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창자료/서정주 시론

서정주 시정신의 변화과정

묭롶 2008. 12. 23. 15:29

 

먼저 서정주는 20대 무렵의 첫 시집 「花蛇集」에서부터, 70대 무렵의 제9시집 「鶴이 울고 간

날들의 詩」에 이르기까지 다른 어떤 시인에게서보다 시정신의 발전과 변화가 다양하게 나타난

시인이다.  한 시인의 시를 살펴봄에 있어 그 시가 나오게 된 시인의 정신사적, 시대사적 궤적을

살펴보지 않고서는 올바른 ‘시’분석이 어렵다고 판단되어 ‘시’가 나올 무렵의 배경까지를 대상으로

하였다. 

  그의 시정신의 발전 과정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 제 1시집「花蛇集」무렵(20대): 정신적 육체적 방황, 혹은 문학 청년적 지향 속에서

                                    비롯된 작품들.

  ◎ 제 2시집「歸蜀途」무렵(30대): 정서적 안정과 형이상적(形而上)사유 속에서 우러

                                    나온 작품들.

  ◎ 제 3시집「徐廷柱詩選」무렵(40대): 달관(達觀)을 통하여 얻어진 작품들.

  ◎ 제 4시집「新羅抄」제 5시집「冬天」무렵(50대): 영생적(永生的) 개안(開眼)을

                                     통하여 얻어진 작품들.

  ◎ 제 6시집「질마재 神話」무렵(60대): 고향 마을의 원형적 설화에서 획득한 작품들.

  ◎ 제 7시집「떠돌이의 詩」제 9시집「鶴이 울고 간 날들의 詩」무렵(70대):

                                     ‘자유인’과 만보(漫步)의 산책 정신에서 빚어진

                                     작품들.

  이러한 분류를 토대로 각 시기별 ‘시’에 나타난 시정신의 변화에 중점을 두어 5편의 시를

분석, 비평, 감상해 보았다.


  ㄱ. 제 1시집 「화사집」무렵 (20대)-‘자화상’을 통해 본 미당의 정신적, 육체적 방황.

  미당의 첫 시집 「화사집」이 나온 것은 1941년, 그의 나이 26세 되던 해의 일이다.  이 시기

그는 시단에 등단하면서부터 이미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으며, 그 자신의 시의 경향을 ‘人生派’

라고 규정하기도 했다.  그의 ‘人生派’의 성격은 30년대 초 언어의 조탁(彫琢)에 치중했던 시들이나

그 이전의 경향파(傾向派)의 시, 그리고 서구의 사조를 도입한 모더니즘 시들에 대한 대립적 입장을

그 내용으로 하고 있다.

  이 무렵 그의 시들 속(<花蛇>, <自畵像>, <문둥이>, <대낮>, <正午의 언덕에서>)에서 인간의 원죄

의식이나 원색적 욕정(欲情), 그리고 언어 기교를 도외시한 직정적(直情的)언어 등이 빈번히 사용

되었다.  이러한 경향의 시들은 바로 새로운 시적 질서를 찾아보려는 시인의 방황을 나타낸다고 볼 수

있다.  그는 이 무렵에 「희랍 神話」와 「보들레르」에 상당히 많이 심취해 있었던 듯이 보인다.  그의

20대의 육정적 방황이 이러한 독서물과 함께 이루어졌음도 짐작해 볼 수 있다. 

  미당의 직정적(直情的)언어는 그 이전의 어떤 시인들에게서도 그 유례를 찾아 볼 수 없는 일종의

시적 혁명에 해당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는 살아 꿈틀대는 언어를 일컬어 人生派라

명명했다.  거의 시를 조금 더 자세히 살펴보면 직정적(直情的)언어는 곧 옷을 벗고 나온 알몸의 말,

즉 아담의 윤리, 그대로의 언어임을 알 수 있다.  말하자면 이는

‘사람’ 그것 속 에 직핍(直逼)하고자 했던 언어인 것이다.  곧 그것은 인간의 생명력을 원색적으로

발현시키려는 시인의 강한 의지에서 비롯된 산물인 것이다. 

<自畵像>

애비는 종이었다.  밤이 깊어도 오지 않았다.

