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창자료/디지털스토리텔링(2)

하이퍼텍스트와 팩션

묭롶 2008. 10. 27. 14:02

 

  문자의 발명이후, 문자는 그 시대의 역사, 예술, 문화 등을 기록을 통해 반영하는 수단이 되어왔다. 

인류는 문자를 읽음으로써 과거의 문화를 읽고 지혜를 습득했으며 또 그 문화를 다시 후대에

전승할 수 있었다.  문자의 이런 기능으로 인해 문자의 대표적 기록양식인 문학은 오랜 세월

그 인문학적 지위를 영위했었다.  그러나 활자 인쇄술의 발견 이후 갑자기 늘어난 지식과 정보의

홍수, 과학의 발달로 인해 문자는 그 안에 시대상을 온전히 담아내지 못하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이 심화되면서 문자는 동 시대와 미묘하게 엇갈린 괴리감은 커지게 되었고, 이러한 괴리감은

영상매체와 컴퓨터의 출현으로 인해 더 가속화되었다.  그리하여 문자의 대표적인 표현양식인

문학은 더 큰 위기를 맞게 되었고 결국 ‘작가의 죽음(탈이야기)’이라는 상황에 직면하게 되었다. 

이런 문학의 위기와는 반대로 영상매체와 컴퓨터를 비롯한 다양한 매체들로부터 생성된 새로운

문자 표현 양식들은 지금도 우리 앞에 다양하게 나타나고 있다. 

  과거 우리가 책을 읽으며 혼자서 느꼈던 상상의 세계는 현재 우리 앞에 부지불식간에

가상현실이라는 체험 가능한 공간으로 다가왔다.  또한 ‘이야기’들은 우리의 생활(CF, 영화, 게임)

속으로 들어옴으로써 과거에 문자의 수용자였던 우리를 새로운 ‘이야기’의 창작 공간 속으로

불러들이고 있다. 

  예를 들어 ‘2%부족할 때’ 음료 CF를 생각해 보자.  이전의 광고영상들이 일방적으로 소비자에게

상품이미지를 전달하기 위해 치중했던 반면 이 음료광고는 광고를 통해 시청자들의 호기심을

자극한 다음, 소비자가 그 속에 담겨있는 ‘이야기’에 궁금증을 느끼도록 만들고 있다.  그래서

궁금증을 느낀 소비자가 직접 상품을 제조하는 회사의 홈페이지에 들어가 ‘이야기’를 읽고

‘이야기’를 덧붙임으로써 또 다른 ‘이야기’를 만들어내도록 소비자의 참여를 이끌어내고 있다. 

이 음료광고 CF이후 이러한 유형의 광고는 현재까지도 만들어지고 있으며 최근에는 LG생활건강의

 ‘후’화장품 CF에서 이러한 ‘이야기’를 만들어가고 있다.  영화의 경우에도 ‘매트릭스’를 살펴보면

우리가 실제라고 믿고 있는 세상은 사실은 컴퓨터가 만들어낸 ‘0’과 ‘1’의 가상의 공간이었다는

설정은, 우리에게 현재 살아가는 세계마저도 믿지 못하게 만드는 정체성의 혼란과 그 세계 속에서

절대적으로 독립적인 존재는 있을 수 없음을 깨닫게 만든다.  패러디로 시작된 ‘원전의 재창조’,

‘작가의 죽음’은 결국 컴퓨터라는 매체를 통해 절대적인 것(문학, 문화전반)이 없음을 깨닫게 된

인류의 자각으로부터 기인했다고도 볼 수 있겠다.  또한 여기에서 기존의 문자시대의 ‘이야기’의

한계를  벗어나 인류의 새로운 상상력을 담아낼 수 있는 새로운 ‘이야기’체계를 필요로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비트체계 내에서 모든 매체들은 그 속에서 서로 혼용, 변용, 재창조 될 수

있으며, 이를 가능하게 하는 매체들이 바로 하이퍼텍스트를 기반으로 하는 하이퍼텍스트소설,

팩션, 메타픽션, 하이퍼픽션, 하이퍼미디어 등이다.  이들 매체들이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비선형성과 양방향성은 과거 문자시대와는 다른 상상력을 표현하는 것을 가능하게 해 준다. 

 

  과거 구술문화에의 ‘이야기’는 문자 시대에는 문자라는 틀 속에서 기능했고, 이제 ‘이야기’는

그 틀을 벗어나 다시 우리 곁으로 돌아왔다.  아래에서는 현재 우리가 목도하고 있는 문학의

위기(작가의 죽음, 탈이야기)와 관련하여 새로운 상상력의 표현 양식으로 대두된 하이퍼텍스트성과

팩션에 대해 그 특성을 살펴보고자 한다. 

