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창자료/시론(1)

왜 시를 읽고 쓰는가?

묭롶 2008. 12. 23. 16:56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현장으로서 현대의 특질을 크게 불연속성의 시대라고

볼 수 있다.  불연속성의 시대란, 물질문명의 과도한 발달과 산업화의 촉진, 대도시화의

추세로 인해 자아와 세계, 인간과 자연이 연속되지 못하고 끊어져 버린 모습을 말한다. 

그렇기에 불연속성의 시대를 사는 우리에게 가장 긴절한 명제는 자아와 세계,

정신과 물질 사이의 등가화(equalization)또는 자아의 주체화(identfication)를 획득하는 것이다.

   현재의 과도한 발달은 인간에게 있어 정신문화의 불안감을 고조시켜왔다.  값싼

대중문화와 상업자본의 폭력 아래 진정한 문학, 순수한 인간탐구의 문학은 위기에 직면했고,

이는 곧바로 인간정신의 위기가 아닐 수 없다.  이 점에서 오늘날 문학다운 문학, 참문학

정신의 회복과 확립이야말로 현대가 처한 불연속성과 불확정성에 맞서 인간성을 수호하고

인간의 정신가치를 고양시킬 수 있는 소중한 관건이 아닐 수 없겠다.  그렇다면 이러한

참문학 정신을 오늘에 회복할 수 있는 길은 어디에 있는가?  그것은 바로 문학의 근본정신을

회복하는 일이고, 그것을 오늘의 현실에 되살려 가는 일일 것이다.  시에 있어서는

그 핵심으로서 창조정신을 심화해 가는 일이 아닐 수 없다.  시정신은 창조정신이며, 그러기에

반역의 정신이고, 또한 자유의 정신이고 주체의 정신인 것이다.  그래서 참 시인의 길은

권력이나 금력, 명예를 얻는 길과는 거리가 멀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참된 시란 무엇이고,

참 시인의 길이란 또 무엇인가?  그것은 시의 회복을 통한 인간성의 회복을 의미한다고 하겠다. 

시를 쓰는 가장 원초적인 동기는 자아발견의 노력에서 비롯된다.  또한 시는 자기극복의

과정을 보여 주는 일이다.  아울러 시는 자아실현의 길로서의 의미를 지닌다고 하겠다. 

그리고 시는 궁극적인 면에서 자기구원의 길을 의미한다.  그렇지만 시는 개인의 차원에

머물지 않는다.  원천적으로 삶은 ‘나’에게서 시작되어 무수한 ‘너’를 거쳐 다시 ‘나’로

회귀하는 근원회귀의 속성을 지닌다.  자아발견에서 시작되어 자기극복, 자아실현,

자기구원으로 마무리되는 속성을 지닌다는 뜻이다.  그렇지만 시는 공적인 면에서는

더불어 사는 삶, 함께 살아가는 사회적 삶, 역사적 삶을 반영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점에서 시는 개인구원의 길이지만 넓게는 사회, 역사를 향해 열린 총체적인 인간구원의

길이기도 한 것이다.  아울러 시는 그러한 인간정신의 높은 움직임을 형상화하는 것이다. 

그러기에 숙명적인 면에서 언어와의 싸움을 전제로 한다.  결국 시는 민족어 완성을 향한

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기에 시는 민족어의 완성을 지향해 나아감으로써 민족정서와

혼의 형식을 탐구하고 완성해 나아가는 것을 궁극적인 이상으로 한다. 

  각박하고 반인간적인 사건과 사고 속에서 살고 있는 우리에게 시인의 역할은 무엇일까? 

그건 우리들 지친 마음에 참된 시심(詩心)을 일러주는 것이다.  참된 인간의 길은 시심을

간직하는 길, 진짜 시인의 길을 걸어가려는 데서 그 바람직한 모습을 찾아볼 수 있다. 

윤동주의 「서시」에 비추어 봤을 때 참된 시인은 첫째 그것은 부끄러움을 아는 사람이다. 

