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창자료/황순원의 소설론

황순원의 소설에서 살펴본 서정성과 서사성의 변화 양상

묭롶 2008. 12. 23. 15:18

 

 1)황순원의 문학세계

  우리가 황순원의 작품에 대해 가지고 있는 일반화된 선입견은 그의 작품들 가운데 비교적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져 있는 몇몇 작품들을 중심으로 형성되어온 것이다. 그러한 선입견은

대부분 황순원의 문학을 깔끔하고 시적인 문체나 결벽에 가까운 미학적 순수성의 세계와

연관지어 바라보는 경향이 지배적이다.  이는 황순원의 문학세계의 특이성에서 기인한

것이라 볼 수 있다.  시인에서 시작하여 단편소설, 장편소설로 변모해가는 그의 문학세계가

가진 다면성으로 인해 그 문학 장르의 한 면목만을 주목하게 될 경우 생길 수 있는 시각차가

바로 선입견을 낳게 한 것이다.  이러한 선입견과는 다르게 황순원의 일면 단조로워 보이는

정돈된 문학세계의 이면에는 실상 눈에 잘 드러나지는 않지만 끊임없이 작용하고 있는 어떤

변화에의 욕망이 잠재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런 점에서 황순원 문학에서 보여 지는 변화의

양상들에 주목해 볼 수 있겠다.  그의 문학에서 시에서 단편소설, 장편소설로 이어지는 장르상의

이행은, 두말할 것도 없이 단순한 양적인 확대의 차원을 넘어서는 그의 문학의 주요한 질적인

변화를 내포하고 있다.  그의 시에서 단편소설로의 장르상의 이행은 그의 문학의 기법적인

변화와 소재적인 변화가 함께 맞물린 이중적인 특성을 지니고 있다.  그의 매우 주관적인 소설

기술형태를 보여주고 있는 초기의 단편들로부터, 작품의 서사적 진행과정에 대한 객관적 서술에

주력하고 있는 듯한 후기의 장편들에로 이르는 기법의 변화는, 그의 문학이 현실적인 역학관계

속에서 움직이는 다양한 인간군상들의 삶을 담는 포괄적인 그릇으로서의 소설에 대한 사실

주의적 관점을 보다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나 황순원의 작품에서 서정성에서 서사성으로의 변화가 지니는 의미는 그리 단순한 것이

아니다.  사실 황순원의 문학에서 나타나는 서정성과 서사성 그 자체도 하나의 일관된 관점으로만

설명될 수 없는 복합적인 특성과 의미를 갖는다.  이와 같은 서정성과 서사성의 상호관련 양상은

황순원 문학을 포괄적으로 다루고자 할 때 빼놓을 수 없는 논의의 항목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황순원은 자신의 문학활동을 통하여, 파격적인 수준은 아니지만, 산발적인 형태로나마 소설기법에

관한 실험적인 시도를 보여주는 작품들을 꽤 여러 편 발표했었다.  이러한 작품들은 황순원의

문학이 소극적인 형태로나마 계속해서 변화를 시도하려는 욕망 가운데 놓여 있었음을 시사해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아마도 변화에의 욕망이 어떤 지속적인 형태를 취하는 것은 황순원

문학의 장르이행과 관련해서일 것이다.  황순원 자신은 그와 같은 장르이행이 계획적인 것이라기

보다는 “지극히 자연스런 내적인 요구에 의”한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데, 아마도 그러한 내적 요구는,

장르이행에 따른 뚜렷한 단절의 현상을 드러내지는 않지만, 황순원의 문학이 외부 현실에 대해 일정한

정서적 거리감을 유지하는 개인의 주관적 서정성의 세계로부터 점차 외적 현실에 대한 적극적인

의미화를 시도하는 방향으로 그 문학적 대응의 영역을 넓혀 나갔다는 점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황순원의 문학에서 나타나는 시적 정서, 혹은 짙은 서정적 분위기는 지금까지 많은 논자들의

주목을 받아왔다.  그러나 대부분의 논의들이 주로 황순원의 단편소설들을 그 대상으로 하고 있는

데다가, 단편적인 논의의 한계를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황순원

문학의 서정성의 근원을 밝히기 위해서는 작품에 구현되어 있는 서정적 특성에 대한 규명 못지않게,

그와 같은 서정적 특성 속에 내재해 있는 작가의 의식적인, 혹은 무의식적인 지향성의 의미를 읽어

내야 할 것이다. 

