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창자료/문예사조사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3)>

묭롶 2008. 10. 27. 13:12

 

제1장: 로꼬꼬와 새로운 예술의 태동

 

  <로꼬꼬의 발전과 그 특징>

 

  ‘18세기’는 여러 가지 점에서 아직 바로끄적 화려함과 과장됨을 계승하면서도 바로끄에서 유래된

초창기의 장식적이고 인습적인 로꼬꼬의 요소들은 점차 해체되어 부르즈와적 예술취미의 특징들이

하나씩 이를 대신하게 된다.  바로끄와 로꼬꼬의 전통에 대한 공격은 두 개의 상이한 방향에서

이루어지는데, 그 중 하나가 감성주의와 자연주의이고 다른 하나가 합리주의와 고전주의이다. 

양자 모두 궁정적 화려취향에 반대하여 청교도적 생활태도의 단순함과 진지함이라는 이상을

내세운다.  이러한 반대의 움직임에도 불구하고 18세기 말이 되면 결국 유럽의 유일한 대표적

예술은 오직 부르즈와적인 것이 차지하게 된다.  섭정시대의 예술과는 대조적으로 로꼬꼬는

사치스럽고 우아한 성격 및 유희적이고 변덕스러운 매력을, 그러나 동시에 부드럽고 내면적인

성격을 지닌다.  바로끄가 묵직하고 조각적이며 사실적 공간성을 지닌 양식이라면 이를 대신하여

나타난 로꼬꼬는 날카롭고 미묘하고 민감한 하나의 능란한 장식예술이다.  로꼬꼬와 더불어

사물의 객관적 묘사는 근대 자연주의가 추구하던 적확성과 자연스러움을 확보한다.  로꼬꼬는

후기 바로끄의 고전주의를 해체함으로써, 회화양식에 있어서 민감성 및 인상주의적 기교에 의하여

시민계급예술의 정서를 표현하는 데 더 적합한 수단을 창조한다.  바로 이 수단의 표현능력

자체가 감상주의나 비합리주의와 원래 극히 첨예한 모순관계에 있는 로꼬꼬의 해체를 유도하게 된다. 

이렇게 하여 로꼬꼬는 궁정적 바로끄와 시민층의 전기 낭만주의를 연결하는 고리가 된다. 

그렇기에 이러한 산물로 로꼬꼬를 관찰할 때 비로소 그 복합적 성격을 정당하게 포착할 수 있는 것이다. 

  사실 로꼬꼬는 돈 많고 권태로워진 향락가들을 위한 하나의 에로틱한 예술이다.  이러한 면으로 인해

로꼬꼬는 ‘예술을 위한 예술’의 한 극단적인 형태를 발전시킨다.  하지만 19세기와는 다른 양상을

보이는데 그 이유는 이 시기의 로꼬꼬가 단순한 강령이나 단순한 요구가 아닌 예술의 품속에서

휴식을 취하고자 하는 경박하고 피곤하고 수동적인 한 사회에서 저절로 우러난 자연스러운 태도였기

때문이다.  로꼬꼬와의 결별은 이 세기의 후반에 일어나는데 이때 상류계층의 예술과 중간계층의

예술 사이에는 명백한 간격이 있는 것이었다. 

 

  <시민계급의 예술 참여와 새로운 지식인의 형성 >

  15,16세기에 유럽 도처에서 보이기 시작한 시민적 특색을 지닌 예술은 18세기에 이르러 시민계급이

모든 분야에게 실권을 장악하게 되자 그때까지 광범위하게 통용되던 궁정적․의례적인 예술을 와해시키고

부르즈와적 취미가 예술전반에서 절대적인 지배권을 갖는다.  프랑스 대혁명에서 그 정치적 절정에 이르고

낭만주의에서 그 예술적 목적지에 이르는 시민예술의 발전은 예술양식으로서의 바로끄 고전주의가

해체되면서 시작한다.  바로끄 고전주의의 해체는 궁정의 몰락과 그 시기를 함께 하는데, 필리브 섭정 시대는

 겉으로 보기에는 새로운 귀족주의화 과정의 시작을 뜻하지만, 그러나 내면적으로는 시민계급의 부단한

승리와 귀족의 지속적인 몰락을 대변했던 것이다. 

