 ‘잠들지 않으려는 연인들처럼’ ‘밤새도록 깨어 있을 때 끝없이 흐르는 말(시)’을 사람들에게 전하는 것이리라!


<빵과 포도주 3연>

~신들의 찬란한 불꽃은 밤이든 낮이든 간에 돌출하려고

추동한다.  그러니 오라!  ~

~아주 멀리 있더라도, 어떤 고유한 것을 찾도록 하자.

~그렇기에 이스트모스로 오라!  열린 바다의 소리 나는 곳으로,

델피의 바위가 찬란히 빛을 반사하는 그곳, 파르나스로,

거기, 올림프스의 땅으로, 거기, 키테론의 산정 위를 향하

여,

그 아래에는 가문비나무와 포도나무가 자라고,~

다가오는 신은 바로 그리로 와서, 뒤를 가리키고 있다.


  3연에서는 우리가 되돌아가야할 세계가 어디이며, 우리가 되찾아야 할 것이 무엇인가를 말하고 있다.  ‘신들은’ 이미 ‘찬란한 불꽃’을 피우며 ‘밤이든 낮이든’ 상관하지 않고 인간들을 맞을 준비가 되어 있으니, 이제 우리는 ‘이스트모스(열린 바다의 소리 나는 곳)’로 가기 위해 ‘어떤 고유한 것’을 되찾기만 하면 된다는 것이다.  3연에서 ‘가문비나무와 포도나무’는 디오니소스를 상징한다.  디오니소스는 모든 것(신, 자연, 인간)이 하나였던 희랍세계에 인간과 함께 축제를 즐겼던 신으로 이 즐거웠던 시절의 기억들을 상징하는 것이 ‘포도주’라면 ‘가문비나무’와 ‘포도나무’는 ‘포도주’가 인간에게 주어진 희망의 증거임을 드러낸다.


<빵과 포도주 4연>


~축제의 식장이여!  바닥은 바다, 식탁들은 산이어라.

오래전에 참으로 어떤 유일한 용도를 위해 축조되었구나!

그러나 왕관은 어디 있는가? 사원은? 넥타로 가득 채워진

그릇들은?  신들을 즐겁게 해주던 노래는 어디 있는가?

멀리까지 적중시키던 신탁은 어디서 빛을 발하고 있는가?

~위대하고 재빠른 섭리는 어디서 울릴까?~

~공기 속에서 천둥치며, 우리의 시야 속으로 엄습하게 될

까?

~왜냐면 천국의 신들은 그렇게 도래하고, 그날은 깊은

충격을 주며, 그림자로부터 인간에게 하강할 테니.


  과거 모든 것이 하나였던 희랍 시대에 온 세상은 축제의 장이었다.  그랬기에 축제를 치르는 바닥은 ‘바다’일 수 있었고, 식탁은 ‘산’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이 모든 것들은 ‘어떤 유일한 용도’를 위해 하나가 된 것들이었고, ‘어떤 유일한 용도’가 신들에 대한 경배와 축제를 통한 영감의 고취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현재 신의 은총을 찬미하던 축제는 사라지고 인간은 신의 존재를 잊고 ‘그림자’진 삶에 침잠되어, 신들이 도래하기 위해서는 ‘천둥’과 ‘깊은 충격’이 필요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빵과 포도주 5연>


신들은 처음에는 무감각하게 찾아온다.  그들을 맞는 자는

아이들뿐, ~

인간은 이를 회피하니, 선물을 지닌 채 접근하는 그들의

이름이 무엇인가를, 반신이라도 감히 발설하지 않는다.

허나 그들의 용기는 거대하고, 반신의 마음을 가득 채우는

그들의 기쁨, 하지만 그는 재물의 필요성을 아지 못하고,

~축복의 손으로 어리석게

선량하게 건드리는 세속적인 것들만을 성스럽게 여길 뿐.

~이미 오래전에 하나이자 모든 것으로 명명되었던 그분들의

용모를, 겉으로 드러난 모습을 바라보고,~

~인간은 그러하다.  재물이 거기 있고, 신은 선물로써 그를

직접 보살피지만, 인간은 이를 알지도, 보지도 못한다.

~허나 이제는 가장 사랑스러운 것을

명명하고, 이제 대한 언어가 마치 꽃처럼 형성되리라.