  황순원의 문학에서 서정성과 서상성의 길항관계는 그의 문학이 서로 대립되는 두 가지 형태의

욕망 사이에서 움직이고 있다는 점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그 움직임의 두 가지 방향은, “안이

밖을 지배할 때 혹은 과거-꿈이 현실을 지배할 때, 나타나는 것은 시적 환상이며, 밖이 안을 지배

할 때, 혹은 현실이 과거-꿈을 압도할 때, 나타나는 것은 기록적 사실의 나열이다”라는 김현의

말에서도 시사되는 것처럼, 외부적인 대상들을 자아의 주관적인 관점으로 끌어당기려는 방향과,

외부적인 대상들의 현상적 움직임 그 자체를 향해서 자아가 스스로의 내면을 비우려는 방향이

그것이다.  이 두 가지 형태의 욕망이 은유적 상상력 내에서는 주관적인 비약을 통해서

객관적으로는 어떠한 유사성도 발견할 수 없는 대상들 사이의 파격적인 결합도 가능해지는 것이다. 

그러나 인접성의 논리에 의거한 환유적 상상력은 대상들 사이의 현상적인 전후맥락의 길을 따라간다. 

  바로 여기에서 황순원 문학의 장르이행의 실마리를 찾아볼 수 있겠다.  현실을 반영하는 데 있어

초창기 시로 출발했던 그의 문학이 은유적 상상력을 통해 현실을 자아의 주관적인 관점으로 끌어

들일 수 있었던 데 반해 단편소설로의 장르이행이 이루어진 지점에서는 은유적 상상력의 틀 안에

수용하는데 한계를 느꼈던 것이다.  그래서 단편소설로의 장르이행이 이뤄지고 난 이후 그의

서정의 변화양상은 은유적 상상력의 환유적 상상력으로의 이행과정에서 나타난 변화로 볼 수

 있을 것이다. 

  황순원의 단편소설 속에 나타나는 서정성에서 서사성으로의 변화양상을 살펴봄으로써 전부는

아니지만 커다란 그의 문학의 일부분일지라도 살펴보고자 하는 마음에서 「황소들」과 「집」에

나타난 변화의 모습을 찾아보았다. 


  2) 「황소들」

  먼저 「황소들」의 줄거리를 살펴보자.  바우는 음력으로 스무엿샛날 밤에 예사롭지 않았던

아버지로 인해 마음이 뒤숭숭하다.  오늘따라 날씨까지 흐려 깜깜이다.  바우의 짐작대로인지

안마당에는 사람들이 모이고 사람들이 헤어지고 난 후 아버지가 밖으로 나간다.  바우는

아버지가 맘이 놓이지 않아 작대기를 집어 들고 아버지의 뒤를 몰래 따른다.  아버지는 바우가

뒤따르는 것을 눈치 채지 못한 채 아랫동네로 해서 동구 밖을 지나 늙은 느티나무게로 향하더니

여럿이 모여 있는 사람들과 합류한다.  바우는 아버지와 느티나무에서 모인 사람들이 낟알

도둑을 잡기 위해 모인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보지만 사람들은 냇가를 건너 답배밭머리를 지나서

묵묵히 황소들처럼 줄지어 걷기만 한다.  이제 길은 충주로 향한 길 뿐이다.  이때 바우는

무서웠던 총대가 떠올랐지만 꾹 참고 계속 뒤따른다.  어른들은 한강 둑에 이르러 배를 타고,

바우는 어른들 몰래 같은 배에 오른다.  충주가 가까워올수록 바우는 겁이 나지만 아버지를

지켜야한다는 생각뿐이다.  환한 충주의 전등불빛이 내리비치는 곳에서 어른들은 대기하고

10시가 되자 충주 시내의 불빛이 모두 사라지자 어른들은 성난 황소들처럼 울울 밀려 내려간다. 