 

  <디지털 서사의 특징>

  이야기는 원시 시대부터 존재한 표현 양식이었으나 시대와 이를 반영하는 다양한 매체의 변화에

발맞춰 다양한 형태를 빌어 표현되었다.  문자가 발명된 이후에는 문학이 있었고, 영상을 매체로

한 영화, 드라마가 있었으며 디지털 매체가 탄생한 후에는 그것을 매체로 한 디지털 서사들이

나오고 있다.  디지털 서사는 양방향성(interacitivy)․비선조성(nonlinarity)․통합성의 특성을 지닌다. 

  이러한 디지털 서사의 특성은 과거 구술문화의 특성인 다중매체성, 자유로운 상상력, 독자의

참여가능성등과도 닮아있다.  활자문화 시대에는 말을 문자라는 정형화된 틀에 시각적으로

귀속시켜서 인간의 내면의식, 무의식적 자원을 사물, 비인격적인 것으로 격리시켰다. 

이와 달리 디지털 서사는 그 표현 방식을 비트(0,1)속에 담음으로써 통합적 메시지의 출현을 가능하게

하고 그 영역을 확장시켜나가고 있다. 

  디지털의 양방향성 때문에 독자는 자신의 행동에 즉각적인 반응을 받을 수 있고 결국 마음의 상태가

관조가 아닌 참여가 된다.  독자는 텍스트를 대상으로부터 떨어져 감상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에

부딪쳐 대상을 변화시키고 자신도 변화를 일으킨다.  글 읽기의 방식과 참여놀이의 방식이 합쳐지면서

두 종류와는 또 다른 제3의 방식이 창출되는 것이 하이퍼텍스트 문학 읽기이다.  그러한 점에서

디지털 서사(e-narrative)는 참여와 행위의 과정이 중시되는 구비문학의 속성과 매우 닮아 있다. 

 

  <『장미의 이름』, 『최후의 세계』, 『젊은이』를 통해 본 새로운 스토리텔링>

  소설문학적인 스토리텔링의 변화양상으로서 “탈 이야기”를 살펴볼 때, 이는 탈현대/포스트모더니즘적

소설문학에 대두한 “이야기의 소멸” 테마는 “작가의 사라짐/죽음/사망”이라는 소설미학적인 테마와도

관련되는 것이다.  전자공간에서의 문학도 새로운 매체의 등장으로 인해 네트워크화된 환경 속에서

새로운 양상의 커뮤니케이션을 낳게 되고, 따라서 새로운 양상의 소설문학적인 스토리텔링이 생겨나고 있다. 

전통소설미학적인 시각에서 소설텍스트 속의 ‘스토리’란 ‘소재’(素材)로 이루어진 것이다. 

  1970년대 후기 구조주의적 소설미학이 시각에서 ‘스토리’는 “모티프들의 얽어짜임”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즉 ‘소재’는 소설적 형상화의 구조상 하나의 형태요소로서 실제로 존재하는 아주 ‘구체적인

것’이다.  그것은 ‘꾸며낸 이야기’ 소설문학적인 형상화/스토리텔링에서 ‘스토리’의 기반이 된다. 

  현대소설에서 스토리텔링의 변화양상으로서 탈이야기 현상은, 문학전공자라면 누구나 다 잘 알고

있는, 버지니아 울프의 ‘내적 의식의 흐름’의 형상화로써 구현된 소설들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마찬가지로 프랑스 1950~60년대의 “누보로망”의 경우와 1970년대 미국문학에서의 “메타픽션”,

1980년대 독일의 리얼리즘 문학 등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탈이야기 테마는, 활자텍스트 문학공간의

현대소설에서, 당시 ‘소설의 위기’라고 지적된 테마와의 맥락에서, 1900년대 나타난 소설문학적인

스토리텔링의 위기라고 표현할 수도 있을 것이다.  현실의 반영으로서의 소설적 형상화가 무엇보다도

‘현실 인식’의 문제와 결부되기 때문에, 소설문학/소설문학적인 스토리텔링의 위기는 바로 현대 사회의

복합적인 리얼리티를 현재의 ‘스토리’속에 담아낼 수 없음에 대한 회의해서 비롯되었다고 볼 수 있겠다. 

1960년대 미국에서 처음 시작된 포스트모더니즘 소설미학적인 테마 “이야기의 소멸”은 전통소설문학에서

‘스토리텔링의 변화양상’으로서의 “탈이야기” 테마와 무관하지 않은 현상이다.  이는 “이야기의 소멸”이라는

말이 시사 하듯이 ‘소재로 이루어진 스토리’라는 소설장르 전형적인 순수 스토리 자체가 약화되는

현상을 뜻한다.  그러나 포스트모던 소설문학적인 스토리텔링 양상으로서 “이야기의 소멸”은 모더니즘

소설에서의 “탈이야기”의 테마와는 여러 측면에서 다른 양상의 것이다.  그것은 전통소설문학에서의

 ‘이야기’가 제거된 것이라는 시각에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이야기의 소멸”에서 역사/이야기란

반드시 소설 속의 ‘줄거리’만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이야기의 소멸이란 무엇을 가리키며

그것은 어떤 것인가? “주체의 종말” 또는 “주체의 소멸”, “저자의 사라짐․죽음․사망”이란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가?  움베르토 에코(Umberto Ecco)의 『장미의 이름』을 살펴볼 때 그 답을 찾아 볼 수 있다. 