  5연에서는 세속에 물든 사람들이 자각하지 못하는 사이, 밤의 세계로 내려오는 신을 맞이하는 것은 때 묻지 않은 ‘아이들뿐’이라고 말한다.  이미 세속의 어둠에 현혹되어 사람들은 밝은 빛을 직시할 수 있는 능력을 잃어버린 듯이 보인다.  ‘신은 선물로써 그를 직접 보살피지만, 이를 알지도, 보지도’ 못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그들에게 빛을 전하기 위해 ‘반신’은 ‘재물의 필요성을 알지 못하고’,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 ‘어리석게’ 여겨지지만 그는 ‘오래전에 하나이자 모든 것으로 명명되었던 그분들의 용모를’ 알아보고 맞이하기 위해 준비를 게을리 할 수 없는 것이다.   ‘가장 사랑스러운 것을 명명’한다는 것은 합일의 기쁨에 충만한 시인의 영감이 ‘시’로 발화되는 것을 의미한다.  

<빵과 포도주 6연>


이제 인간은 진지하게 축복의 신들을 공경하려고 생각한다,

~빛은 높은 분들의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을 보아서는 안 된다,

~제반 민족들은 훌륭한 질서 속에서 몸을 일으켜서,

합심하여, 아름다운 사원 및 도시들을 굳건하고 고결하게

건설하며, 

~허나 어디 있는가?  잘 알려진 것, 축제의 왕관은 어디서

번창하는가?  테베와 아테네는 시들고,

~왜 신은 이전처럼 남자의 이마에 표시를 남기지 않고,

옛날처럼 당사자들에게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않을까?

아니, 는 직접 찾아와, 인간의 형상을 받아들여,

우리를 달래며, 천국의 축제를 완성시키고 끝내었다. 


 6연의 첫 번째 부분은 완성된, 신들의 날을 묘사한다.  그러나 아직 그 날은 도래하지 않았고 사람들은 신과 더 멀어지기만 해서 신은 항상 은총을 베풀지만, 그 은총조차도 인간에게 영향을 끼치지 못하게 되었다.  그리스도는 인간과 신의 중간에서 성찬식(빵과 포도주)을 통해 관계회복의 희망을 전달한다. 


<빵과 포도주 7연>


허나 친구야!  우린 너무 늦게 왔어.  신들은 살아 계시나,

우리의 머리 위 저 세상 높이 머물고 있을 뿐이야.

거기서 그들은 끝없이 영향 끼치고, 우리를 아낄수록

더욱더 우리가 잘 살고 있는지, 개의치 않는 것 같아.

왜냐면 어떤 나약한 그릇은 그들을 항상 담지 못하고,

~궁핍함은 밤을 강화시키지,

~더욱이 그들은 천둥치며 온다.  그러는 동안 나는 가끔

친구 없이 혼자 있고, ~

~그렇게 학수고대하며, 무엇을 행하고, 무엇을 말할지를,

궁핍한 시대에 시인들은 왜 존재하는가를 나는 모른다.

허나 그대는 말한다, 시인은 마치 성스러운 밤에 여러 나라를

배회하는, 포도주 신의 성스러운 사제들과 같다고.


 갈수록 신은 인간세상과 멀어지는 듯하고, 인간세계는 신의 뜻(신성)을 받아들이기에는 너무 약해진(악해진) 존재이기에 영혼의 궁핍함에서 오는 밤의 세계는 더욱 어둠이 깊어질 뿐이다.  7연에서 횔덜린은 궁핍한 시대에 시인들은 ‘포도주 신의 성스러운 사제’들과 마찬가지로 사람들에게 새롭고 더 나은 삶을 일깨우고, 고결한 방향을 제시하는 자라고 말한다.




<빵과 포도주 8연>


우리에겐 오래전처럼 여겨지나, 사실은 얼마 전에

인간 삶에 축복을 내리던 그들 모두는 승천하고 말았다.

~최근에 어느 조용한 정령이 출현하여, 복된 삶으로 우리를

위로하며, 낮의 마지막 시간을 공언한 뒤 사라졌을 때,

천상의 합창은 언젠가 그가 계셨고, 다시 도래하리라는

뜻의 포시로서 우리에게 몇 가지 선물을 남겨주셨다,

~빵은 지상의 결실이나, 빛에 의해 축복을 받아야 하고,

천둥을 내리는 신으로부터 포도주의 기쁨이 비롯하리라.


