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창자료/조오현

<아득한 성자>

묭롶 2008. 12. 23. 15:59

 


  무산 조오현 스님은 정규적인 시 쓰기 과정을 밟은 시인이 아니다.  『아득한 성자』를 읽기 전에

조오현에 대해서 나는 전혀 사전지식이 없었다.  그래서 나는 시인이 스님이라는 사실도 그가 문학

적인 교육을 받은 적이 없다는 사실 또한 알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시를 쓸 수 있었던,

아니 시를 쓰게 했던 원동력이 어디에 있었는가에 궁금증이 들었다.  『아득한 성자』를 읽으며

그러한 원동력이 그의 오랜 구도생활로 인한 성찰과 고뇌 속에 있었음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의

시세계가 본래의 시의 정신과 맞닿아 있음도 깨달았다.  시의 세계는 불교의 구도생활과 닮아 있다. 

  시가 현재에 대한 오랜 관찰과 사유를 통해 그 속에 숨어있는 본질을 건져 올리는 형상화의 과정

이라면 종교는 나에 대한 오랜 돈오(頓悟)의 과정, 즉 나의 본질(불교의 경우 부처)로 나아가기 위한

성찰의 과정이다.  시인이 사금을 캐는 과정과 같이 현실에서 본질 속에 반짝이는 근원을 건져 올리기

위해 지난한 과정을 거쳐 한 편의 시를 만들어 낸다면, 경우에 따라 차이가 있겠지만 각각의 시인들은

모두 시를 만들어 내는데 건져 올리는 틀이 제각각이 될 것이다.  그래서 어떠한 경우에는 그 틀의

정형성으로 인해 시인의 자유로운 사유의 결정체가 손상, 변형되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조오현의

시세계는 형식에 구애받지 않는 자유로움을 보여준다.  시조의 형식을 보이기도 하고 사설조의 형식이

되기도 하고 서정성을 띄다가 해학성을 띄는 등 그의 시세계는 자유로운 사유의 과정을 그대로 가감

없이 표현하고 있다.  그의 시에서 보여주는 성찰의 길은 무념, 무상, 무욕의 무위자연으로 향하는

길이다.  조오현은 이 길로 나아가는 험난한 여정 속에서 생겨나는 갈등과 의문에 대해 선문답과 같은

물음으로 그에 대한 해답이 무엇인지를 에둘러 우리에게 물어오기도 하고, 질곡 많은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통해 우리가 가야할 근본적인 길이 어디인지를 생각하게 한다. 

  그의 시집『아득한 성자』를 읽으며 조오현의 사유와 성찰의 깊이에 다 닿지는 못하겠지만 깊고

그윽한 그의 시심 속에 푹 잠기고 나면 어둡고 삭막한 세상을 살아가는데 자그마한 빛을 발견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 무산 조오현 스님의 성찰에 조금씩 다가가 본다.

  

  『아득한 성자』를 펼치면 첫 머리에 /중은 끝내 부처도 깨달음까지도/ 내동댕이쳐야 하거늘/

대명천지 밝은 날에 시집이 뭐냐./라는 시인의 말을 만나게 된다.  구도의 과정은 버리는 과정일

터인데 그가 ‘시’를 쓰는 것에 대해 내내 고민해 왔음을 알게 됐다.  하지만 그 뒤에 /무수한 중생들이

/ 빠져 죽은 장경藏經바다/ 돛 내린 그 뱃머리에/ 졸고 앉은 사공아./ 에서 졸고 있는 사공이 바로

시인인 스님 자신인 것을 알 수 있었다.  결국 스님은 아욕에 사로잡혀 현실 속에서 돈오(頓悟)로

나아가지 못하는 중생들에게 스님의 시가 어둠을 헤쳐 나갈 작은 불빛이 바라지 않았을까 라는

생각을 해 본다. 

  조오현은 「아득한 성자」에서 자연 속에서 자신의 역할을 충실하게 마치고 생을 마감하는 ‘하루

살이’의 모습에 어린 성자를 발견한다.  또한 「허수아비」에서는 맘을 다 비우고 두 팔을 쫙 벌림

으로써 모든 것을 다 가슴 안에 포용하는 ‘허수아비’에서 성자의 모습을 본다.  이에 비하면 사람은

죽을 때가 지나서까지 살아있지만 그 어느 하루도 참되게 살지 못한 ‘아지랑이’같은 존재들이다. 