여기서도 물론 ‘이야기’/‘스토리’는 여전히 존재하지만 ‘이야기’는 부차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다면 포스트모더니즘적인 스토리텔링의 새로운 양상으로서 “이야기의 소멸”이란 도대체 내용적으로

무엇을 가리키는가?  『장미의 이름』는 이야기/스토리를 위해 소설텍스트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 반대로 소설텍스트를 위해 ‘이야기’가 존재한다.  즉 포스트모더니즘적인 이야기의 소멸이란 작품

자체 안에서 주체의 변화, 중심축의 변화라고 할 수 있겠다.  흥미진진한 사건의 줄거리로서의

‘이야기’ 또는 ‘역사성’은, 소설 안에서 점차 그 영역이, 또는 그 주된 역할이 사라지면서, 다른 것들이

그 중심을 차지하게 된다.  『장미의 이름』에서도 텍스트유희(Textspiel)가 그 주축이 된다. 

생산텍스트『장미의 이름』속에서 『시학』이 얽혀 짜이는 상호텍스트성의 유희가 벌어지는 것이다. 

또한 『장미의 이름』의 마지막에 “이름만 남는다”는 말을 살펴볼 때, 이는 독자에게 ‘열린 결말’을

시사 한다고 볼 수 있다.  소설 속에서 소멸 해체된 이야기들은 포스트모더니즘 소토리텔링의 소설미학적인

시각에 대한 이해가 독자에 의해 구체화 된다.  『장미의 이름』의 결말부에 대해 가지는 독자/수용자의

(생소한 결말 방식에 대한) 황당함과 궁금증에 해당하는 ‘심미적 반응’은 몰이해, 궁금증, 쇼크

그 자체만으로도 새로운 미학을 형성하는 것이다.  포스트모더니즘적인 스토리텔링의 새로움은 이런

독특한 양상과 질의 ‘상호텍스트성 유희’활용의 텍스트가 야기하는 문학적 소통에서, 즉 소통의 담지자로서의

텍스트의 질(質)에 있다.  이것은 문학텍스트 독서과정에서 독자의 반응, 곧 심미적 체험에서 감지․포착된다. 

이런 식으로 이루어지는 텍스트유희의 소설적 형상화에서, 바로 이러한 언어적 형상화의 유희야말로,

이야기의 소멸이라는 것이 언어적으로 구체화될 수 있다.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이 소설미학의

차이는 상호 다른 질을 갖춘 ‘인식자세’에, 다시 말해 상이한 형상화의 질을 낳게 하는 문학적 사고와

형식들에 놓여 있다.  모더니즘 소설에서는 어떤 ‘구체적인 것’을, 곧 ‘주체적인 것’을 향해 집중적으로

응집되는 그런 의미에서의 ‘중심화 하는 실체화’가 이루어진다.  『최후의 세계』에서 보여주는

‘열린’결말은 모더니즘적인 소설에서의 ‘열린’ 자세와는 또 다른 분위기를 낳고 있다.  그것은 바로

포스트모더니즘적인 소설문학적인 스토리텔링의 양상이다.       

  『장미의 이름』과 『최후의 세계』 두 작품의 소설텍스트가 야기하는 문학적 소통은 “현대

소설문학적인 스토리텔링”의 문학적 소통과는 다른, 또는 이를 능가하는 듯한 어떤 다른 질의

‘심미적 소통’이다.  모더니즘문학과 포스트모던문학과의 양자 간의 차이를 구체적으로 드러내는

것은 생산텍스트작가/인용자의 ‘태도’일 것이다.  이것은 모더니즘미학과 포스트모더니즘미학

시각에서의 ‘텍스트 이해’에 대한 태도상의 차이에 놓여 있는 것이기도 하다.  포스트모더니즘적인

스토리텔링에서 ‘인용’ 작업은 작가/텍스트생산자 자신이 자유롭게 벌이는 상호텍스트성 유희로

전개된다.  그 뿐 아니라 텍스트 인용이라는 ‘지적 유희’를 통해 무언가 새로운 것을 창조해 낸다. 