둘째로 그것은 괴로움을 아는 마음이다.  셋째로 시인의 길은 ‘별을 노래하는 마음‘을

간직하는 일이다.  별을 향한 갈망은 곧 끊임없이 진실의 길, 착함의 길, 아름다움의 길을

찾아가고자 하는 갈망의 삶, 형성의 삶을 지향한다는 뜻이다.  이러한 삶을 지향해 나아가는

과정에서의 삶은 어떠한 모습일까?  그것은 한마디로 나의 운명을 긍정하고 사랑하는 길일

것이다.  이는 바로 인간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노력이자 최대의 행복일 것이다.  그러기에

나의 운명의 사랑한다는 것은 곧 다른 모든 생명체의 운명까지도 배려하고 사랑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기에 진정한 문학의 회복과 참시정신의 확립은 바로 문명의 위기,

인간상실의 비극을 극복해나가는 길이기도 한다. 

  시어와 민족어 완성의 길

  시와 언어는 변증법적 관계에 놓인다.  시는 ‘무엇을’에 해당하는 주제/내용과 ‘어떻게’에

해당하는 표현/형식의 상관관계로 형성되기 때문이다.  이렇듯 언어는 시를 이루는 매개체이자

방법론이고 때로는 그 목적에 해당한다.  그런데 우리의 국어는 오랫동안 민족의 얼을 담는

그릇으로서의 말과 그 말을 담는 그릇으로서의 글이 서로 분리되어 사용되어 왔다. 

삼국시대에서부터 조선조 초기까지 말은 그대로인 채 글은 한자 및 이두를 사용해 옴으로써

언문불일치를 보여 온 것이다.  그러나 훈민정음 창제 이후에도 한글은 비공식문자로 인식되고

사용되어 여전히 말과 글의 괴리현상을 보여주었다.  한글로서의 국어는 개화기에 이르러

언문일치운동이 전개되면서 민족의 어문생활의 중심부로 이동하게 되었다.  하지만 한글이

민족생활의 중심으로 육박하게 된 시기는 일제강점기라 할 수 있다.  이 시기에 국어는 다행히도

선각적인 국어학자와 문인들, 특히 시인들의 노력에 의하여 생존적인 차원에서 생활어의

차원으로 다시 예술어의 차원으로 상승해 가기 시작하였다.  이후 한글은 8․15광복과 더불어

민족어로서 공식어가 되었다. 

  일제 강점기 36년 동안 일본 제국주의의 수탈과 폭압은 우리 민족에게 주권과 생존권은 물론

민족혼마저도 멸실할 위기 국면으로 치닫게 하였다.  민족어로서의 우리말과 글은 국토와

하나의 등가물로서의 의미를 지닌다.  바로 여기에서 일제하 우리 시인들이 전개한 한글의

문학적 훈련이 지니는 참된 민족사적, 문화사적 의미가 드러난다.  일제하 시인들의 우리

시 쓰기 작업이란 바로 우리말과 글을 지킴으로써 민족혼과 역사를 살려내기 위한 가열한

민족운동이자 독립운동의 의미를 지니는 것이 분명하다.  시인의 궁극적인 사명이란 바로

민족어의 완성을 지향해 감으로써 민족혼을 지키고 민족의 정서와 민족의 삶을 고양시켜

나가야만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일제 강점 시기 시인들의 민족어 완성의 노력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먼저 소월과 만해의 시들은 우리말에 담겨 있는 혼결과 숨결은 물론 살결과

섬세한 무늬결까지도 다양하고 깊이 있게 확대하고 심화함으로써 우리말의 일상성을

예술성의 차원으로 고양시켜 가고 있다.  이러한 민족어 완성의 노력은 30년대에도 지속되는데

영랑 김윤식과 백석의 시편들이다.  먼저 영랑 김윤식은 ‘ㄴ/ㄹ/ㅁ/ㅇ’ 등 유성음과 유음을

조직적으로 활용함으로써 우리말의 音相을 최대한 살려내려 노력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두운과 요운, 각운 등을 체계적으로 조직하여 우리말의 문학적 가능성을 최대한 확장하고

있다.  백석의 시편에서 다양하고 개성적으로 활용된 방언 및 토속어, 고어의 적극 활용 및

형용사, 부사의 개성적인 쓰임새는 주변언어의 중심부화로서 평등정신의 고양이라는

측면에서뿐만 아니라 민족어의 양과 질을 확대하고 심화하는 작업이라는 점에서 민중적

삶과 민족적 주체성의 고양에도 크게 이비지 한 것으로 풀이된다. 