바우는 어른들 뒤를 쫓지만 자꾸 뒤처지기만 한다.  아버지를 찾아 나선 길에서 바우는 수척해진

김대통 영감내 마름 귀동이를 보게 된다.

  「황소들」에서 사건의 진행과정은 작품 속에서 구현되고 있는 서술화자의 의식의 변화에 의해

진행된다.  「아무래도 마음이 안 놓인다.」p97->「심상치 않은 아버지의 얼굴이었다.」p97->

「아버지에게 무슨 일이 꼭 일어날 것 같은 기미가 보인다.」p98->「오늘밤 자기는 집에 가만히

있어서는 안 된다.」p102와 같이 주인공의 의식의 흐름으로 인해 사건이 진행된다.  이 작품에서

시점은 3인칭 시점을 취하고 있으나 1인칭과 다름없는 주인공의 내면묘사 위주의 서술형태

(「바우는 그러니까 오늘 아버지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다는 것도 그게 어떠한 것이라는 걸 짐작할

수 있을 것 같았다.」p98)를 보이고 있다.  따라서 이들 작품에서 서사성의 객관적인 흐름은

서정적 주관성의 강력한 지배를 받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여기에서 화자인 바우가 갖는 서정성의

효과는 바우가 추악한 삶의 현실로부터 멀리 떨어진 천진성의 세계(「~느티나무 밑에 모인 것은

바우가 생각한 일이 일어나는 게 아니고 낟알 도둑을 잡기 위함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p103)에 속해 있다는 점에서 비롯된다고 할 수 있다.  이 작품에서 사건의 직접적인 상황은 나이

어린 초점화자의 내면을 통과해 나온 주관적 서술 속에서 어린 주인공의 의식 밖에 있는 모호하고

불확실한 미지(공포의 대상으로서의 충주)의 세계로 배후 처리되어 있다.  

  황순원은 역사의 구체적인 사실의 재현이 아니라 그러한 사건으로 인해 변화를 겪는 인간의

내면에 치중한 것으로 보인다.  「황소들」에서는 해방 전후의 혹독한 공출에 맞선 아버지를 구하기

위해 더 이상은 어린아이일 수 없는 바우의 내면의 변화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고 볼 수 있다.  p99

'할머니가 베던 베개‘->’죽은 사람이 베던 베개쯤 무어냐.  내가 몇 살이기에 그런 걸 무서워할꼬.~‘,

p102'아기지게(아직은 어린 나이임을 상징)’->‘제 작대기를 찾아 든다’, p109'무서운 총대‘->’바우는

언제까지나 아버지 편인 것이다.‘

  이러한 어린 주인공의 의식을 통해 비쳐지는 현실은 구체적인 사실성을 가진 사건으로서가 아니라

상징성을 갖는 환유적 상상력으로 표현되어진다.  「해방 전해 겨울 그 몹쓸 매를~, ~사실 그것은

 무시무시한 매질」p101->'일제의 혹독한 공출'를 상징한다.  그리고 해방 이후에도 「~춘보의

어깻죽지 위로~그러나 춘보는 첫 매에는 꿈쩍도 안 했다.~오랜 세월 영양 부족으로 희멀건 얼굴을

한 춘보는~」p107->‘해방 후에도 끝나지 않는 가혹한 공출 ’-> 춘보에게 떨어진 매는 아버지가

맞았던 매를 바우에게 연상시키며 해방 전이나 후나 세상이 바뀌지 않았음을 알려준다.  그리고 p112'

쓸개주머니 같다는 코, p117 '서 푼 변‘->’김대통 영감‘, p99 '저쪽 손톱이 타리만큼 바싹 담배를

빨다가 꽁다리를 던지는 사람’->‘거북이형’, ‘~쭈그리고 앉으며 대통에 불티를 담는 사람’->‘개똥이

아버지’와 같이 환유적 상징성을 찾아볼 수 있다. 