 

  <전원예술과 소설의 변화>

  목가문학은 사람들에게 현재를 벗어난 ‘평안’과 ‘안식’의 감정을 준다는 점에서 과거로부터 거의 중단 없이

지속되어 왔다.  회화에 있어서도 이러한 전원예술이 지속되는데, 전원예술이 문학과는 다르게 회화에서는

문학이 결코 소유하지 못했던 섬세함과 깊이를 얻는다.  상투적인 전원적 양식은 문학을 위해서는 이미

너무 옹색한 것이 되었지만 회화에서는 아직 생명을 가지고 있어서 새로운 방향을 개척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회화가 오랫동안 에로틱(현실을 벗어난 전원예술)한 주제를 떠나지 못한 데 비하여 문학은

좀 더 융통성 있고 경제적인 이유 때문에 좀 더 대중적인 장르인 소설로 그 방향을 돌렸다.  회화가

상류계급과의 관계를 지속시키고 있는 동안 문학은 중산층의 세계관에 접근해 간다.  이러한 방향에서

첫걸음을 내디딘 것이 기사소설에서 전원소설로의 이행으로서, 여기에는 이미 중세적․로마네스끄적

요소에 대한 단념이 표현되어 있다.  이러한 단념으로 인해 전원소설은 근대 리얼리즘에 한결 더 가까워진다. 

전원적․목가적․영웅적․연예적 형식들과 더불어 이미 17세기는 나중의 시민소설을 예고해주는 몇 가지

현상들이 존재한다.  삐까레스끄 소설은 주로 그 주제가 일상적 현실성을 지니고 있다든가 삶의 밑바닥을

즐겨 그린다든가 하는 점에서 당시의 사교계 소설과 구별된다.  그리고 과거 기교적이고 귀족 티를 내는

문체는 좀 더 자연스럽고 좀 더 시민계급적인 경향에 밀려났다.  소설은 18세기에 들어오면서 주도적인

장르가 된다.  가장 중요한 문학작품들이 이 장르에서 나타났고, 진정한 진보라고 할 만한 의미 있는

발전이 이 분야에서 일어난다.  이 시기 작가들의 심리적인 관찰로 인해 그들의 작품 속 인물들의 성격은

과거의 정형성을 많이 벗어난 복잡성과 모순을 띠게 되었다.  이 시점이 근대소설과 과거의 소설을

나누는 경계점이 된다.  18세기 작가들이 갖는 근대적인 요소는 그들 작품 속 주인공들의 비(非)영웅화와

인간화에 있다.

 

  <영국의 전기 낭만주의 성립>

  영국에서의 산업혁명은 그 속에서 상품생산의 기계화와 합리화를 기반으로 하여 결과적으로 과거를

청산하는 결정적인 발전 형태를 낳게 되었다.  산업혁명을 통해 비로소 중세는 영원히 사라지고 오로지

계획과 계산에만 입각한 노동의 조직화 및 경쟁에서의 무자비한 개인주의가 등장하였다.  고용자와

피고용자 사이에는 점차적으로 사물적인 인간관계가 성립되었다.  자본들이 집중됨에 따라 일반

노동자뿐만 아니라 독립적인 소(小)공장주도 자립성과 안정감을 잃어버렸다.  고도 자본주의의 시작은

엄청난 경제적 변영이 이룩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자본주의 특유의 내제된 위험성의 인식으로 인해 과거의

낙관주의를 찾아볼 수 없는 생활감정을 조성하게 했다.  이러한 감정이 사람들 간에 팽배하게 되면서

발생한 개인주의는 삶의 기계화․평준화 및 비인간화에 대한 하나의 저항이기도 했다.  개인주의는 개인을

나날이 더욱 획일화되어 가는 세계에서의 이름 없는 단역으로 만드는 사회질서에 대해 반항한다. 

이제 감정은 예술가와 대중을 이어주는 가장 확실한 매개체이자 현실해석의 가장 표현력 있는

단이 되었다.  시민계급의 도덕적 엄격성 역시 개인주의나 주정주의와 마찬가지로 궁정계층의

인생관에 대항하기 위한 하나의 무기였다.  이러한 개인주의․주정주의․도덕주의를 내포한 전기 낭만주의

문학은 과거의 시민적 체질에 생소한 특질들, 무엇보다 종래 시민계급의 낙관주의와 모순되는

멜랑꼴리라든가 비가적 정서라든가 심지어 확고한 비관주의를 생겨나게 하였다. 

 

제2장: 계몽시대의 예술

 

  <루쏘>

  루쏘는 계몽주의의 세례를 받은 서구의 정신적 지도자들에 비하여 훨씬 선입견 없이 당대의 문제들에

접근했다.  루쏘는 로꼬꼬와 계몽주의 문화를 비판함에 있어서 그 문화의 기계적이고 정신적 내용이 없는

형식주의를 폭로했다.  그는 단지 중세의 기독교적 공동체가 붕괴된 이후 유럽이 처해온 문화적 위기에

대한 의식을 표현했을 뿐만 아니라 영혼과 형식, 자발성과 전통, 자연과 역사의 대립을 내포하는 문화

개념 일반을 표현했다.  이러한 긴장의 발견이야말로 루쏘의 획기적인 업적이다.  루쏘의 자연주의는

볼떼르가 문학의 본질이라고 생각했던 모든 것에 대한 부정을 그중에서도 주관주의의 한계에 대한

부정을 의미한다.  루쏘가 끼친 영향력으로 인해 체험문학과 고백문학의 개념이 성립되었으며 18세기

말이 되면 지식인의 범주에 드는 사람치고 루쏘 사상에 감염되지 않은 사람이 거의 없다시피 했다. 