이렇게 탄생한 그 ‘창작’, 텍스트의 텍스트심미성 때문에, 그것은 바로 상호텍스트 유희로서의

인용이라는 제 3의 창작행위에 해당한다.  이러한 창작에 있어 창작성/텍스트심미성 여부는

바로 생산텍스트가 야기하는 상호텍스트성 유희의 문학적 소통의 질(質)에 달려 있다. 

  『장미의 이름』과 『최후의 세계』가 보여주는 포스트모더니즘적인 스토리텔링 양상은

“이야기의 소멸”형상화에 있어서도 그러하지만, 상호텍스트성 유희로 가득 찬 소설적 형상화가

야기하는 문학적 소통에서, 그 텍스트의 질이 독자의 심미적 체험에서 감지․포착되는 데에서

독특한 새로움을 낳고 있다. 

  독일작가 보도 슈트라우스의 『젊은이』에서 소설적 형상화에 표출된 ‘자기반영’으로서의 인식

자세는, 즉 ‘자기반영성’의 사고구조는, 어디로 향하는 고정된 방향이 없다고 보기도 힘들지만

어떤 방향으로 진행될 지 앞으로 무엇이 생겨날지 등이 시사되지 않은 채 열려 있는 것이다. 

이는 아도르노의 “부정의 변증법적 인식”에 해당되는 것 같지도 않는, 무언가 다른 역동적인

인식의 모습으로 “나선형으로 끊임없이 돌아가고 있는 움직임”의 형태를 취하고 있다.  이야기의

소멸 또는 이야기의 종말 등의 포스트모던 소설미학적인 주제는 “이야기의 소멸-상호텍스트성의

유희-소설의 열린 결말- 작가의 죽음/사라짐-포스트모던 인식”이 하나 되어 어울리는 맥락에

놓여있다.  여기에, 독자와의 심미적 소통을 가능케 하는 상호텍스트성 유희의 생산텍스트를

통한 문학적 소통으로써 심미적 소통의 성과물인 심미적 효과가 자리하고, 그것의 산물 ‘심미적

인식’이 전달되는 지점에 포스트모더니즘적인 스토리텔링의 소설미학적인 핵심이 자리한다고

볼 수 있겠다.  또한 “작가의 사라짐/죽음” 테마는 원작자에 대한 개념이해의 해체와 관련되어

과거 인문학의 유산인 ‘문학관’에 대한 이해의 해체도 시사한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여기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포스트모던 소설미학에서의 ‘창작가’/‘작가’ 개념의 해체이며, 이는

동시에 ‘새로운 독자의 탄생’이라는 지대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것은 분명 포스트

-모더니즘 미학적 시각에서의 새로운 독자의 탄생이다.  『장미의 이름』에서 이루어지는 상호-

텍스트성 유희에 대한 독자의 심미적 체험 속에서 형성되는 ‘심미적 효과’와 ‘인식’기능의 활성화

자체가 바로 포스트모던 소설문학의 커다란 성과일 것이다. 

 

  <팩션>

  현재 상업성과 결부된 대중문학의 특색을 다음과 같이 살펴보면  첫째, 다큐멘터리 식의 소설류,

둘째, 재미와 저급함의 함수관계 속의 작품류, 셋째, 정보와 오락의 요청을 충족시키는 텍스트문학

(예:팩션) 등이 있다.  팩션(faction)으로서 소설텍스트 테마를 중심으로 살펴보면 이는 fact와

fiction으로 이루어진 합성어이다.  즉 fact(현실)과 fiction(꾸며낸 이야기)의 합성 개념으로, 팩션이

과거에 지배적이던 논픽션이나 다큐멘터리 식의 소설류와 연결되면서 현재적인 대중문학 성향에

부합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는 세계적으로 지배한 포스트모더니즘 문화가 그 시기의 대중문화적인

성격에 연결되면서, 또한 오늘날의 전자텍스트문학 공간에서 ‘정보 제공 공간으로의 텍스트’ 기능과

맞물려 드러나는 새로운 대중소비문화사회적인 패턴들이 부각된 것이라고 본다.  독일 베스트셀러

작가 짐멜의 『광대와 함게 있어도 흐르는 눈물』을 중심으로 팩션으로서의 소설텍스트에서의

스토리텔링 양상에 관해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이 작품에서 소설화자는 사실적이며 시간적인

틀 속에서 이야기를 전개해 나감으로써 ‘허구’의 소설을 ‘사실’로 받아들이게 하는, 즉 꾸며낸

이야기의 ‘리얼리티’를 한 층 견고하게 할 수 있는 신빙성/신뢰감의 고조를 추구한다.  동시에

“우리”라는 말을 사용함으로써 독자/관객/수용자들로 하여금 관찰자로서 그 사건들에 동참하게끔

유도하고 있다. 팩션으로서 이 소설텍스트는 가희 정보와 오락을 합친 인포테인먼트(Infotainment)의

진면목을 보여준다.  이런 짐멜의 팩션들이 보여주는 사실요소들과 허구적 서술형식의 스토리텔링은

새로운 양상의 대중문학적인 스토리텔링, 즉 팩션적인 스토리텔링이라 이름붙일 수 있겠다. 