  특히 은유적 상상력을 통해 주관적인 연결고리를 갖지 못했던 문장들이 환유적 상상력을 통해

연결됨을 찾아보게 되는데, 이 점이 황순원이 장르이행을 위해 실험했던 부분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해본다.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거린다던 아버지의 말」p98, 「~마치 꿈틀거리듯이.

~이 꿈틀거림은 춘보의 몸에서만 아니고~, 바우 자기의 몸에서도 일시에 일어났다.」p107~108,

「~모두 꿈틀거린다.  마치 지렁이도 밟히면 꿈틀거린다는 듯이」p109에서 반복되어 나오는

‘꿈틀거림’은 p107의 ‘춘보의 눈물’, p109의 ‘아버지와 동네 사람들의 눈물’로 연결되어 p119

 ‘불길’(구체적인 사건)을 낳게 한다. 

 「황소들」에서는 시에서와 같은 언어의 절제미도 살펴볼 수 있다. 하지만 「황소들」에서의

생략은 시에서와 같은 효과를 얻기 위한 것이 아닌, 작가의 의도에 의한 배치라고 볼 수 있다. 

p104에서 「또 묵묵히 따라 마치 소들끼리 줄지어 밤길을 가는 것만 같다.  그것도 꼭 다른

소 아닌 황소들끼리.」에서 ‘소’를 강조하기 위해 다시 뒤에 ‘황소들끼리’라고 재차 적으면서도

뒷부분을 생략함으로써 여운을 남기고 있다.  황순원은 생략한 여백 속에 바우의 생각을 통해

‘황소이야기(황소가 주인을 지키기 위해 호랑이를 뿔로 받아 죽였다.)’p105 를 삽입함으로써

p104의 ‘황소들’에 연결된다.  그래서 ‘황소’는 ‘바우의 기억 속에 동네 어른에게 들은 이야기p105’를

상징하기도 하고 ‘동네 사람들p104’, '바우네 동네 사람들뿐만 아닌 듯하다.p118'를 모두 상징한다.  

 

  3) 「집」

  이제 「집」의 줄거리를 살펴보자.  전필수는 소작농으로 평생을 고생과 굶주림으로 허덕인

할아버지와 아버지를 보면서 기회만 된다면 농토를 넉넉히 장만하겠다는 열망을 가져왔다. 

서울에서 조그만 고물상을 하던 그는 8.15 직후 일본인의 물건을 교묘하게 사고팔고 하여 큰돈을

잡게 되자, 토지중개인에게서 민창호네 농토 애기를 듣고 민창호의 땅을 구입하게 된다.  전필수는

토지를 구입한 후 동네 사람들의 노염을 사서 쫓겨난 민창호와는 달리 동네 사람들에게 예의를

지켰고 후한 인심을 베풀어 동네 사람들의 칭송을 듣게 된다.  그러한 전필수에게 고민이 있었으니,

바로 자신의 기와집 뒤편으로 담장에 꼭 붙어 쓰러져 가는 막동이네 집이 그것이었다.  전필수는

막동이네 초가집을 사들여 과일나무를 심을 계획을 세웠는데, 막동이네 할아버지가 이미 민창호가

살던 시절부터 팔지 않겠다고 고집을 부리던 터라 내색하지는 못하고 속으로 방법만 궁리할 뿐이다. 

이때 마침 막동이 아버지가 몸소 자기네 터전을 안고 전필수 앞에 돈을 빌리러 나타난 것이다. 