  8․15 광복은 국가적인 면에서 주권의 회복과 함께 역사적 의미에서 민족사의 광복 및

문화사적인 면에서 모국어의 회복이라는 소중한 의미를 지니게 된다.  문학사적인 측면에서

해방은 1920~30년대 이후 지하운동으로 전개되었던 계급주의 문학운동이 다시 위세를

떨치기 시작함으로써 이른바 순수문학으로서 민족주의 문학과 정치문학으로서 계급주의

문학의 대립 양상을 보여 주기 시작하였다.  먼저 이 시기는 일제 강점기에 간행되지 못했던

시집들이 출간되면서 민족적 주체성과 정통성을 회복하는 국면에 접어들게 된다.  특히,

조지훈 등 3가 시인의 ‘청록파’와 서정주 등의 ‘생명파’는 6․25 동란 후 분단시대에 있어,

남쪽 문학의 주류를 이루면서 이 땅에 이른바 순수문학 또는 영원주의 문학을 확대 발전

시키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무엇보다도 시어 면에서 볼 때 이들의 민족어 완성을 위한

노력은 값진 것이 아닐 수 없다.  특히 미당 서정주의 우리말 발굴과 확대 및 심화 작업은

그를 현대시사 최대 인물의 한 사람으로 꼽는 데 손색이 없음을 분명히 해 준다.  미당의

시는 수많은 고유어 및 고어를 되살리는 한편 방언을 적극 활용하고 개인시어를 다양하게

만들어냄으로써 우리말의 예술적 가치를 크게 고양시켰다. 

  70~80년대는 민족문학시대라고 일컬어진다.  민족이 처한 현실문제를 탐구하면서 진정한

민족해방, 민중해방, 인간해방의 길로서 자유민주주의의 정착과 올바른 평등의 구현을

지향하는 문학의 실천운동이 가열차게 전개되었기 때문이다.  김지하의 대두는 70~80년대

민족문학운동의 기폭제에 해당한다.  그의 「오적」을 비롯한 담시들은 ‘민중적 내용의

민족적 양식화’로서 민족문학의 전통을 오늘에 되살리고자 하는 노력의 반영이었다. 

김지하의 시편들에는 사전이나 생활 속에 잠자고 있던 고유어, 방언은 물론 은어, 비어,

그리고 개인조어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시어들이 새롭게 숨을 내쉬고 있다.  가히 민족어,

민중어의 보물창고라고 할 만큼 다양하고 섬세하게 활용되고 있는 것이다.  이는 어느

면에서 아어주의(雅語主義)에 기울어져 있던 50~60년대의 시어로부터 벗어나 투박한

민족적 삶, 민중적 언어의 영역으로 확대 심화돼 가고 있는 것이다.  또한 문학이

문학에만 머물지 않고 사회 역사적 지평으로 진입해 들어감을 볼 수 있다.  이 점에서

김지하의 정치적 상상력은 문학적 상상력 또는 예술적 상상력과 날카롭고 섬세하게

합됨으로써 우리 시가 정치와 사랑, 일과 놀이, 실천과 관념, 내용과 형식이라는

양면성을 함께 통합해 나아갈 수 있는 하나의 기틀을 마련해 준 것으로 이해된다. 