파뿌리같이 늙은 할머니와 대추꽃이 한 주 서 있을 뿐이었다.

어매는 달을 두고 풋살구가 꼭 하나만 먹고 싶다 하였으나...

흙으로 바람벽한 호롱불 밑에

손톱이 까만 에미의 아들

甲午年이라든가 바다에 나가서는 돌아오지 않는다 하는

外할아버지의 숱많은 머리털과 그 크다란 눈이 나는 닮았다 한다.


스물 세 햇 동안 나를 키운 건 八割이 바람이다.

세상은 가도 가도 부끄럽기만 하드라.

어떤 이는 내 눈에서 罪人을 읽고 가고

어떤 이는 내 입에서 天痴를 읽고 가나

나는 아무것도 뉘우치진 않을란다.


찬란히 티워오는 어느 아침에도

이마 위에 얹힌 시의 이슬에는

몇 방울의 피가 언제나 섞여 있어

볕이거나 그늘이거나 혙바닥 늘어뜨린

병든 숫캐마냥 헐떡거리며 나는 왔다.


  <자화상>에는 암울한 일제시대를 살아가는 한 젊은이의 고뇌와 방황이 그려져 있다.  甲午年

바다에 나간 채 돌아오지 않는 外 할아버지를 닮은 시 속 화자는 이미 ‘바람’을 운명적으로 타고난

존재이다.  그래서 이러한 시 속 화자는 ‘스물세햇 동안 나를 키운건 八割이 바람이다.’라고 고백

하는 것이다.  가난을 천형처럼 이고 살아가는 가족들을 보면서도 아무것도 해줄 수 없는 고통을

시적 화자는 ‘세상을 가도가도 부끄럽기만 하드라’고 토로한다.

하지만 시적화자는 남들이 아무리 그런 모습을 조롱할지라도 ‘뉘우치진 않을란다.’고 다짐한다. 

순백(純白)의 젊음을 가진 시적화자이기에 ‘이마 위에 얹힌 詩의 이슬에’ 언제든 ‘몇방울의 피’를

흘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시적화자는 ‘詩의 이슬 위에’ 순백(純白)의 ‘피’를 흘릴 그때까지

남들이 보기에는 무력한 ‘병든 수캐’일지라도 방황을 거듭하는 것이다.

  이 시의 ‘애비는 종이었다’는 발상을 낳게 한 동기는, 그의 부친(徐光漢)이 조부가 망친 가산을

일으키려 당시 10만 석 부자인 김기중 댁에서 농감(農監)을 지낸 일이 있는데 그것이 항상 시인의

마음에 걸려 있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시인은 <自畵像>이 자신의 전시적 사실과 관련이 없는

상징적인 작품이라고 말하고 있으나 ‘八割이 바람’이라는 부분에서 작가의 부정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이 서정주의 20대의 모든 작품을 대변해 주는 ‘시’임을 알게 된다.  또한 ‘이마 위에 얹힌

詩그의 이슬에는 / 몇방울의 피가 언제나 섞여 있어’에서 볼 수 있듯이 ‘詩’의 이슬에 몇방울의

피를 바치기 위해 고뇌하고 방황하는 존재가 시인 자신임을 짐작하게 한다.   <자화상>에서의

‘바람’은 「花蛇」 무렵뿐만 아니라 그 후의 「떠돌이의 詩」에 이르기까지 멈추지 않고 계속되는데,

어쩌면 이 시인의 시적 생애 전체를 그 ‘바람’이 지배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특히

이 ‘바람’은 「花蛇」무렵 형이하(形而下)의 바람에서부터 점차 형이상(形而上)의 바람으로 발전

해가고 있는 모습을 만나게 된다. 

 

 ㄴ. 제 2시집「귀촉도」무렵(30대)-‘귀촉도’를 통해 본 의식의 확대와 동양적 사유.