 또한 작품 속의 소설텍스트에서 영화 기법을 많이 활용함으로써 영상화 가능성을 높이고 있다. 

베스트셀러 만들기와 맞물린, 오늘날의 대중문학적인 스토리텔링이 영상매체의 스토리텔링 효과를

활용하는 추세를 드러낸다.  소비자의 정보와 오락으 욕구를 충족시키며, 동시에 과거의 시적/문학적

효과의 어느 일면을 적극 활용하는 이런 대중문화적인 대중문학적 스토리텔링의 방식은 독자대중/

소비자의 절대적인 확보라는 목적을 달성하고 있다.  이런 대중문학적인 스토리텔링에서 드러나는,

전통소설미학적인 시각에서의 문학적 소통의 특수성에 대한 평가의 소멸 및 그것의 효용성의 활용

상실은 무엇을 의미할까?  베스트셀러인 『단테클럽』에서 그 해답의 실마리를 찾아본다면 그것은,

대중의 흥미를 충족시키면서도 동시에 엄청난 정보와 지식을 전달하고 깨달음과 깨우침까지 주는

이 작품이 소설적 형상화/팩션적인 스토리텔링으로서의 성공에서 답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성공은

소설 소재 분야에 대한 작가의 철저한 연구와 뛰어난 상상력 그리고 새로운 기법의 소설적 형상화에

힘입고 있다고 보겠다.  또한 이 작품의 소설적 형상화에서 독자에게 전달되는 ‘(문학적)사실성’에

대한 신빙성/신뢰성은 수용자의 독자반응에서, 즉 텍스트와의 소통에서 구체화되는 것이다. 

 

 <하이퍼텍스트>

   하이퍼텍스트는 글쓰기 방식에 있어 백과사전이 순차적, 단계적으로 각각의 항목을 배열하는

것과는 달리 다양한 연결(Link)와 마디(Nod)를 이용한 상호 연결성을 기본 조건으로 가장 잘 읽힐 수

있는 쓰기 방식을 택한다.  이는 기존의 소설 텍스트를 위한 선형적 글쓰기가 지닌 결론적 종결을

거부하는 동시에 하이퍼텍스트의 특징이라 말할 수 있다.  하이퍼텍스트의 경우 시작의 지점은

읽기를 시작하는 지점이 되며, 다양한 지점에서 끝을 낼 수도 있고, 다른 텍스트를 그 안에 첨가하거나

확장시킬 수도 있다.  하이퍼텍스트의 링크 연결 방식은 상호텍스트성을 본질적으로 보여주는데,

이 방식에서 하나의 텍스트는 여러 텍스트들의 관계들의 네트워크와 다른 텍스트와의 엇갈린 관계

속에 놓여 있다.  랜도우는 독서환경에서의 완전한 하이퍼텍스트성은 다연속성과 독자들의 선택에

의존하는데, 따라서 완전한 하이퍼텍스트적 시스템은 다양한 링크들을 하나의 렉시아에 연결시키고

이것을 고정점이나 사이트에 결합시킴으로써 일-대-다 연결방식을 구현한다. 이러한 방식은

여러 가지 면에서 하이퍼텍스트성을 지원하는데 첫째, 가지치기(branching)를 촉진하고 독자들의

선택을 다양하게 해주며 둘째, 다양한 링크들을 하나의 단일한 텍스트에 결합시킴으로써 실제

하이퍼텍스트를 읽는 독자들에게 도움을 주는 안내지점들을 만들 수 있도록 한다.  원래 텍스트는

자족적 전체로 존재할 수 없으며 닫힌 체계로 기능하지 않는다.  데리다(Jacque Derrida)는 원래

텍스트를 벗어나서 텍스트의 절대적 근원이 되는 ‘궁극적 지시 대상’은 없으며 따라서 텍스트의

의미는 자체의 언어 체계 내에 존재한다고 주장한다.  또 질 들뢰즈(Gulle Deleuse)는 단수성

(singularity)의 개념으로 이 방법을 설명한다.  텍스트는 서로에 대한 독립성은 잃지만 그렇다고

혼돈의 덩어리가 되는 것이 아니라 혼돈의 질서(chaosmos)속에서 존재를 유지하는 것이다. 

