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노트/낙원

미야베 미유키의 '낙원' : 세 여자의 숨겨진 진실

묭롶 2008. 11. 9. 00:27

  이미 『모방범』으로 국내에 잘 알려진 미야베 미유키의 신작 『낙원』은

그 전작과는 다르게 작품 속에서의 사건의 진행 속도가 좀 더디며 중간중간

멈칫거린 듯 한 느낌이 든다.  이는 전작인 『모방범』에서 주인공인 마에하타

시게코가 퍼즐 조각처럼 흩어져 있는 사건의 완성형을 맞추기 위해 그 사건들

속에서 움직였다면, 『낙원』에서의 사건은 그 전작보다는 퍼즐 조각이 더 작지만

그 안에 더 큰 알레고리를 숨기고 있다는 점에서 차이를 보인다. 

 사건들은 사건 속에 반전이 있을것이라는 기대를 품었던 내 생각과 다르게 처음

공개된 결과와 원인이 그대로 진행이 되지만, 그 속에 숨겨진  알레고리를 풀기 위한

화자의 사고를 통해 이야기가 진행이 되기 때문에 독서를 통해 이 과정을 지켜보는

독자는 마에하타 시게코의 사고가 멈춘 지점에서 같이 멈추게 되고 그 사건의 이면에

숨겨진 진실에 궁금증을 갖게 되는 것이다.

  사실 그 전작에 비해 이 작품이 주는 '반전의 충격'은 약하다.  그러나 드러난

진실이 우리에게 던져주는 것들은 가볍지 않다.  이미 『모방범』에서 발생한 것과

유사한 범죄의 수 많은 '모방범'들이 우리와 같은 사회 속에 존재할 수 있다는 가능성

우리에게 충격을 주었다.  아마도 작가는 이러한 '모방범'들이 양산되는 그 시작점이

어딘가에 대한 고찰이 있었던 것 같다.  이제 사건은 부모에 의해 16년 전에 살해 된 뒤 집 마루에 묻혀 있던 한 소녀의 사건에서부터 출발한다.  전작에서 쓰레기통에서 발견된 손목으로 시작되었던 사건은 한 가족에 얽힌 살인사건에서부터 시작된다.

 

  마에하타 시게코는 '산장연쇄살인사건' 이후 9년이 지난 지금도 그 사건의 악몽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오랫동안 그 사건과 다시금 직면하는 것에 두려움을 느껴 글도 쓰지 못했고 남편과의 사이도 한 때 위태로웠으나 시부모님이 타계한 이 후 우여곡절을

겪으며 남편과는 돈독해졌고 얼마전부터 프리라이터로 잡지 기고글을 쓰고 있다. 

  어느날 그녀는 교통사고로 죽은 자신의 아들에 대해 조사해 달라는 하기타니 도시코의

부탁에 처음에는 동정에서 일을 시작하지만 도시코의 죽은 아들인 히토시가 그린 산장

그림을 보는 순간 아직까지도 자신을 옭매고 있는 9년 전 사건의 잔영을 의식하고는 본격적으로 조사에 임한다.

  히토시는 열 두살의 나이로 죽기 전 기타센주 쪽에서 일어난 방화 사건과 관련된 그림을 그렸는데 그 그림

속에 마루 밑에 뭍혀 있던 아카네로 추정되는 소녀가 있었고, 시게코는 이 소년의 능력이 과연 사이코메트리(물건이나 사람과의 접촉을 통해 그 속에서 사건의 기억 내지는 잔상을 떠올리는 능력)인지를 조사해나가게 된다.

  시게코는 히토시가 어떤 식으로든 그 사건에 대해 알고 있는 사람과 접촉했을거라는 심증을 가지고 살인사건과

관계된 인물들을 만나게 되고, 그 결과 16년 전의 살해사건과 관련된 숨겨진 진실을 밝혀내게 된다.

 

  '16년 전에 부모에 의해 살해된 소녀'라는 사건에서 시작된 이 작품에는 세 명의 어머니가 나온다.  16년 전에

자신의 딸인 아카네를 죽여 마루 밑에 묻고서 그 집에서 다른 딸인 세이코를 키운 도이자키 고코와 예기치 않았던 임신으로 인해 가족과 떨어져 자신의 전부로 알고 키워온 아들 히토시를 교통사고로 잃은 하기타니 도시코,

그리고 32살이 되기까지 온갖 범죄를 저지르는 아들이지만 아들(미와 아키오)을 끝까지 감싸려 한 미와 나오코가

등장한다.   고쿄는 인륜을 저버린 범죄를 저지르고도 아무런 죄의식도 느끼지 못한 채 자신의 상처만을 내세우는 딸을 치유해보려 했으나 한계를 느끼고 자신이 낳은 아카네의 목숨을 자신의 손으로 거둔다.  딸(아카네)이

저지른 범죄로 인해 또 다른 딸(시게코)의 인생마저 망칠 수는 없었기에 딸의 목숨을 거둔 어미로 16년 동안의

형벌같은 삶을 감내한다.  도시코는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난 아들 히토시의 죽음을 받아들이기 위해 아들이

남긴 그림의 의미를 알고자 한다.  아들과의 모든 기억을 공유하고 싶고, 또 그런 기억을 간직하고 싶은

도시코에게 히토시가 그린 의미 모를 그림들은 그녀가 풀기에는 어려운 것이었다.  나오코는 아들(미와 아키오)이 온갖가지 나쁜 일을 저질러왔으나 언젠가는 착한 아들로 돌아올거라는 믿음 속에 아들의 삶을 어떻게든 보호하려 애쓴다.  이 세 명의 어머니들은 자식을 사랑한다는 점에서는 차이가 없지만 이를 표현하는 방식에서는

차이를 보인다.  나오코나 고코는 마에하타 시게코에게 자신들의 방식이 옳다고 말한다.  한 명의 어머니는

자식의 비행을 죽음으로 종결지었고, 또 다른 어머니는 자식을 보호함으로써 더 많은 피해자를 만들었다.

그 두 명의 다름을 연결하는 지점에 도시코가 있다.  엄밀히 말하면 아카네의 '낙원'과 그 이면의 모습을

보았던 히토시가 있었다.  히토시가 그림을 통해 나타내려 했던 양면성의 세계(낙원과 현실)를 풀어낸 순간

연결점이 없어 보였던 사건은 또 하나의 어린아이 실종사건을 통해 연결되며 사건이 종결된다.

 

  『낙원』은 그렇게 자신만의 '낙원'을 위해 자신의 현실 속에 범죄를 끌어들이고도 죄책감을 느끼지

못하는 인간의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낙원'이 주는 충격은 이 사회 속에 무수히 많은 '아카네'가 살고 있다는 점이다.  그래도 아직까지는 마지막 보루라고 믿고 있던 가족 내에서도 해결하기 어려운 '아카네'들을 어떻게

해야하느냐며 고코와 나오코를 빌어 우리에게 묻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