전필수는 막동이 아버지에게 마지못해 응하는 식으로 돈을 빌려주었지만 드디어 막동이네 초가집을

사들인 방법이 생긴 것 같아 기뻐한다.  하지만 막동이 아버지가 빌린 돈으로 투전을 했다는 소문을

듣자, 막동이 할아버지가 일부러 돈을 빌려줘서 자신들을 쫓으려 했다고 오해할까봐 미리 선수를

쳐서 막동이 아버지가 자신에게 돈을 빌려서 투전을 했다는 소문을 내게 된다.  이 소문을 들은

막동이 할아버지는 아들을 원망할 뿐 어찌할 도리 없이 전필수의 의견대로 전필수의 농막으로

이사하기로 한다.  하지만 투전으로 돈을 잃었다는 소문과는 달리 막동이 아버지는 돈뭉치를

가져와 전필수에게 이사를 없었던 것으로 하고 막동이 할아버지의 전답을 돌려줄 것을 요구한다. 

전필수는 이에 별 수 없다는 식으로 잡고 있던 터전을 막동이 아버지에게 돌려준다.  막동이

아버지는 이제 다시는 자신의 손으로 터전을 팔지 않겠다고 마음을 먹지만 그 이튿날 아침

자기네 낡은 집 밑에 시체가 되어 발견된다.  전필수는 이에 막동이 할아버지에게 새 집을 지을

때까지 자신의 농막에 머물 것을 권한다.  이 모습을 본 송생원은 언젠가 막동이네 집이

전필수에게 넘어가고 말리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집」은 황순원 문학작품이 서정성에서 서사성으로 넘어가는 서술방식을 찾아 볼 수 있는

작품이다.  「집」에서는 작중화자의 전지적 시점이, 서술의 초점이 되고 있는 작중 인물의 의식이나

태도에 대해 객관화된 관찰적 거리를 유지하고 있다.  그와 동시에 작중상황이나 인물에 대한 사실적인

세부묘사 또한 상당히 적극적으로 활용되고 있다.  

  「막동이 아버지는 전필수에게 돈으로 도로 가져오면 터전을 물러달라던 다음날도 지나 보냈다. 

막동이 아버지는 이미 그런 것은 잊고 있었다.  그새도 뱁새만은 몇 번이나 판의 기미를 보아 들어

앉았다 물러났다 하며 돈냥이나 족히 따서 제 것을 만들고 있었다.  처음에 막동이 아버지는 재수

없다고 뱁새가 판에 끼는 걸 마다했으나, 뱁새는 그런 데는 아랑곳없이 그냥 낌새를 보아 드나

들었는데, 나중에는 막동이 아버지도 투전에만 열이 떠 뱁새가 하는 짓은 눈에 보이지도 않는 듯 했다. 

영락없이 열병 앓는 사람의 짓이었다.  그러기에 잡기판이 파하는 때면 정말 중한 열병이나 앓고 난

사람처럼 얼굴에 그늘이 지고 온몸이 느른해지는 것이었다.  그러면 이것은 또 무슨 약이기나 하는

듯이 술을 마시는 것이었다.  」p133~134

  이와 같은 사실주의적인 세부묘사는 작중현실이 시적으로 압축된 이미지로 연결되어 있는 간결한

묘사체의 문장들이나 설화적인 아우라로 감싸여진 현실이 아니라, 보다 사실주의적인 현장성이 강화된

현실로 나타나며, 따라서 서정성보다는 서사성이 작품을 이끌어 가는 주요한 힘을 발휘하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집」은 어떤 한 인물의 의식을 통해서가 아니라, 해방 후의 토지개혁을 배경으로 여러

인물들의 욕망과 이해관계가 서로 엇갈리면서 일어나는 사건들의 뒤얽힘 자체를 작가의 엄정하게

객관화된 서술을 통해 전개해나감으로써 사실주의적인 성격을 보다 더 강하게 드러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 작품이 전지적 작가 시점으로 관찰하고 있는 인물들은 ‘전필수’, ‘막동이 할아버지’,

 ‘막동이 아버지’ 이렇게 세 명이다.  작가는 「서당골에는 어제오늘 새 소문이 하나 났다.  막동이

아버지가 윗골 소 사러 갔다가 다시 투전 바람이 났다는 것이다.」p125, 와 같이 소설의 초점화자가

주인공과 관계되어 있지 않은 단순히 소문을 들은 제 3자임을 우회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또한