롤랑바르트(Roland Barthes)에 의하면 작가는 더 이상 작품 뒤의 유일한 목소리, 언어의 유일한

주인, 생산의 유일한 기원이 아니다.  텍스트는 작가의 의식의 표출이라기보다는 수행 과정에서

그 의미가 전달된다.  작가의 텍스트는 언어의 상호텍스트적인 저장소로부터 끌어낸 기표들의

연속이다.  이 텍스트에 접근하는 독자 또한 이미 다른 텍스트의 복합체로서 차연과 자유로운

놀이, 산종의 과정에서 자아를 텍스트화 한다.  말장난하는 것처럼 보이는 해체구성

(deconstruction)으로서의 책읽기 개념은 끝없는 링크로 텍스트가 연결되는 하이퍼텍스트에서

현실감 있게 작동한다. 볼터(Jay David Bolter)에 따르면 “하이퍼텍스트 픽션의 형성은 기존의

확립된 예술과 문학의 구조를 해체하려고 했던 다다이스트들의 실험정신과 같은 맥락에서

태동된 것”으로 보고 보르헤스가 “하이퍼텍스트성을 활자매체로 시도한 예”라고 지적하고

있다.  또한 하이퍼텍스트의 특성인 비선형성과 비종결성으로 인해 하이퍼텍스트 소설은

포스트모더니즘 소설에 대한 비판의 산물로 볼 수도 있다.  디지털매체에서 독자는 보이지

않는 저자의 손에 조정될 가능성이 더 크다.  “매트릭스”라는 영화는 인간의 선택이 인간이

쉽게 인지할 수 없는 프로그램에 의해 조정되고 결정되는 미래의 세계를 보여준다.  독자의

역할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경향은 ‘작가의 죽음’을 주장하는 포스트모더니즘의 이념에

새로운 매체의 문학의 특징을 끼워 맞추려는 것이 아닌가하는 의구심이 들게 한다. 

  하이퍼텍스트 문학에서는 독자가 긴장감을 늦추지 않고 의미를 생성해 나갈 수 있고 읽을

때마다 새로운 체험을 할 수 있도록 하는 적절한 링크의 구성이 이루어져야 한다.  하이퍼텍스트

문학은 이야기가 다양하게 전개될 가능성을 보여줌으로써 유연한 입체적 사고를 가능하게 한다. 

독자로 하여금 텍스트를 읽는다는 느낌보다 하나의 사건을 경험한다는 느낌을 들게 한다. 

하이퍼텍스트 문학에서 주요한 심미적 효과는 화면의 연출이다.  연출은 하이퍼텍스트 프로그램

언어인 HTML 코드 속에 명령어 등으로 이미지, 동영상, 음악 등이 삽입되어 독자들의 선택에

따라 화면 안에서 중요 단어나 이미지들이 등장하거나 퇴장하는 것을 뜻한다.  하이퍼텍스트

문학에서도 여전히 문학성은 지녀야 할 가장 중요한 덕목이다.  핵심은 바로 이야기이고,

이 이야기를 어떻게 효과적으로 매체의 특성을 활용해 전달할 것인가는 디지털매체가 제공하는

다양한 가능성 때문에 더욱 치열하게 고민할 과제이다.  하이퍼텍스트 문학의 이야기 구조를

연상시키는 영화들이 생산되기 시작하였고, 그 양은 증가하는 추세다.  애니메이션을 적절히 활용하고,

20분이라는 시간에 일어나는 일의 변형을 통해 생사가 엇갈리는 판이한 세 가지의 결말을 보여주는

“롤라 런”, 반복적으로 과거로 시간 여행을 떠나 다양한 현재의 상태를 가져오는 “나비효과”는

 클릭에 따라 각기 다른 결말을 가져오는 다선형적인 하이퍼텍스트 문학의 이야기 구조와 유사하다. 

클릭에 따라 다른 결말을 가져오는 하이퍼텍스트 문학은 끊임없이 선택해야 하는 우리의 삶과 닮아

있으면서, 다른 한편 결말을 보고 그 선택을 되돌릴 수 있다는 점이 삶과 다르다.  인간의 뇌의

구조를 본보기로 발전한 하이퍼텍스트는 우리의 사고방식에 보다 근접해 있다.  인간의 사고방식과

인간의 삶과 가까우면서 한편 삶에서 경험할 수 없는 꿈을 이룰 수 있는 디지털스토리텔링은 전통적인

매체보다 우리의 삶을 좀 더 실감나게 표현할 수도 있을 것이다.  디지털 스토리텔링은 수용자의

적극적인 참여를 가능하게 하고, 현장감 있게 모든 감각을 자극하여 수용자를 몰입하게 함으로써

과거 구술시대의 놀이로서의 문학을 반전된 형태로 재현한다고 볼 수 있다.  디지털 스토리텔링은

그동안 매체의 한계 때문에 표현하지 못했던 내용을 효과적으로 체험하게 함으로써 결국 미래의

중요한 문학형태로 자리 잡게 될 것이다. 

 

「미라플로렌스에서 생긴 일」(마리오 바리가스 요사)에서 본 하이퍼텍스트성

 「미라플로렌스에서 생긴 일」은 하이퍼텍스트적 연결방식으로 소설을 구성하고 있다. 