  서정주의 제 2시집「귀촉도」가 나온 것은 1946년 그의 나이 31세 되던 해의 일이다.  이 무렵은

그가 인생에 태어나 가장으로서의 구실을 처음 시작한 때이며, 가장으로서의 무거운 책임에 얽매어

문학청년적 방황을 일삼던 20대와는 다른 ‘안정’상태에 접하게 된 시기이다.  그러나 미당이 30대에

접한 ‘안정’은 한 가족의 가장이 됐음에서 기인한 것만은 아니었다.  다른 이유로는 20대의 정신적,

육체적 방황에 대한 미당 자신의 강한 회의를 우선들 수 있을 것이다.  이 때문에 그는 20대의 그런

정열적 생명현상의 도취로부터 다소 헤어나올 수 있게 되었고, 좀 누그러지게 되면서, 그 점이 바로

그 점이 우리 고유의 정서 등에 눈을 돌리는 시적 전기(轉期)가 되었다고 우리는 생각해 보게 된다. 

또 다른 이유는 그의 부친의 타계에서 찾아 볼 수 있다.  부친의 타계로 인한 부양의 의무가 20대의

‘떠돌이’기질을 조금은 잠재우고 붙들어주는 기능을 했으리라는 생각이다. 

  이 무렵의 그의 시가 「花蛇」 무렵의 서구적 방황에 비하여, 동양적 정신주의나 전통적 사색의

세계, 혹은 그에 수반되는 정서에로 눈을 돌리고 있다는 점, 「花蛇」무렵의 거센 산문적 리듬에

비하여 대체로 그 형식이 정비되고 가라앉음 톤(tone)으로 나타나고 있다는 점 등은 바로 그런 안정된

정서의 반영으로 볼 수 있는 요소들이라 할 수 있다.  또한 「花蛇」무렵의 형이하적(形而下的)인

작품의 경향으로부터, 형이상적(形而上的) 작품의 경향으로 이행(移行)되어 가고 있는 과정을

이 <귀촉도> 무렵에 찾아 볼 수 있다.

  이 무렵 미당시(未堂詩)의 이 같은 변화는 소홀히 넘길 수 없는 부문이라고 생각된다.  그것은

어쩌면 「花蛇集」무렵의 서양적 정복적인 숨결로부터, 동양적 정관적(靜觀的)인 숨결로 회귀하는

듯한 인상을 줄 수도 있고, 순나(純裸)의 미(美)나 아담의 윤리 속에 젖어 있던 육체주의로부터,

차츰차츰 내면적이고 사색적인 쪽으로 기우는 정신주의적 조짐으로 볼 수도 있다.

<歸蜀途>

눈물 아롱아롱

피리 불고 가신 임의 밟으신 길은

진달래 꽃비 오는 西域 三萬里

흰 옷깃 여며 여며 가옵신 임의

다시 오진 못하는 巴蜀 三萬里.


신이나 삼아줄걸 슬픈 사연의

올올이 아로새긴 육날 메투리

은장도 푸른 날로 이냥 베어서

부질없는 이 머리털 엮어드릴 걸.


초롱에 불빛, 지친 밤하늘

굽이굽이 은핫물 목이 젖은 새

차마 아니 솟는 가락눈이 감겨서

제 피에 취한 새가 ‘歸蜀途’ 운다.

그대 하늘 끝 호올로 가신 임하.


  이 시는 미당(未堂)의 제2시집 표제시이다.  제2시집을 대표하는 표제시로서 <귀촉도>라는 제목을

선택한 것은 매우 뜻 깊은 일이었다.  왜냐하면 제1시집 「화사집」에서 보였던 정서적 불안정이나

산문적 호흡이 이 시집에서는 정서적인 안정과 형식의 정비 등이 두드러지게 나타나기 때문이다. 

<귀촉도>라는 제목이 벌써 동양적인 귀의(歸依)를 시사해 주고 있는 바와 같이, 동양적 정서 속에서

산출된 시들이 담겨져 있기 때문이다.

  이 시는 젊은 과부의 애절한 한(恨)을 동양적 전설을 안고 있는 새(鳥)인, ‘귀촉도’를 소재로 빌어다가

표현하고 있다.  바꾸어 말하면 ‘귀촉도=청상과부의 혼’이라는 놀 리가 성립되기 때문에 이 시의 첫째

연과 둘째 연은 망부한(亡夫恨)을 안고 죽은 청상과부의 혼의 독백으로 나타나게 된다.  그리하여

‘피리 불고 가신 임’은 이 시의 화자의 ‘임’이 아니라 바로 청상과부의 ‘임’이라 할 수 있다.  그 ‘임’은

귀환 불가능한 ‘巴蜀’으로 가버린 것이다. 