  그는 원통보전 축대 밑에 쭈그리고 앉은 노인의 구구절절한 욕지거리까지도 모조리 다 빨아먹고

신물이 들대로 들어 사람들에게 이 세상에서 제일 환한 꽃으로 환한 웃음을 선사하는 개살나무의

이야기를 통해 우리를 부끄럽게 한다.  그는 「축음기」에서 /이제 내 소리 듣고 흉내 낼 새도 없고/

이제 내 소리 듣고 맛들 열매도 없다/ 이제는 내가 나를 멀리 내다 버릴 수밖에/  개살나무마저도

외면하는 소리를 내는 ‘축음기’와 같은 사람이 되지 말아야 함도 경계한다.  「어미」에서는 자신의

역할에 온 힘을 다하여 생을 살아낸 소 ‘어미’와 ‘할멈’의 이야기의 대비를 통해 /시체를 관에 넣고

관 뚜껑을 덮은 뒤에야 그 사람의 진가를 안다고/에서 ‘할멈’의 장례식날 울었던 앞 뒷산 먹뻐꾸기

들과 /그 울음을 받아먹은 텃밭의 감도 대추도 모과도 맛이 들대로 들었고~/ 처럼 죽음을 통해

자연에 동화되는 아름다운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우리가 삶을 어떻게 사는 것이 올바른 것인지를

묻고 있다.

 

  그는 인간이 결국 가야할 길이 무위자연이라고 말한다. 「내가 나를 바라보니」에서 나는 커다란

자연의 눈으로 봤을 때 온갖 행동을 다 하며 꿈틀대는 한 마리 벌레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자연이라는

큰 순환고리 속에서 보잘 것 없는 인간이 본질적인 ‘나’로 각성하는 데는 무엇이 필요할까?  그것은

‘달빛’일 것이다. 「오늘의 낙죽」에서 속살을 드러낸 조개를 비추는 추석달빛과 「떡느릅나무의 달」

에서 높이 비추이길 바라는 달빛은 험난한 구도의 과정에서 방향을 제시하는 등대일 것이다.  이렇게

비추는 불빛을 찾지 못한 미욱하고 눈이 어두운 사람들에겐 「내 삶은 헛걸음」에서와 같이 걷고

또 걸어도 삶의 진도에 흔들리는 헛걸음일 뿐이다.  그는 또 자연 속에서 모든 사물은 자신을 자신이게

하는 본질을 지켜내야 하고 또 그렇게 되기 위해 각고의 노력을 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래서

바위소리」에서 바위는 바위이기 위해서 들어 올려도 끝내 들리지 않아야 하고 그렇게 되기 위해서

표면에 검버섯 같은 것이 거뭇거뭇 피어날 정도로 인고의 세월을 겪어야만 하는 것이다.  고목이 고목

소리를 들으려면 속은 몽땅 썩고 곧은 가지들이 다 부러져서 굽은 등걸에 장독(杖毒)이 들 정도로 자연

속으로 풍화 되서야 비로소 고목이 될 수 있다.  또한 사내가 장부 소리를 들으려면 몸은 들지 못하더라도

자신의 마음을 다스릴 수 있어야 몰현금 한 줄을 탈 수 있다고 「몰현금 沒絃琴 한 줄」에서 말한다. 

중이 중 소리를 들으려면 「취모검 吹毛劍 날 끝에서」몇 번은 죽어야 한다.  바위나 고목이 풍진의

세월을 견디어 바위소리, 고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던 이유는 그 내부가 비어있었기 때문이다.  비어

있었기에 그 안에 무한히 많은 것들을 포용할 수 있었다.  ‘검버섯’이나 ‘장독’은 그 비움의 시간동안

무수히 바위와 늙은 나무를 드나들었던 많은 것들의 흔적으로도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사람의 경우에는

어떻게 해야 내부를 비울 수 있을까?  보통 사람들은 모두 사는 동안 자신의 육(肉)의 영달을 위해 온

정신을 쏟느라 실상 마음에 관심을 기울일 틈이라곤 없다.  이러한 사람들은 「마음 하나」의 천하를

들었다 놓았다하는 천하장수라도 정작 자신의 티끌만큼 작은 마음 하나는 끝내 들 수가 없는 것이다. 

이처럼 그는 육(肉)이 아닌 마음을 다스려야 한다고, 그래서 몰현금을 다만 한 줄이라도 켤 수 있는

정도가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마음을 비워야 그 비움 속에 많은 것들을 품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취모검 날 끝에서 몇 번은 죽어야 한다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육신의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욕심으로 기울려는 마음이 죽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에게 욕심이 「빛의 파문」에서

내 잠(구도의 여정)을 빼앗고 사는 ‘유령’이라며 이 유령들을 따라가면 삶을 까무러치게 하는 죽음

(마음의 소멸)에 이른다며 경계한다.  그래서 그에게 욕심(욕정, 고집, 독선.....)으로 가득 찬 마음을

죽이는 길이 바로 구도의 과정일 것이다.  그 구도의 과정은 손발톱 눈썹이 다 짓물러 빠질 정도로

힘들고 긴 시간이다.  그래서 이러한 구도의 과정 속에서 나온「말」속의 ‘담장 밖으로 내놓을 말’이

바로 조오현의 ‘시’가 아닐까?

 

  사람들은 찰나의 감정에 일희일비하며 살아간다.  그는 이러한 순간의 감정에 진폭이 큰 사람들에게

「시간론」과 「사랑의 거리」에서 ‘진겁(塵劫) 다 하도록’, ‘이승 저승쯤 되어야’라며 에둘러 말한다. 