  이 소설은 전체가 20장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모든 홀수장과 20장(A), 그리고 18장까지의

짝수장(B)은 서로 다른 이야기이다.  표면상 A와 B는 전혀 연관성이 없는 이야기이지만

자세히 보면 A부분과 B부분은 서로 서로 수많은 링크와 노드로 복잡하게 연결되어 있는

전자적 하이퍼텍스트의 연결 방식을 가지고 있다.  이 소설에서 결말이라고 여겨지는

내용은 A부분과 B부분을 가리지 않고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다.  심지어는 등장인물들

간의 대화중에서도 LINK가 아니라면 아무 의미가 없을 정도로 암시적으로 등장하는 경우도

허다하다.  이는 특히 뒤로 갈수록 B부분에서, 한 문장 내에서도 여러 부분에 해당하는

단어들이 얼기설기 등장하면서 매우 복잡한 양상을 보여준다.  그러다가 B부분의

마지막장에 해당하는 18장에 이르면, 앞의 B부분에서 연관성을 가진 모든 것들과 링크된

종합적 렉시아의 양상을 보여준다.  이는 일-대-다 연결방식과 더불어 랜도우가 지적한

다-대-일 연결방식과 유사성을 갖는 것으로, 중요한 것을 효과적으로 재사용하는 것을

촉진시키는 장점을 가진다.  이렇듯 「미라플로렌스에서 생긴 일」은 전자적 하이퍼텍스트에서

쓰이는 연결과 유사한 방식을 활자 매체 내에서 적극적으로 사용함으로써, 다연속성을 갖게

되고 따라서 독자들의 선택에 의존하는 하이퍼텍스트적 독서를 가능하게 만들고 있다.

 

「끝없이 두 갈래로 갈라지는 길이 있는 정원」(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의 하이퍼텍스트성

  보르헤스의 작품 「정원」에서 알버트 박사는 화자인 유춘과 그의 증조할아버지인 취팽이

남긴 「끝없이 두 갈래로 갈라지는 길들이 있는 정원」이라는 복잡한 소설에 대해 애기를

나눈다.  이 소설의 시작지점은 작품의 위치상 맨 처음이 아니라 오히려 결말부에 가까운

중간지점에 자리하고 있다.  이 작품은 “리델 하트가 쓴 『유럽전쟁사』242p를 보면”이라는

텍스트의 시작점 위치에서 시작되고 있으나, 그 시작점을 뛰어 넘어 알버트와 유춘이 대화를

나누는 그 시점에서 독서를 시작해도 작품의 줄거리를 이해하는 데 어려움이 없다.  즉 거꾸로

읽어도 무방하다는 것인데, 이는 분명 하이퍼텍스트가 지닌 특성이라고도 할 수 있다. 

보르헤스에게 있어 ‘픽션’의 대상은 경험적 현실 세계가 아닌 이성적 논리 세계라는 점에서도

이미 하이퍼텍스트성을 내포하고 있다고 말 할 수 있겠다. 

  그의 작품 「정원」에 나타난 하이퍼텍스트성을 찾아보자.  첫째, 보르헤스가 소설이 언어로

구축된 하나의 텍스트라는 점에 주목한다.  그는 기존의 글쓰기의 인과율을 벗어난 ‘글에 의한

글쓰기’를 통해 소설의 존재론적 위상의 전환을 시험하고 있다.  또한 이것은 하이퍼텍스트가

지닌 ‘억압성’여부의 문제와도 연결된다.  하이퍼텍스트의 발전은 텍스트들에 대한 이해와

표용, 그리고 어떠한 억압성으로부터도 자유로운 하이퍼텍스트의 진정한 해방에 있기 때문이다. 

  둘째, 보르헤스가 선호한 탐정소설 구조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이 구조의 역할은 서로 얽혀

있는 이중 문제를 풀어내는 지적유희를 제공하는데 있다.  이러한 지적유희는 답이 장기라는

수수께끼에서 분명히 나타나고 있다.  보르헤스 작품에 있어 이러한 식으로 명백함 뒤에 감춰진

모호한 것을 찾아내는 작업은 순전히 독자의 몫이다.  풀이의 과정에서 자신의 중심 테마를 

전개하는 기법은 보르헤스가 자주 보이는 서술전략이다.  그에게 관념들이란 플롯의 진행에

필수 불가결할 뿐만 아니라 플롯 그 자체로 제시되기도 한다.  뿐만 아니라 「정원」작품 전문에

소설 텍스트의 상당 분량을 차지하는 각주를 배치함으로써 보르헤스는 하이퍼텍스트가 가지고

있는 링크, 노드를 이용한 상호연결성의 효과를 노리고 있다.  또한 각주는 상호연결성 외에

패러디, 과장된 철학적 명제, 발명과 지식의 혼합, 거짓 지식 등으로 교묘히 작용하며 사실과

허구의 경계를 무너뜨리는 역할을 하고 있다.  이러한 보르헤스의 역설적 기법은 언어의

형식논리를 이용해 역으로 언어가 소환하는 현실을 드러내 독자로 하여금 모종의 당혹감과,

당혹감을 넘어선 그 이후에는 지적 유희를 안겨 준다.  보르헤스는 시간의 인과율을 부정한다. 

