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노트/[파리대왕]

윌리엄 골딩의 1983년 노벨상 수상작 [파리대왕] '인간의 원죄의 기원'

묭롶 2008. 11. 16. 00:58

 

  윌리엄 골딩의 첫 장편소설이자 출세작인 [파리대왕]은 1954년, 그의 나이 43세 때

출간되었고 1983년 <사실적인 설화 예술의 명쾌함과 현대의 인간 조건을 신비스럽게

조명하여 다양성과 보편성을 보여주었다>는 수상 이유와 함께 노벨 문학상을 수상

하였다. 

 

  [파리대왕]에는 비행기로 이동 중 섬에 추락한 5살부터 12살까지의 한 무리의 소년들의

섬생활을 그린 작품으로, 구조에 대한 희망을 버리지 않고 봉화를 올려야 한다고

주장하는 랠프, 피기, 쌍둥이(샘과 에릭)와 멧돼지 사냥으로 대표되는 본능적인 욕구에 따른 삶을 살려는

잭 일당의 대립이 그려져 있다. 

 

  [파리대왕]에서 '소라'(민주적인 의회정치를 상징)와 피기의 안경(불을 피울 수 있는 도구와 명징한

지혜를 상징)은 문명성을 그리고 잭과 그 일당이 얼굴에 칠한 진흙은 야만성을 각각 상징한다.  본능적인

욕구를 위한 폭력 앞에 '소라'나 '안경'이 갖는 문명성의 힘은 약하다.  랠프는 끝까지 야만성에 대응하여

자신들이 문명인임을 설득하려 하나 야만인에게 그는 욕망충족의 걸림돌일 뿐이다. 

  소년들은 섬에 조난당한 후 두려움에 사로잡히지만 그들은 애써 그들에게 공포감을 주는 존재에 대한

인식을 피한다.  사이먼은 이들 소년들의 공포심의 근원을  알게 되고 이를 소년들에게 알려주려고 하지만

광기서린 축제의식을 치르는 그들에 의해 죽음을 맞게 된다.  가면을 칠한 인간은 어둠 속에서 어떤 행동이

라도 저지를 수 있는 존재들이다.  날이 밝으면 불편한 진실은 외면하거나 잊어버리면 되기 때문이다. 

가면을 칠한 소년들(익명성)은 생존과 욕망충족만이 중요하며 그들이 저지른 죄(원죄)에 대한 면죄부(막대기에

꽂은 멧돼지 머리-즉 파리대왕)를 구하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사이먼이 직시한 공포의 정체가 바로 '인간(소년)의 원죄'이다.  원죄에 대한 구원을 얻기 위해 가면을 쓴

소년들은 자신들의 공포감의 정체에 대한 직시보다는 제물(파리대왕)을 바침으로써 면죄부를 구하려 한다.

[~그 짐승 일일랑 잊어비리기로 해]

[~그리고 그 짐승 애긴데, 우리가 멧돼지를 잡거든 얼마를 그 짐승에게 넘겨주기로 해.  그러면 아마

그건 우리에게 귀찮게 굴지 않을 거야] p199

 

  [파리대왕]에서 멧돼지는 소년들을 문명에서 야만으로 돌아서게 만드는 기제(機制)가 된다.  랠프를

대장으로 선정하고 피기를 지혜로운 실무로 삼아 소라를 통해 민주적으로 운영되려던 공동체는 멧돼지

사냥으로 고무된 잭으로 인해 대부분의 소년들이 멧돼지 고기가 주는 욕망에 사로잡혀 랠프 일행을

돌아서게 만드는 계기가 된다.  그들은 멧돼지로 상징되는 자신들의 욕망의 대가로 그 일부를 '짐승'

(원죄)에게 제물로 바치는 것이다.  또한 멧돼지 사냥은 잭을 대장을 하는 새로운 공동체를 형성하게

하고 욕망의 분출로 인한 부끄러움을 감추기 위해 얼굴에 야만의 가면(진흙칠)을 쓰게 했다.

[~욕정으로 그들은 암퇘지에 결합되어 있었고 오랜 추적과 핏자국으로 해서 흥분되어 있었다.]p201

[~뜨거운 피가 두 손에 함빡 튀어올랐다.  밑에 깔린 암퇘지는 축 늘어지고 소년들은 나른해지며 이제

원을 풀었다.]p202

 

  하지만 소년들이 짐승을 위해 선물한 신성한 제물은 온통 파리로 들끓어 소년들의 욕망의 추악성을

드러낸다.  사이먼이 마주친 진실이 바로 이 인간이 갖고 있는 추악한 원죄이다. 

[~넌 그것을 알고 있었지?  내가 너희들의 일부분이란 것을.  아주 가깝고 가까운 일부분이란 말이야.  ]p214

 

  바로 어떠한 상황만 주어지면 인간은 얼마든지 타인에게 잔인해질 수 있으며 자신을 위해 남을 죽일 수까지

있다는 그 사실이 '파리대왕'이 사이먼에게 주는 진실이다.  또한 이러한 욕망은 문명이라는 옷을 입은

랠프와 피기(이들도 욕망을 가진 존재이므로)까지도 그 살육의 야만 속에 동참시키는 힘을 갖는다.   

 

  에덴동산에서 선악과를 따먹으면서 시작되었다는 인간의 원죄의 다른 이름은 '욕망'일 것이다.  인간은

그럴싸한 문명 속의 삶을 영위하지만 그 가면의 이면에는 남의 것을 빼앗아서라도 내 것을 충족하고 싶은

욕망이 용암처럼 뜨겁게 흐르고 있다.  [파리대왕]의 어린 소년들이 학습을 하지 않았음에도 새로운 야만의

공동체(욕망을 위한 이익집단)를 설립하고 공동체를 위협하는 적을 살육하며 죄를 씻기위해 주문을 외우고

의식을 치르며 제물을 올리는 일련의 과정들은 바로 태초부터 인류의 핏속을 흘러온 원죄의 시커먼 정체를

증거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