이 작품은 초점화자가 관찰하고 있는 각각의 주인공들이 서로 하나의(막동이네 터전) 매개체로 인해

갈등하는 모습을, 각각의 관점에서 다른 이야기로 펼쳐 내고 있다.  또 그러한 이야기가 독자는 알고

있지만 세 명의 주인공 서로는 사실을 알지 못한 채 진행되고 있어 과연 그것이 언제 밝혀질 것인가에

대한 독자의 호기심을 고조시킨다.

   하지만 「집」에서의 사건 전개는 서사성에만 의존해서 전개되지는 않는다.  「황소들」에서

‘바우’의 의식의 전개에 의해 작품을 이끌어 나갔다면, 「집」에서의 사건전개에는 ‘전필수’의

의식이 대목마다 삽입되어, 이것 또한 사건 전개에 중요한 연결고리가 되고 있다.

  「~전필수는 옳다구나 했다.  땅 팔 사람에게 그런 약점이 있으니 헐값으로 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동네 사람들한테 쫓겨난 지주의 뒷자리니 조금만 잘해나가면 도리어 인심을 얻을 수가 있을

것이다.」127

    -> ① 전필수가 민창호네 농토를 구매하게 됨.

  「~전필수는 이 막동이네 터전을 사기 위해 사람을 내세우기는커녕 누구에게나, 비록 술좌석

에서라도 비치는 법조차 없었다.  ~이 좋은 기회란 언제고 오고야 만다는 것을 믿고 있었다.」p130

    -> ② 전필수가 막동이네 터전을 구입하고 싶어함.

  「~전필수는 여기서도 쾌히 그러라고 했다.  앞으로 이런 동네 사람들과는 모든 일에 있어 이렇게

한 수 지는 것처럼 해야 한다.」p132

    -> ③ 막동이네 터전을 담보로 잡음.

 「~전필수는 뜻하지 않았던 아버지가 투전꾼이라는 것을 알게 되자 아차 실수했구나 했다.」p137

    -> ④ 전필수는 막동이 아버지가 터전을 담보로 돈을 빌렸다는 소문을 냄.

「~전필수는 ~막동이 할아버지를 향해, 새 집을 짓고 들때까지 아무 염려 말고 여기 계시라는 말을

했다.  그저 넘어진 자기네 담장만은 좀 손질을 해달라고 하면서.」p154

   -> ⑤ 언젠가는 막동이네 터전을 손에 넣으리라는 사전포석을 놓음.

  「집」에서는 해방이후 현실을 ‘막동이 할아버지’,‘ 막동이’ 와 ‘막동이 아버지’의 갈등상황을 통해

표출하고 있다.  여기에서 ‘막동이 할아버지’와 ‘막동이’는 절망적인 현실에도 임에도 그 안에서

끈질기게 살아가는 민초들의 삶을 대변하는 인물로 볼 수 있다.

「막동이 할아버지의 속셈은 개똥밭을 팔아가지고 그 밭이 세 곱은 실히 되는 야산을 사 최묻이(개간)