  한용운의 ‘님’이 불교적 윤회 사상에 뿌리박은 ‘다시 만날 것을’ 믿는 ‘님’인데 비하여, 이 시의 과부의

‘임’은 ‘다시 오진 못하는’ 영원한 연모의 ‘임’이어서, 김소월의 <진달래꽃>에 보이는 ‘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며 마음속에 영원히 간직하는 ‘임’과 궤(軌)를 같이 한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이 시가 가지고 있는

동양적인 정한(精恨)의 정서가 우리 민족이 가지고 있는 정서의 근간과 맞닿아 있다는 점에서 그 의의를

찾아 볼 수 있다.  이는 고려가요 ‘가시리’부터 이어져 오는 민족적 정서를 새로운 서정으로 표현하여

그 흐름을 계속해서 이어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ㄷ. 제3시집 「서정주시선」무렵(40대)-‘국화 옆에서’를 통해 본 ‘달관(達觀)’의 詩選.

  서정주의 제3시집「徐政柱詩選」이 나온 것은 1955년, 그의 나이 40세 때이다.  이 시집은 제2시집

「歸蜀途」이후 9년만에 펴낸 시집이며, 그의 인생 역정(歷程) 가운데 가장 짭짤하게 수난을 겪었던

시기의 산물이라 할 수 있는 시집이다.  다시 말하면 이 무렵은, 6․25의 동족상잔의 비극이 있었던

때이고, 그는 그 동족상잔의 비극을 누구보다도 짭짤하고 강렬하게 체험하였으며, 그리고 그 ‘짭짤’하고

‘강렬’하게 체험한 것이 ‘補藥’이 되어서, 삶에 대한 비극적인 인식을 지양할 수 있었고, 담담히 인생과

사물을 바라볼 수 있는 관조(觀照)의 눈을 마련할 수 있었던 시기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이 무렵 그의 문학적 특징은 비극적 상황들을 치열하게 겪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극복한 자로서의

노래, 혹은 잘 여과시키고 있는 자로서의 노래를 보여주고 있다는 점이다.  이 시기 그의 시들은 모진

상황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담담하고, 생명의 환희에 차 있으며, 긍정적인 자세로 서 있는 것을 보게 된다. 

따라서 이 무렵의 그의 시들이 다른 어느 시기의 시보다도 대중에게 친근감을 주는 수작(秀作)들이 많고, 

또 그렇게 친근하게 회자될 수 있는 시를 창조할 수 있었던 비밀도, 바로 그 ‘짭짤’하고 ‘강렬’하게 격은

‘補藥’의 덕이 아니었던가 하는 생각이 든다.  또 한편으로 생각해보면 「歸蜀途」무렵의 ‘안정’은

한 가장으로서의 것이었다면, 이 무렵의 ‘달관’은 만고풍상을 다 겪은 자로서, 미래에 그러한 바람과

서리를 겪을 다른 가난한 이웃들에게 들려주는 노래, 혹은 그 노래를 부를 수 있을 만큼의 달관으로 받아

들일 수 있을 것 같다.

<국화 옆에서>

한 송이의 국화꽅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소쩍새는

그렇게 울었나 보다.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천둥은 먹구름 속에서

또 그렇게 울었나 보다.


그립고 아쉬움에 가슴 조이던

머언 먼 젊음의 뒤안길에서

인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내 누님같이 생긴 꽃이여.


노오란 네 꽃잎이 피려고

간밤엔 무서리가 저리 내리고

내게는 잠도 오지 않았나 보다.


  이 시의 ‘국화’는 상징으로서의 국화이다.  40대 중년 여인의 완숙미를 이 국화꽃을 통하여

상징해주고 있는 것이다.  젊은 날의 고뇌 속의 방황을 통해서는 발견하지 못했던 국화꽃의 아름다움을

탕아의 귀향을 통하여 드디어 발견하고 있으며, 그러한 ‘국화’의 아름다움은 숱한 인고의 세월을 겪은

뒤에 얻어진 것임을 보여줌으로써, 한 아름다움의 탄생의 어려움, 한 가지 일의 성숙의 어려움을 말해

주고 있다.