80년대에 들어서서 시어면에서 괄목할 만한 업적은 고은의 연작시 「만인보」와

대하서사시「백두산」으로 제출되었다.  「백두산」에는 고어, 고유어, 토속어는

물론 방언 등이 셀 수 없이 많이 등장하며, 특히 조어와 개인시어가 유독 많이

쓰이고 있어 주목된다.  그래서 시집 전체가 하나의 민족어 사전, 또는 민중어

사전으로서의 모습을 지니고 있다고 하겠다. 

  일제 강점기 하에서도 민족어의 완성을 위해 노력했던 서정주, 박목월, 조지훈,

박두진 등의 시인들을 비롯하여 오늘날에도 많은 시인들이 민족어의 완성을 위해

진력하고 있는 것은 값진 일이 아닐 수 없다.  그것은 시인의 사명이자 운명적인

과제이다.  하이데거의 말대로 민족어의 완성을 지향하는 일이야말로 시인의 근본

사명이자 근원적 존재의미가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시인이란 불행한 표정성을

전광석화처럼 읽어내서 아름답고 깊이 있는 민족어로서 갈고 닦아 나아가야 하는

절망의 도형수이자 언어의 결투사로서 소명을 지니는 프로메테우스들이기 때문이다. 

  한국 현대시의 사회사

  17~18세기 영정조시대의 맹아기를 배경으로 하여 개항시를 거쳐 20세기 초 최남선과

이인직에서 시작된 이 땅의 신문학은 일제 강점기의 오랜 수난과 분단시대의 시련을

겪으면서 20세기의 세기말을 통과하여 현재까지 이어져 왔다.  20세기 초에 신문학이

유입되었지만 이 땅의 본격적인 현대문학의 전개는 3․1운동으로부터 시작된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3․1운동은 비록 실패로 끝났지만, 이에 따른 일제의 회유책은 언론

․출판에 대한 완화로 인해 문화면에 약간의 활력이 불어넣어지게 되었고 일본 유학생

층을 중심으로 한 전문 문인들이 등장하면서 비로소 한국문단이 형성하게 된 것이다. 

 이 무렵 시에서는 김억에 의해 프랑스 상징주의시 등이 『태서문예신보』 및 최초의

현대번역시집 『오뇌의 무도』등을 통해 번역․소개되었고, 주요한, 황석우, 박종화,

이상화 등이 새로운 시와 현대시조를 개척하였다.  이들은 계몽주의적인 시로부터

예술적인 시, 또는 개인의식과 서정성을 강조하는 내용의 시를 쓰면서 초기시단 형성을

주도하였다.  특히 이 시기에 김소월과 한용운, 이상화와 정지용은 시에 현대적인 호흡과

맥박을 불어넣음으로써 현대시의 한 전범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문학사적 의미를 지닌다. 

1920년대 중반 KAPF의 결정은 현대문학에 또 하나의 충격파를 형성한다.  박영희,

김팔봉 등 ‘백조’동인이 중심이 된 초기 프로문학은 빈궁문학을 전개하다가 차츰 목적

의식의 문학, 즉 사회주의 선동선전문학으로 이행해 가게 된다.  이와 같이 1920년대

문학은 민족주의 문학과 계급주의 문학의 대립과 갈등 속에서 형성되고 전개됨으로써

이후 이 땅의 문학이 대항논리 또는 투쟁논리적인 측면을 지니게 된 중요 요인으로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1930년대는 일제의 식민지 수탈이 극심해져서 문학적 환경도 극도로 위축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카프 해체(1935)를 전후하여 현실주의 문학이 급격히 와해되고 농촌 계몽

운동 등 소극적인 저항운동과 자연․생명운동․모더니즘운동 등 예술성 위주 또는 순수

문학 탐구로 경사하게 되었다. 