  얼마 전에 신은 ‘그들 모두’ 인간 세계를 떠나 승천하고 말았지만, 인간들에게 다시 도래하리라는 뜻의 표시로 ‘몇 가지 선물’을 남겨 두었다.  바로 빵과 포도주이다.  여기에서 신의 선물인 ‘빵’과 ‘포도주’는 각각 자연의 산물과 천상의 산물이라는 점에서 과거 모든 것이 하나를 이뤘던 이상적 희랍세계를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자연 속에서 천상의 빛으로 영글은 포도는 디오니소스의 축복을 상징하며, 빵은 빛(신)의 축복 속에 자연에서 생산되어진 것이기에 이를 먹고 마시는 것(성찬식)은 곧 몸을 통해 그 모두가 하나를 이룸으로써 신의 축복을 느끼게 해주는 산물이다.  

  

<빵과 포도주 9연>


~그가 사랑하는, 마치 언제나 푸른 가문비나무의 잎,

항시 즐겁게, 스스로 선택한, 송악으로 만든 화환처럼.

왜냐면 포도주 신이 머물며, 떠나버린 신들의

흔적마저 사악한 자들의 암흑 아래로 보내버리기에.

~시험한 자는 믿어라!  일이 수 없이 발생하나, 아무것도

작용하지 않는다, 우리에겐 심장이 없으니, 그림자야,

~그러나 가장 위대한 신의 아들, 어느 시리아 사람

횃불을 든 자로서 어느새 우리, 그림자들에게 내려온다.

축복받은 현인은 이를 본다, 갇혀 있는 영혼에서 어떤

미소가 빛나고, 에 의해 그들의 눈길이 녹아내린다.


  7연에서 모든 신들이 승천하고 난 이후에도 ‘포도주 신’은 인간에 대한 축복을 그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에겐 심장’이 없기에 그림자 속에 갇혀서 현재를 살아갈 뿐이다.  그러나  시인은 1연에서 꺼져버린 ‘횃불’을 ‘어느 시리아 사람(’신의 아들‘)’이 들고 와서 그 환한 빛으로 사람들 사이에 드리운 그림자를 걷고서 갇혀 있는 영혼을 해방할 것을 믿는다. 


  ‘빵과 포도주’를 읽으며 그가 그토록 험난했던 절망의 세월을 견뎌낼 수(포기할 수 없었던)있었던 근원이 무엇인지, 그에게 ‘신성’이란 어떤 존재인지를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었다.  또한 이를 통해 그가 사제직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이유에 대해서도 짐작하게 되었다.  <경건주의> 사상이 지배적이었던 뷔르템베르크 공국에서 태어나 목사가 되기를 바라는 어머니의 바람을 이루기 위해서 그에게 필요했던 것은 흔들림 없는 신앙의 소명이었다.  그러나 학창시절 프랑스 혁명으로부터 기인한 기존 사상체계의 혼란은 그에게 주입되는 절대적인 신앙에서 멀어지게 했고, 그의 자유로운 정신은 기존 제도권의 소명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했다.  그에게 있어 신앙은 목사과정에서 강요되는 수직적인 관계가 아닌, 신과 인간, 자연이 하나가 되는 ‘신성’에 있었다.  그 ‘신성’을 통해서만 인간은 암흑과 같은 현재를 벗어나 과거의 이상적 세계를 회복할 수 있다고 믿었고, 그는 그가 만나는 모든 사물과 자연 속에서 그러한 ‘신성’을 찾아내고 이를 ‘시’를 통해 발화했던 것이다.  하지만 계속되는 절망은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발화(시)를 통한 소통을 불가능하게 만들었고, ‘신성’의 불꽃은 횔덜린의 가슴 속에 피어올라 가장 치열한 삶의 순간(스위스에서 해임되어 고향으로 오는 여정) 속에서 그 정염의 불꽃(빵과 포도주)을 태우기에 이른다.  이후 횔덜린에게 찾아 온 정신이상은 아마도 그의 내부에 불타오르는 ‘신성’이 그의 정신까지도 태웠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짐작된다.  그렇기에 시인의 소명을 위해 한 평생(자신의 인생)을 모두 걸고 자신을 연료삼아 불태운 횔덜린의 삶을 후대들은 ‘시’를 위해 산화해갔다고 표현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인간의 삶으로서는 불행했지만 시는 현실을 정신의 극점까지 부딪치는 지점에서 발화된다는 사실을  ‘빵과 포도주’를 통해 우리에게 증언하는 횔덜린을 보며 현재의 정신사적 위기와 문학의 위기 속에서 ‘시’의 위치와 소명을 다시금 깨닫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