  <귀촉도>에서 정한의 아픔에 함께 함몰되어 눈물짓던 시적화자는 <국화 옆에서>에 이르러 먼저

아픔을 겪었던 자의 담담한 관조의 태도를 지닌다.  젊은 날 방황의 길을 헤매던 시적화자는 ‘인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국화’로 상징되는 인고의 세월을 견뎌낸 ‘자신’을 담담히 비켜보고 있는 것이다. 

<국화 옆에서>를 통해서 시인 개인으로서의 아픔을 극복하고 승화하는 정신적인 성장이 시에서도

그대로 표현되어 짐을 알게 된다.  ‘국화’를 피우기까지 ‘봄부터 울었던 소쩍새’가 바로 시인 자신이며

‘내리는 무서리’에 ‘잠들지’못하는 시적화자가 시인 자신이기 때문이다.  이 시가 넓은 독자층의 가슴을

파고드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천둥이 먹구름 속에서 울고’, ‘무서리가 내려서’

 ‘잠’을 못 이룰 만큼 걱정이 되지만 시인의 마음속에도 그렇고 시를 읽는 독자의 마음속에서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화’가 언젠가 ‘노오란 네 꽃잎’을 피우리라는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또한 ‘국화’는 ‘인고의 세월 뒤에 피어난 꽃’의 아름다움을 발견한다는 점에서 시인 서정주의 시적

상상력이 대가적(大家的) 시의 세계를 획득하고 있다고도 볼 수 있겠다.  이 무렵을 전후로 하여 서정주의

시적 상상력은 지상에서 천상으로 현실에서 미래로 혹은 이승에서 저승으로 그 시적 공간이 확대되고

있는 것이다.

 

 ㄹ. 제4시집「신라초」, 제5시집「冬天」무렵(50대)-‘蓮꽃 만나고 가는 바람같이’를 통해       

 본 불교적 은유의 세계.

  서정주의 제4시집「신라초」가 출간된 것은 1960년이고, 제5시집「冬天」이 출간된 것은 1968년,

그의 나이 53세 때이다.

  제5시집「冬天」은 서정주의 문학적 성과 중에서 가장 뛰어난 압권으로 들 수 있다.  그의 시세계는

「冬天」에 이르러 그 화려한 개화(開花)를 보이고 있다고 말 할 수 있다.  「冬天」을 쓸 무렵 시인은

불교적 상상과 은유에 매료되어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시집 「冬天」에 보이는 그의 언어유희는,

때로는 불교적 상상의 세계로 유인하기도 하고, 때로는 어떻게 보면 독자를 우롱하기도 하며 때로는

어떻게 보면 독자를 어리둥절하게도 하지만, 그것들이 사뭇 우리 독자들에게 언어의 안개 속을 방황

하도록 하는 것은 매한가지여서, 생각해 보면 그것들은 그의 말대로 ‘파천황(천지가 미개(未開)의

혼돈한 상태에 있을 때, 그것을 깨뜨려 여는 것을 뜻함)의 상상들’의 세계로 이끌어다 주고 있는 것

같다.  그가 이 무렵 개안(開眼)을 보인 것 중에 특히 많이 작품으로 구현시키고 있는 것은 영생적

(永生的)개안이다.  

<蓮꽃 만나고 가는 바람같이>

섭섭하게,

그러나

아주 섭섭ㅎ지는 말고

좀 섭섭한 듯만 하게,


이별하게,

그러나

아주 영 이별은 말고

어디 내생에서라도

다시 만나기로 하는 이별이게,


연꽃 

만나러 가는

바람 아니라

만나고 가는 바람같이......


엊그제 만나고 가는 바람 아니라

한 두 철 전

만나고 가는 바람같이......