  시 부문에 있어 30년대는 하나의 전성시대를 이룬다.  김영랑․박용철이 『시문학』

(1930) 등을 발간하면서 순수서정시 운동을 전개하고 우리말의 발굴과 조탁에 힘쓴

것은 주목할 만한 일이다.  아울러 이상과 김광균 등이 중심이 된 모더니즘 시운동은

우리 시에 현대적인 호흡과 맥박을 불어넣은 데 크게 기여하였다.  또한 30년대 중반

간행된 『시인부락』동인의 서정주․김달진․오장환이 있었다.  유치환의 생명파운동,

이리고 이용악․백석․윤곤강․안용만 등의 현실주의에 바탕을 둔 서정시운동, 또한

김광섭․김현승․신석초․신석정․장만영 등 개성적인 서정시 탐구 등도 의미 있는

일이라고 하겠다.  아울러 1939년 『문장』등으로 등장한 박목월․박두진․조지훈,

그리고 박남수 등도 전원서정을 기반으로 하여 깊이 있는 서정시의 세계를 보여

주었다.  특히 이육사와 윤동주는 이국의 감옥에서 순국하기까지 인간의 원형적 서정을

바탕으로 내면적인 저항의식을 형상화함으로써 어두운 시대 지식인의 양심과 시인의

위의를 돋보이게 해주었다.  이렇게 30~40년대는 이 땅에서 현대문학이 본격적으로

형성되고 전개되기 시작한 시기이며, 특히 일제 강점 하에서 모국어의 문학적 훈련을

통해 민족혼의 살아 있음과 민족정신의 아름다움을 확실하게 증거 해준 점에서 문학사적

의미를 지닌다.

  해방 이후 문학의 전개는 분단시대라는 상황을 대전제로 하여 대략 10년 주기로 하여

일어나는 역사적 사건과 대응관계를 이루면서 전개되는 특징을 지닌다. 

  해방기의 좌우문학은 두 가지가 다 ‘민족문학의 건설’을 과제로 내세웠다.  그러나 좌파의

경우는 계급주의 노선의 민족문학이 핵심으로서 정치적인 선전․선동을 주로 한 정치문학의

성향을 지니게 되었고, 우파의 경우엔 민족주의적인 민족문학으로서 문학의 예술성,

자율성을 강조하는 순수문학적 성향을 지니게 되었다. 

  해방기의 문학사적 의의는 무엇보다도 주권의 회복이라는 정치사적 사건과 모국어의

회복이라는 문학사적 중요성에 놓여진다.  이 시기엔 일제의 폭압 속에서 간행되지 못했던

좌파들의 시집가 함께 이육사의 『육사시집』, 심훈의 『그날이 오면』, 그리고 윤동주의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가 간행되고 해방 후 신진 문인들이 다수 등장하면서 새로운

민족문학의 가능성을 열어 가기 시작하였다. 

  해방기의 무질서와 혼란 속에서 시달렸던 이 땅은 남북 단독정권의 수립과 뒤이은 6․25의

발발로 동족상잔의 비극을 겪게 되었다.  6․25는 무엇보다도 국토와 민족, 그리고 문화를

물리적으로 양단함으로써 민족의 재편성을 초래하고 이질화 현상을 노골화하는 계기가

되었다는 점에서 그 비극성이 더욱 고조된다.   6․25가 일어나면서 문인들은 종군작가단을

조직하여 활동하게 된다.  아울러 분단 후 남쪽 시의 주류를 이루기 시작한 ‘청록파’, ‘생명파’

등에 반발하여 피난지 부산에서 모더니즘 시운동으로서 『후반기』동인이 결성되기도 한다. 

 55년부터는 월간 문예지 『현대문학』이 창간되고 『사상계』 등 준문예지가 발간되는 한편

신문의 신춘문예가 부활되는 등 전후문단이 본격적으로 형성되기 시작한다.  이처럼 해방기와

전후문학은 갈등과 대립, 폐허의 시대이지만 모국어의 회복을 바탕으로 민족과 개인을

재발견하고 자유와 평등이 이 땅에서 추구해야 할 소중한 이념적 덕목이라는 점을 확인하게

된 소중한 계기가 되었다는 점에서 문학사적 의미를 지닌다. 

