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

'꼬막'

묭롶 2008. 11. 24. 15:16

 

  일요일 벌교를 다녀왔다.  나는 벌교라는 지명을 고등학교 2학년때 '태백산맥'을 통해 처음 접하게

되었다.  정하섭과 소화가 만났던 다리며 외서댁이 살았던 들몰마을, 그리고 빨갱이 가족으로 분류되어

소작을 떼인 염상진의 처가 자식들과 먹고 살기 위해 얼음진 뻘밭을 뒤져야 했던 갯벌이 있는 곳....

내게 벌교는 '태백산맥'과 떼어서 생각할 수 없는 곳이었다.

 

  언젠가 같이 근무하는 직원의 증조할머니가 돌아가셔서 벌교 읍내에서 조금 떨어진 마을로 직원들과

조문을 간 적이 있었다.  아마도 지금과 같은 11월 말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싸한 밤공기 속으로

따스한 노란 불빛이 비추던 좁은 돌담장길은 '태백산맥'을 읽으며 내가 상상했던 '들몰마을', 바로

그 곳이었다.  허름한 한옥에 너른 마당...하얀 천막 밑에는 마을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 술을 마시고

있었고, 그 한켠으로는 윷을 노는 남정네들이 보였다.  우리는 조문을 한 후 아궁이 불을 떼는 조그만

건넌방으로 들어가서 꼬막을 먹었다.  그때까지도 꼬막을 먹지 않았던 나는 그날 직원들과 아궁이에

얹힌 커다란 가마솥에서 방금 삶아서 건져낸 김이 모락모락나는 꼬막 맛에 흠뻑 빠져서 옷과 입주위에

온통 꼬막 피로 칠갑을 하면서도 몰랐다.  그날 문간방에 들어앉아 말도 하지 않고 꼬막 10KG을 전부

먹어치운 우리를 보며 직원의 이모할머니는 "무신 사람들이 상가집와서는 말도 안하고 꼬막만 묵응디야?"

,"에고 이자 사논거 다 묵어불어서 없쏘잉.."하고는 꼬막을 젖던 나무 주걱을 들고 기가 차다는 표정으로

웃으셨다.  그제서야 정신을 차린 우리 일행은 아무리 호상이라지만 너무 체면을 못 챙기고 먹는거에

열중했던 것에 무안함을 느껴 뜨끈한 방바닥 위에서 얼굴이 발그레해졌다.  이모할머니는 그런 우릴 보고

또, "잉.... 온 사람들이 따땃하니..잘 묵고 웃고가서 가신 양반도 오질 것이여.. 잘했소"하셨다. 

 

  그날밤 내 기억 속의 상가집은 '축제' 같았다.  동전의 양면처럼 삶과 함께해온 죽음이건만 사람들은

이를 두려워하며 경계해왔으나 그런 죽음까지도 '축제'에 함께 동석해서 '꼬막'을 함께 맛보았을거란

생각이 들었다.  내가 태백산맥 속에서 읽은 꼬막에 대한 구절들은 그렇게 막막한 삶을 끈질기게

이어 나가는 민초들의 삶과 닮아 있었다.  11월에서 봄까지의 얼음 어는 갯뻘 속의 꼬막과 그 꼬막을

닮은 민초들의 삶이 같이 어우러진 그 맛은 인생이라는 갯벌에서 뒹구는 우리네 일상처럼 거칠고

골이 진 껍질 속에 찰지고 쫄깃하게 인생의 간이 간간하게 베여있었다. 

 

꼬막은 다른 조개들과 달리 다루기가 꽤는 어려웠다. 모래밭에 사는 조개들과는 달리 뻘밭을 집으로

삼고 사는 꼬막은 온몸에 거무스름한 갯뻘을 맥질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 씻는 것부터가 다른 조개에 비해

힘과 정성이 몇 곱으로 들었다. 힘과 정성이 몇 곱으로 드는 것은 갯뻘이 묻어서만이 아니었다. 그 껍질의

생김 때문이었다. 대부분의 조개는 그 껍질이 매끈거리게 마련인데 꼬막의 껍질은 수없이 많은 골이 패어

있었다...

 

  ...꼬막을 캐서라도 살아가리라 했던 지난번의 생각이 그대로 되살아났다. "시상사람덜이 저저끔 몸 놀리고

일혀서 묵고살기로는 매한가진디, 거그에 상하귀천이 논두렁 막대끼 딱허니 정해져 있는 겨. 고것얼 가만히

따지고 보면 심이 들고 목심이 위태로운 일일수록 천허고, 몸 덜 놀리고 편헐수록 귀헌 것이여. 고것이 당연

헌 것인지 암스롱도 워쩔 때는 불쑥 틀렸다는 생각이 드는 겨. 고것이 언젠고 허먼, 엄동설한에 뻘밭에서...

 

  ...꼬막을 캐낼 수 있는 것은 빈한한 사람들에게 다행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그 꼬막이라는 것이 빈한을 면하게 해주지는 못했다. 꼬막이 자갈밭의 자갈처럼 흩어져 있는 것도 아니었고, 꼬막을 캐는 뻘밭일이 그렇게 쉬운 것도 아니었다. 꼬막은 찬 바람이 일면서 쫄깃거리는 제맛이 나기 때문에 천생 뻘일은 겨울이 제철이었다. 꼬막은 뻘밭이 깊을수록 알이 굵었다. 뻘밭이 깊으면 발이 그만큼 깊이 빠지는 걸 알면서도 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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