  이러한 인과율을 선택이라는 배타성을 기본으로 한다.  하지만 보르헤스의 동시적 시간에서는

이러한 단 하나의 원인과 단 하나의 결과라는 일인인과율은 해체될 수밖에 없으며 다인다과율이

성립된다.  이는 선택이라는 행위에서 배제되는 모든 가능성이 다 실현되는 동시적 시간이다. 

그래서 취팽은 보르헤스의 소설가들이 모두 그렇듯이 단선적인 시간에 만족하지 못한다. 

취팽의 책에서는 모든 결말의 가능성들이 동시에 일어나고 각각 이야기의 결말은 새로운

이야기들로 갈라지는 또 다른 분기점이 된다.  이 부분이야말로 확장, 재생산, 사용자의

선택, 다양성 등의 특성을 포함함 하이퍼텍스트성이라 할 수 있다. 

  보르헤스의 텍스트에는 적어도 두 개 이상의 서로 다른 서술층위가 존재한다. 

정원」은 자신과 상관없는 이야기를 하는 동일한 화자의 관점에서 기술되고 있다. 

여기에서 알버트가 읽는 취팽의 소설은 또 다른 층위인 메타서술층위에 위치함으로써

다른 메타 이야기로의 확장 가능성을 내포한다.  그렇지만 각 서술층위간의 관계가 작위적이고

우연적으로 보여서 일견 필연적 인과관계가 없는 듯이 보인다.  하지만 보르헤스의 말대로

‘우연이란 선택받지 못한 필연’이라 했을 때  우연하게 가지치기를 한 듯 한 메타이야기들은 모두

필연적인 관계의 결과물들인 것이다.  이렇게 볼 때 보르헤스의 세계는 모든 가능성을 동시적으로

포착하는 세계이다. 

 

  「도매가로 기억을 팝니다」(필립 K.딕)의 하이퍼텍스트성

  「도매가로 기업을 팝니다」에서 주인공은 여행에 대한 가짜기억을 이식받으려 하다가 사고를

일으키고 그 상흔을 해결하려는 과정에서 가짜기억과 진짜기억이 뒤섞이는 요란한 혼란 속에

말려든다.  SF류의 소설은 소재의 다양함과 현실을 넘어선 공간성 등, 탈중심화를 지향하면서

그 형식면에서도 여타의 소설들과는 다른 방향성을 제시하기도 한다.  대표적인 예로

하이퍼픽션으로의 전환을 들 수 있는데, SF소설만의 독특한 스토리와 형식상의 많은 열린 가능성은

가나 독자 모두에게 흥미를 제공하고 있다.  여기에 소리, 그래픽, 동영상 등이 첨가되면서

입체적이고 역동적인 예술생산의 도구로서 새로운 가능성을 연 하이퍼텍스트는 이러한 인간의

소망을 실현시키기 위한 토대를 마련했다고 볼 수 있다.  현실에서 유토피아적인 대안을 찾지

못한 사람들에게 가상공간에서 일어나는 픽션은 그러한 호기심을 충족시킬만한 대안으로 등장했다. 

사이버스페이스에서 하이퍼픽션은 현실과 가상의 공간을 이어주는 쌍방향적 통로의 역할을 하고 있다. 

  하지만 사이버 공간에서의 글쓰기가 현실 세계의 기호와 괴리감을 일으킴으로써 실제 삶을 유지하는

현실세계에서의 정체성의 혼란을 초래할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되기도 한다.  그래서 하이퍼텍스트는

사실주의적 소설이 성취하는 것과 같이 ‘상상 현실 속으로 몰입함으로써 느끼는 즐거움’과 가상현실

기술의 목표가 되는 ‘상상된 현실 속에서의 행동의 즐거움’을 함께 제공해야 한다.  하이퍼텍스트를

읽는 독서의 과정이 선택을 통한 우연적 선형성을 얻게 되는 것에서 볼 수 있듯이, 결국 하이퍼-

텍스트의 특성은 ‘비선형적’이라기보다는 ‘선택적’이라는 말이 맞을 것이다.

 

참고문헌:『디지털시대의 문화읽기』-최혜실

         『사이버문화, 하이퍼텍스트 문학』-작품편-김종회

         『디지로그 스토리텔링』-차봉희편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