  60년대는 민주화와 근대화라는 두 가지 목표가 상호 충돌하면서 자유와 평등을 둘러싼

구조적 모순과 현실적 갈등을 드러내게 됐다는 점에 그 시대적 성격이 놓여진다.  따라서

60년대 문학의 실마리를 연 작품으로는 최인훈의 「광장」을 꼽을 수 있다.  4․19로 시작된

60년대의 상황적 비극성은 뒤 이은 5․16군사정변으로 인한 4․19혁명의 좌절에 근원적으로

기인한다.  김승옥의 「서울 1964년 겨울」이나 이청준의 「소문의 벽」등에 보이는 지적

허무주의는 이러한 표정성을 잘 반영한다고 하겠다.  시에서는 50년대에 등장한 김수영이

푸른 하늘을」을, 신동엽이 「껍데기는 가라」등을 발표하면서 문학의 사회적 비판 기능을

강조하게 된다.  특히 66년 백낙청 등에 의해 창간된 계간지 『창작과 비평』은 문학의 사회적

효용성을 강조하면서 문학과 사회의 연관성을 집중적으로 탐구하기 시작하여 이후 민족문학

운동의 구심점으로 작용한다.  이렇게 볼 때 60년대 문학은 분단 후 이 땅의 최대명제라고

할 민주화와 근대화라는 모순명제가 충돌하면서 본격적인 한글세대가 등장하여 문학의 본질과

기능에 대한 논의를 확대하고 심화해 간 분단 문학의 심화시대라고 하겠다. 

  70년대는 문학에서 자유․평등 실현에 따른 실천적인 저항운동이 본격적으로 대두되었다. 

이와 더불어 60년대 급격한 산업화의 추진에 따른 각종 사회․경제적 모순과 부조리가 심화되면서

간적인 평등과 사회적인 소외문제가 대두되기 시작했다.  70년대 문학의 이러한 정치적인

민주화와 사회․경제적인 평등운동은 김지하의 『오적』(1970)사건으로부터 촉발된다.  그는

민중적 내용의 민족적 양식화라는 민중문학의 미학적 원리를 실천적으로 계승함으로써 민족문학의

창조적 계승을 성취해 낸다.  정치적 상상력을 예술적 상상력으로 접합해 냄으로써 분단 이후

순수문학에 치우쳤던 문학의 정치성을 예술성으로 고양시킨데서 김지하의 문학사적 의미가

놓여진다.  또한 이 시기 고은과 신경림은 50~60년대 문학주의 문학에서 벗어나 문학의 사회성

․역사성 실천에 주력하였다.  70년대의 시는 민중시와 전통서정시 그리고 도시적 감수성의

시들로 구분해 볼 수 있다.  70년대 소설은 사회학적 상상력을 소재로 한 소설과 6․25 소재 및

분단의 아픔을 다룬 소설이 다수 창작되었다.  특히 70년대 말에 「만다라」의 김성동,

「사람의 아들」의 이문열이 등장한 것은 이른 바 형이상학 소설의 한 가능성을 제기한 것이라는

점에서 소설사적 의미를 지닌다고 하겠다.

  80년대 문학은 무크지로부터 시작된다고 볼 수 있다.  80년대는 『시와 경제』․『오월시』

․『실천문학』․『시운동』등의 무크지 전성시대를 이루면서 황지우․박남철의 이른바 해체시

동이 전개되고 특히 박노해의 『노동의 새벽』(1984)이 상징하듯이 이른바 노동차 주체의

민중문학시대를 열어 가게 된다.  무엇보다도 80년대 문학은 이른바 민족문학이 확립되는

시기라는 점에서 의미를 지닌다.  80년대를 민족문학시대라고 부를 때 그것은 몇 가지의

경향성을 보인다.  첫째 그것은 농민과 농촌문제를 다룬다는 점, 둘째 노동자와 노동문제를

중시한다는 점, 셋째 각종 사회모순과 부조리를 고발하고 비판한다는 점, 넷째 환경문제를

중시한다는 점, 다섯째 핵과 외세문제를 다룬다는 점, 여섯째 분단극복과 통일지향성을

다룬다는 점 등을 들 수 있다.  이 점에서 특히 80년대 들어 대하 역사소설의 등장은 주목할

만하다.  70년대 황석영의 『장길산』을 비롯하여 김주영의 『객주』, 조정래의 『태백산맥』,

그리고 박경리의 『토지』등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이들은 오늘날 민족문학의 중심과제라고