여자가 여자이기 위해서는 가슴 속에 있는 거문고 줄을 울려줄 사람을 진겁이 다 하도록 기다려야 한다. 

물론 거문고 줄이 울리기 위해서는 공명이 필요한데, 그러기위해서는 진겁이 다 하도록 마음을 비워야만

한다는 것이다.  그는 요즘처럼 너무 짧고 매번 쉽게 변하는 사랑의 감정에 대해서도 그 시간이 여울목에

돌다리 하나를 놓은 정도로 오래도록 지속 되어야 하며 그래서 그 만나는 거리도 이승 저승쯤 되어야

정말 사랑이라고 말 할 수 있다는 깨우침을 주고 있다. 

  그의 관찰은 고목이나 바위와 같은 자연에서부터 혼란한 세상을 그 밑바닥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까지 지속되고 있다.  그러한 관찰의 시선은 때로는 예리하게 그 속에 숨어 있는 빛을 발견하기도 하고

 관찰의 대상에 대한 연민과 안타까움을 드러내기도 한다.  그는 「침목(枕木)」에서 ‘어두운 세상을

만나 억눌려 살며 쓸모없을 때 버림받는’ 민초들의 삶을 그럼에도 불구하고 곧 붕괴할 것만 같은

지반을 끝끝내 받쳐온 ‘침목’에 비유한다.  이러한 사람들이 있기에 하늘이 있을 수 있고 역사가 있을

수 있다고 말한다.  가난하고 힘든 삶을 살아간 ‘침목’(민초)들에 대한 짠한 안타까움은「할미꽃」

에서도 드러난다. 하늘 아래 씨앗처럼 받은 가난을 받고서도 그 가난이 무슨 죄라고 죽어서 환생한

할미꽃이 되어서도 하늘 아래 고개를 들지 못하고 고개를 숙인단 말인가.  그 가난은 「오누이」에서

어린 오누이를 ‘이슬이 마르지 않은 이른 아침’부터 밖으로 내몰고 있다.  ‘할미꽃’과 ‘오누이’에 대한

짠한 마음이 그의 마음속에서 파도를 쳤기에 「파도」에서 그는 밤이 늦도록 불경을 읽었을 것이다. 

불경을 읽으면서도 들려오는 민초들의 울음소리를 그는 ‘바람에 이는 파도’라며 결국 ‘바람(파도를

러일으키는 마음)’을 잠재우면 파도가 잠잠해질 것이라고 「숲」에서 담담하게 모두 ‘그렇게 살고

있다 그렇게들 살아가고 있다’라고 말한다.  하지만 그는 ‘새’의 울음소리나 다른 사람들의 파도치는

울음소리는 듣지만 정작「내 울음소리」는 듣지 못했다고 말한다.  그래서 그는 「살갗만 살았더라」고

말한다.  ‘살갗만 살은’ 삶의 흔적은 「내가 쓴 서체를 보니」에서 ‘적당히 살아온 죄적’으로 남아있다고

고백한다. 결국 그것은 내 마음(욕심)이 죽어야 ‘내 울음소리’를 들을 수 있을 텐데 정작 내 마음을 아직

죽이지 못함(진정한 頓悟)을 의미한다.  아직 듣지 못한 ‘내 울음소리’는 그에게「재한줌」에서 ‘언젠가

내 가고 나면 무엇이 남을 건가’라는 물음을 던진다.  그 물음에 대한 대답은 「고향당 하루」에서

아직은 진정한 ‘나’로 나아가지 못하고 ‘낙조’가 되었다고 답한다. 

  그에게 진정한 성불의 세계는 「선사와 갈매기」에서 수평선을 넘어간 ‘갈매기 두 마리’로 표상된다. 

그래서 ‘어제는 울었던 바다’가 오늘은 울지 않게 된 것이다.  마음이 이는 파도로 울었던 바다가 마음을

모두 비워내고 부처로 나아간 지금은 아무것도 없는 무념무상의 세계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아직은

‘낙조’라고 말하는 ‘그’이기에 ‘갈매기’처럼 수평선을 넘어가지 못하고 「백장과 들오리」에서 자신의

 ‘울음소리’가 아닌  ‘들오리’의 울음소리를 내고 있다.  그는「염장이와 선사」와 「새벽 종치기」,

「눈을 감아야 세상이 보이니」에서 진정한 성불의 길이 무엇인가를 묻는다.  선사가 일생을 수도에

정진하고도 이르지 못한 부처를 늙은 염장이와 늙은 종두, 늙은 석수에게서 발견한 것이다.  그래서

자신의 죽은 시체가 말해줄 자신의 삶을 책임질 수 있어야 한다고 그렇게 자신의 죽음에 떳떳할 만한

삶을 살아내는 것이 현재 우리의 몫이 아니겠냐며 우리에게 되돌려 묻고 있다.  그렇지 못한 삶을 사는

것은 「물속에 잠긴 달 바라볼 수는 있어도」에서 ‘물속에 잠긴 달’을 건지려는 ‘사내’처럼 결국 새벽

(죽음)에 이르러서야 깨닫게 된다며 우리에게 경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