  연꽃은 불교의 상징적인 꽃이다.  상징적인 그 연꽃을 ‘만나고 가는 바람같이’라 표현함으로써

인생을 그렇게 대면해야 한다고 이 시는 노래하고 있다.  이 시는 사상 면으로는 불교의 윤회사상에

기반을 두고 있다.  불교적 수도(修道)가 잘 이룩되면 그런 경지가 이루어질지 모르지만, 대개의 모든

사람들은 죽음의 공포로부터 초극할 수 있는 어떤 슬기를 가지지 못한 채 살아가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이 작품은 그러한 슬기를 교시적으로 말하려 하고 있다.  이 작품은 그러한 초극의 자세를 시인의

독특한 언어비술로 표현해주고 있다는 점에서 시집「冬天」의 백미로 꼽을 수 있다. 

   이 시는 시적 정서와 언어미학의 면에서 뛰어난 면모를 보인다.  ‘蓮꽃 만나고 가는 바람’의 ‘만나고

가는’이라는 말이 주는 정서나 언어감각도 이 시인만의 독특한 언어비술에 의하여 표현되고 있으며,

 ‘만나고’라는 인격화의 표현이 특히 참신한 맛을 배가시켜 주고 있다.  한편 이 작품에서 더욱 언어

감각을 새롭게 해주는 부분은 ‘각운’의 처리이다.  첫째 연과 둘째 연에서는 ‘하게’ ‘하게’ ‘이게’ ‘이게’로

셋째 연과 넷째 연에서는 ‘같이’ ‘같이’를 반복 사용하고 있다.  그리고 그것들은 한결같이 부사어의 구실을

하고 있으며 또한 한결같이 서술어가 생략되고 있다.  바로 이 점이 또한 묘미를 주는 부분이다.  서술어가

생략되고는 있지만, 시의 의미망에는 어느 하나도 결(缺)하고 있지 않는 점에서 조사의 묘(妙)를 맛보게

해주는 것이다.  그리고 또 한편으로 이 작품에서 하나 더 지적할 수 있는 요소는 매우 잘 짜여졌다고 할

수 있는 그 유기체적 구성을 들 수 있다.  첫째 연에서는 한 마디의 군더더기 수식도 없이, 선뜻

 ‘섭섭하게’라는 부사어로 허두를 이루며 출발한 기구(起句)의 시원한 맛을 들 수 있고, 둘째 연에서도

역시 한마디 군더더기도 없이 ‘이별이게’라는 부사어로 출발하여 또다시 ‘이별이게’로 끝내고 있는

점층적인 부연(承句)를 들 수 있으며, 그 다음으로는 불교의 상징적인 꽃인 ‘연꽃’을 ‘만나러 가는’이라고

표현함으로써, 첫째 연, 둘째 연과는 전혀 그 상(想)을 달리하여 표현하고 있으며(轉句), 마지막으로는

셋째 연의 정서를 이어받아 전연(全聯)을 마무리(結句)하는 데에 이르기까지, 매우 간결하면서도 어느

하나 흠 잡을 데 없는 구성을 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ㅁ. 제6시집「질마재 신화」무렵(60대)-‘해일’을 통해 본 고향의 얼굴.

  서정주의 제6시집 「질마재 神話」가 나온 것은 1975년, 그의 나이 회갑에 이르러서이다.

  이 「질마재 神話」의 ‘질마재’는, 미당의 출생지인 ‘全北 高敞郡 富安面’에 있는 마을 ‘仙雲里’의

속칭으로서, 마치 그 모양이 ‘길마’(수레를 끌 때 마소의 등에 안장같이 얹는 제구)와 같은 형국으로

된 고개, 즉 ‘길마’+‘재’->‘질마재’가 된 것이다. 

  미당은 시집 「질마재 神話」를 통하여 자꾸만 잊혀져가는 한국인의 원형적 고향을 그의 독특한

방언으로 재현시키려 하고 있으며, 산업화의 뒤안길에 자꾸만 매몰돼가는 민족의식의 뿌리를 ‘질마재’를

통하여 찾아내려 노력하고 있다. 

  이 질마재 神話」 무렵, 특히 미당의 설화시들에 나타나는 특징은, 한결같이 한국적인 고향의 설화들을

소재로 하고 있다는 점, 타향에 살면서 강한 고향 회귀의 정서를 보이고 있다는 점, 강한 회화성을 보여주고

있으며, 그것은 원형적 고향의 면면들을 가시화(可視化)해 주는 것들이라는 점, 민족의식의 뿌리를 찾아내려는 노력이 계속되고 있다는 점, 시골 사람이 쓰는 말 그대로의 어법으로 토속어, 비어들을 거침없이 사용하고

있다는 점, 한결같이 그 형태가 산문시로 이루어지고 있다는 점 등이 그 특징적인 면모들이라 할 수 있다.  