할 민족사관, 민중사관을 중심내용으로 하면서 근본적인 면에서 통일문학을 지향한다는

점에서 분단 후 문학사에 있어 하나의 신기원을 열었다고 하겠다.  『백두산』이나 『만인보』도

이러한 의미를 지님은 물론이다. 

  99년대엔 후기산업사회의 징후들이 문학에도 영향을 미쳐 70~80년대를 지배하던 민족문학론

등 거대담론들이 쇠퇴현상을 보이기 시작하였다.  90년대는 정보화사회와 문민시대라는 시대적

성격으로 인해 새로운 가치관과 감수성이 요구되는 또 다른 전환기에 접어들게 된다. 

 

  현대시와 개작의 문제

  한편의 시가 이루어지기까지 습작 및 창작과정에 있어서 고쳐쓰기로서의 개작이란 필수적

이면서도 당위적인 과정이 아닐 수 없다. 신문학 초창기에 시에서 개작이 가장 빈번히 이루어진

경우는 김소월이다.  이상화의 시에서는 출판 시 타인에 의해 개작이 이뤄지지만 이는 원작에

어휘변화가 일어나지 않는 경우로 크게 문제가 되지 않는다.  하지만 개작으로 인해 한편의

시가 여러 가지 형태로 나타남으로 인해 발생하는 독자들의 혼란과 연구자들이 그 연구대상을

선정하는데 있어 오류의 가능성을 갖게 된다. 

  개작은 카프계열 시인들에서 특히 주목된다.  많은 경우에 이들이 처음 시를 발표할 때는 카프

전성시기에 해당하기 때문에 복자가 많이 나타나면서 계급적 색채를 강하게 지니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카프 해소 후 전향하거나 시대상황 변화로 말미암아 시집으로 간행할 때는 원래

내용이 상당 부분 개작돼 있는 경우가 적지 않은 것이다.  카프계열 시인들 중에 개작으로 인해

오히려 원작이 훼손되는 경우에서 볼 수 있듯이 시에서 개작이란 그것 자체가 섬세하면서도

신중한 배려가 전제돼야만 함을 알 수 있다. 

  해방 후 시에서도 개작이 이루어진 경우가 적지 않게 발견된다.  이렇게 보면 개작은 현대시

초창기부터 오늘날까지 지속적으로 행해져 오고 있는 예외적 관습임을 알 수 있다.  그것은

소월의 경우처럼 초기시단 형성과정에서의 모색과 실험에 따른 고민을 반영하기도 한다. 

그런가 하면 임화의 경우처럼 자의와 시대상황 변화가 작용해서 오히려 부정적인 결과를

초래하기도 하였다.  김춘수의 경우는 예술성의 심화라는 면에서 긍정적인 평가를 받을

수도 있겠다.  그렇지만 개작이란 그것이 실제상 가능한 것이고 때로 긍정적인 결과를

낳는 게 사실이라 하더라도, 바람직한 일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오늘날처럼 작품창작의

자유와 함께 그에 따른 책임의식이 요청되는 시대에 개작은 그리 바람직한 일이 아니라고

판단되기 때문이다.  개작이란 많은 경우에 작가의 미숙성이나 조급함 또는 진지성의

결여를 의미할 수 있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또한 모든 예술작품은 그것이 발표되는

순간부터는 작가의 것이 아니라 독자의 것이며 그 사회에서 정신적인 문화재로서

자리한다고 할 수 있다.  한 번 발표된 작품은 그 자체가 하나의 완결성․자족성․

자율성을 지니고 있는 것이고, 지녀야만 하는 것이다. 