를 하여 완전한 밭을 만들려는 데 있었다.  ~그리고 막동이 할아버지는 생각한 것이었다.  땅이란 원래

기름진 땅이 있는 게 아니고 걸우고 다루는 데 달린 거라고~」p138, 「봄에 나가 막동이 할아버지는

최묻이 땅에 아모니를 주면서~지금 자기가 들어서 있는 땅이 이미 자기 땅이 아니요 남의 땅이라는

생각 따위는 잊은 듯, 자기가 뿌리는 설탕 가루를 땅이 즐기는 것처럼 느껴져 절로 흡족해지는

것이었다.  」p141, 「그러나 막동이 할아버지는 죽으려도 죽을 겨를이 없었다.  다른 곳은 다

만두고라도 그 논바닥이 드러날 적마다 풀투성이가 되곤 하는 천둥지기의 김은 어떻게 하느냐,

막동이 할아버지는 우선 들로 나가야 했다.  」p142, 「~아들의 장례가 있은 다음날 막동이 할아버지는

집안 식구들을 데리고 전필수네 담장을 고치기 시작했다.  누구의 입에서도 말이 없었다.  」p154

  자신의 할아버지 대부터 공들여 걸운 개똥밭을 잃고도, 최묻이 밭에 엄청난 공출이 매겨져 이를 다시

팔고 소작농이 되어도, 아들이 죽어도 바로 그 다음날 또 모진 삶을 이어나가야 하는 민초들의 아픔이

‘막동이 할아버지’를 통해 표출되고 있다.  또한 해방 이후의 모진 삶은 어린이라고 해서 비켜가지 않는다. 

「~그제야 막동이는 그 ‘충혈’된 눈을 뜨고, 그래도 귀에 꽂은 할미꽃 뿌리 때문에 잘 못 알아들은 듯이

 ~막동이는 벌떡 일어났다.  보니 벌들이 세간나가고 있는 것이었다.  ~막동이는 ‘허든거리는’ 다리로

‘뙤약볕’ 속을 큰일났다고 에에 소리를 지르며 벌떼 뭉치를 따라갔다.  ~첫 가지를 붙들기 전에 맥없이

 미끄러져내리고 말았다.  ~벌에게 여기저기 쏘여가며 ~막동이는 그만 방바닥에 고꾸라지듯이 나가

쓰러졌다.」p146~148.

  학질에 걸려 열에 들떠서 정신까지 혼미한 지경의 어린애에게도 해방 이후의 모진 삶은 병중에도

벌떼를 찾아올 수밖에 없는 길로 내몰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막동이 할아버지’와 ‘막동이’가 현실에 굴복하지 않는 긍정적 인물이라면 이의 반대편에 ‘막동이

아버지’가 있다.  이를 작가는 ‘막동이’의 ‘열병’과 ‘막동이 아버지’의 ‘열병’으로 대치시킨다. 

  「~나중에는 막동이 아버지도 투전에만 열이 떠 뱁새가 하는 짓은 눈에 보이지도 않는 듯했다. 

영락없이 ‘열병’ 앓는 사람의 짓이었다.  그러기에 잡기판이 파하는 때면 정말 중한 ‘열병’이나 앓고

난 사람처럼 얼굴에 그늘이 지고 온몸이 나른해지는 것이었다.」p134, 「~막동이 아버지는 다시

내려왔다.  두 통 남은 꿀통에서 또 한 통을 지고 갈 판이었다.  이런 막동이 아버지는 열병 환자

그것이었다.」p135

  -> '막동이 아버지‘의 ’열병‘ .

  「~다음날 낮부터 막동이는 다시 달달 떨다가 온몸이 불덩이처럼 돼버렸다.  일학이 분명했다.」

p146, 「그새 할미꽃 뿌리의 효험을 봐서인지 또는 어제오늘 너무 놀란 탓인지 학질만은 나아

가지고, 헬쑥해서 앉아 있는 막동이」p153-> '막동이’의 ‘열병’.

  이상과 같이 ‘막동이’의 열병이 ‘어제오늘 너무 놀란 탓’인지 나을 수 있었던 ‘열병’이었던 데 반해

‘막동이 아버지’의 열병은 작두로 엄지손가락을 찧고 십년을 참았어도 한 순간을 참지 못해 결국

죽음으로 ‘열병’에 패배하고 마는 양상을 보인다. 

  결국 황순원은 해방이후 현실을 있는 사실 그대로 표현하는 것이 아닌 그 속에서 현실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그려냄으로써 오히려 그 삶의 정서까지를 핍진하게 담아내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참고문헌: 「황순원 단편선」, 문학과지성사 한국문학전집08.

              「황순원 문학의 설화성과 근대성」, 소명출판, 박혜경 지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