다른 일면으로 미당시의 ‘설화’의 세계는, 우리네 한국인이면 누구나 간직하고 있을 원형적 고향의 심상들을

토속어로 재구성해놓음으로써, 그것을 통하여 오늘 우리들의 삶을 성찰해 볼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 준다고

볼 수 있다. 

<해일>

  바닷물이 넘쳐서 개울을 타고 올라와서 삼대 울타리 틈으로

새어 옥수수밭 속을 지나서 마당에 흥건히 고이는 날이 우리 외

할머니네 집에는 있었습니다.  이런 날 나는 망둥이 새우 새끼를

거기서 찾노라고 이빨 속까지 너무나 기쁜 종달새 새끼 소리가

다 되어 알발로 낄낄거리며 쫓아다녔읍니다만, 항시 누에가 실

을 뽑듯이 나만 보면 옛날이야기만 무진장 하시던 외할머니는,

이때에는 왠 일인지 한 마디도 말을 않고 벌써 많이 늙은 얼굴이

엷은 노을빛처럼 불그레해져 바다쪽만 멍하니 넘어다보고 서 있

었습니다.

  그때에는 왜 그러시는지 나는 아직 미처 몰랐읍니다만, 그분

이 돌아가신 인제는 그 이유를 간신히 알긴 알 것 같습니다.  우

리 외할아버지는 배를 타고 먼 바다로 고기잡이 다니시던 漁夫

로, 내가 생겨나긴 전 어느 해 겨울의 모진 바람에 어느 바다에

선지 휘말려 빠져 버리곤 영영 돌아오지 못한 채로 있는 것이라

하니, 아마 외할머니는 그 남편의 바닷물이 자기집 마당에 몰려

들어오는 것을 보고 그렇게 말도 못 하고 얼굴만 묽어져 있었던

것이겠지요.


  이 시는 인고(忍苦)의 세월을 보냈던 한국의 여성상을 원형적 이미지로 제기하고 있다는 면에서는 ,

 <신부>와 그 모티브가 서로 같다고 할 수 있으나, 서로 다른 면을 지적한다면 전자는 다만 ‘기다림’의

한(恨)을 지닌 여인상으로 표상되는 데 반하여 후자는 분리와 회귀, 즉 헤어짐과 만남의 순환원리가

적용되고 있다는 점에서 다르다.  <해일>에 담긴 소재는 이미 제5시집「冬天」에서 자유시 형태로

시도된 바 있으나 제6시집「질마재 神話」에서 산문시 형태로 개작하게 된 것은, 아마도 작가가 자유시

형태로는 <해일>에 담긴 설화적 소재를 수용하기에 무리라는 판단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즉 이 작품이

안고 있는 설화적 요소 때문에 설화시(narrative poetry-시적화자가 외할머니의 일화를 회상하는 나레이션으로

표현)로 처리하는 것이 더 효과적이었기 때문이다. 

  「질마재 神話」의 설화시들을 통해 우리는 한국적 원형의식의 원류로서의 고향과 뿌리찾기를 통한 민족의

공동체 의식을 형성하기 위한 시인의 노력을 살펴 볼 수 있다.  이러한 민족적 원형찾기는 곧 우리 민족의

정체성과도 맞닿아 있는 것이기에 그의 노력이 갖는 문학사적 의미는 큰 것이다.  「화사집」무렵의 시인의

개인의 방황은 「귀촉도」에 이르러 안정되어 동양적인 것으로 시인의 시선을 돌리었고 「서정주 시선」에

이르러 인고의 세월을 겪은 ‘국화’로 개화했다.  이후 「동천」에서 시인의 시적 상상력은 현실의 한계를

넘어서게 되고 「질마재 神話」에 이르러 개인을 넘어 민족 공동체의 정성의 원류를 생성하기에 이르렀다. 

  ※참고문헌: 「서중주 예술언어」, 국학자료원, 송하전 지음.

             「미당 시선집」, 민음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