 

  한국 현대시에 나타난 동학혁명

  동학혁명은 당대에 구전되는 민요들에 수용되면서 대중에게 널리 퍼지기 시작한다. 

「파랑새요」는 전봉준으로 표상되는 당대 민중들의 희망의 노래이며 동시에 절망의

노래로서의 이중적 성격을 지닌다.  일제 강점기에 동학혁명은 그 정신이 천도교로 이어져

3․1운동의 하나의 주도 세력이 되지만 현대시적인 표현을 획득하지는 못한다.  동학혁명이

현대시에서 그 구체적인 표현을 얻은 것은 4․19혁명 이후 60년대에 이르러 신동엽에

의해서였다.  1967년 발표된 시 「껍데기는 가라」는 동학혁명의 정신과 이념을 4․19혁명과

연결한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반외세 민족해방의식과 반계급 사회해방의식,

그리고 반봉건 민주화의식을 알맹이로 하는 동학의 이념은 그대로 4․19로 접맥되어 자유․

평등․민주․민권운동으로 부각되게 되는 것이다.  동학혁명이 현대시에 나타나는 모습은

전봉준을 핵심 상징으로 하면서 70~80년대 이 땅 민족문학․민중문학의 한 중심 문맥을

형성하며 전개된다. 

  동학혁명은 현대시사에서 몇 편의 서사시집을 탄생시킴으로써 현대시사의 확대와 심화에

기여하게 된다.  먼저 『금강』은 동학운동을 우리 현대시의 중심 테마로 이끌어 들인 첫 번째

서사시이다.  이 작품은 민중혁명으로서의 동학과 1960년대의 사회․역사적 정황을 병치 구조로

하여 시를 전개시키고 있다.  『금강』에서 시인이 제기한 중심 문제는 크게 보아 세 가지로

요약해 볼 수 있다.  첫째는 한국사의 근원적 모순과 부조리가 외세 의존과 중앙집권에서

비롯된다는 점을 비판하면서 민족 주체성과 인간 평등사상을 강조한다는 점이다.  둘째는

민주주의 지향성 또는 민중정신을 드러낸 것으로 이해된다.  셋째는 결국 해방 후 이 땅의

궁극적인 문제가 민족 주체성을 확립하고 분단 극복으로서 통일을 이루어내는 데서 해결될 수

있음을 강조한다. 

  장효문의 『서사시 전봉준』은 『금강』과는 조금 달리 동학혁명을 역사적 사실 그 자체에

충실하여 묘파하고 있다.  이 작품은 보국안민의 항일 구국 투쟁으로서 동학혁명의 전체적인

전개 과정과 그 의미를 형상화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전봉준을 핵심 고리로 한 영웅

서사시의 측면과 민족의 고난을 다루었다는 점에서 민족 서사시의 면모를 함께 지닌다고

할 것이다.  동학 서시시집이란 제명을 붙인 송수권의 『새야 새야 파랑새야』는 첫 부분이

서정시로, 둘째 부분인 핵심 부분은 서시와 1,2,3,4부로 짜여 진 서사구성으로, 셋째 부분은

다시 ‘새벽’이라는 서정시로 구성되어 있는 서정․서사 복합장르의 형식을 취한다.  송수권의

역사 인식은 비관적인 데서 출발하지만 근본적으로는 민족의 저력과 민중의 생명력을 믿고

사랑하는 낙관론적 지평으로 열려있는 것이 특징이다. 

  3․1운동과 4․19를 넘어 5․18에 이르기까지 민중의 중심부에 깊이 자리 잡고서 역사의

굴곡에 영향을 현재까지 미치고 있는 동학혁명은 이 땅에서 진행 중이며 미래완료형으로

전개돼야 할 내용임에 분명하다.  비록 동학혁명이 당대로서는 실패한 것으로 기록될 수밖에

없었다고 하더라도 이후 이 땅 역사에서 자유․평등․민주․민권의 소중함을 일깨우면서

민족적 정기와 민중적 생명력을 되살리는 역동적 에너지로서 작용해 온 데서 의미를 지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