루쏘가 나타남으로써 처음으로 소시민계층과 일반 빈민대중, 피압박계층과 법적 보호에서 쫓겨난

사람들 등 더욱 광범한 사회계층이 문학적인 발언대에 오른다. 

 

  <시민극>

  시민극은 혁명의 동반자였으나 혁명 이후 자신들을 버린 부르즈와지에 대한 시민계급의 갈등을

직접적인 묘사의 대상으로 삼고 공공연히 계급투쟁에 봉사했던 최초의 연극이다.  시민극의 새로운

점은 이제 극적 갈등이 개별적인 인간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것이 아니라 주인공과 사회제도 사이에서

벌어진다는 것, 그것이 기성의 사회질서에 대한 고발로 표현될 수밖에 없게 되었다는 것이다. 

시민극이 갖는 의의는 과거와는 다르게 보통의 시민들을 진지하고 중요한 극적 행위의 주인공으로

만들었다는 점과 인간을 사회적인 영향력 하에서 객관적 현실에 지배당하고 흡수된 존재로 그린다는

점이다.  여기에서 성격을 사회적인 현상으로 해석하는 자연주의 연극의 심리학이 발생된다. 

프랑스 고전 극작가들이 가지고 있던 신비하고 비합리적인 현상으로서의 비극적인 행위는

시민극에 이르러 비극적인 행위에 심리학적 동기가 부여됨으로써 인간적인 척도를 얻게 되었다. 

그리하여 시민극의 대표자들이 원했던 대로 관객들은 무대 위의 인물에 더 쉽게 공감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모티프가 심리화 되고 내면화됨으로써 드라마는 등장인물의 성격 약화라는

문제점에 부딪히게 되어 등장인물의 성격이 불투명해짐에 따라 극적 갈등도 불분명한 성격을

띠게 되었다.  이러한 점에도 불구하고 과거의 연극의 주인공들의 비극의 원인이 단순한 역사적

필연에 있었다면 혁명의 경험을 통해 자신들의 승리를 믿는 낙관적인 시민계급에게는 그러한

고전적․역사적 비극이 아무런 감격이나 만족을 주지 않았다.  그들은 다만 비극적인 시대의 몰락하는

계급의 파멸을 숭고함 그 자체로 승화시키고자 한다.

 

<문학의 상품화>

  명예혁명이후 작가들의 패트런은 과거의 궁정에서 정당과 정부로 넘어갔다.  정당들은 자신들의

정치적 영향력을 얻기 위한 싸움에서 그들의 선전을 위한 무기로 문학을 이용했다.  이 시기에

디포우와 스위프트는 당시 영국을 양분하고 있던 휘그당과 토리당에서 각각 문학적 대변자로

활동했다.  문학을 통한 정치적 선전의 전개와 더불어 작가들의 경제적․사회적 지위에도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났다.  18세치 초에 작가들은 높은 관직과 영예를 누렸으나 1721년 로버트 월포울의

취임과 함께 이러한 시기는 끝이 나고 작가들은 다시 빈곤에 시달리게 되었다.  문인들의 생활이

불안해짐과 더불어 명망과 자부심도 허물어져서 그들 중 일부는 무질서한 생활환경에 젖어들게

되었다.  그래서 근대적 보헤미안의 선구자인 쌔비지 같은 유형이 태어나게 되었다.  하지만

이 시기에 개인적 패트런들은 정치적인 후원자처럼 그렇게 갑자기 없어지지는 않았다.  작가들은

개인적인 패트런들의 요구에 부응하기 위해 더욱 사적인 성격을 띠게 되었다.  이 후 이 세기의 중엽

이후에는 개인적 패트런들마저도 사라지고 그 자리를 집단적 패트런제라고 하는 예약구독제가

독자와 출판사를 잇는 다리가 되었다.  예약구독제는 익명적 상품거래에 기초하는 부르즈와

사회의 구조에 대응하는 형태이다.  출판사를 통한 저자와 독자대중의 연결은 그 자체가 이미

과거의 귀족계급의 일방적인 취미의 향유가 시민적 취미로 해방되는 과정의 한 표현이다. 

이와 더불어 문학에서 일반적인 가치기준과 여론을 대변하는 문학전문가, 즉 비평가의 출현을

특징으로 하는 현대적 의미의 문학생활이 비로소 전개되기에 이른다.  그리고 이제 처음으로

문학작품은 자유시장에서의 판매에 따라 가격이 정해지는 하나의 상품이 되었다.

 

<계몽시대의 독일>

  낭만주의 운동은 한편으로는 계몽주의와 함께 시작된 시민계급 해방의 연장 내지, 다른 한편으로는

 상류층 스스로가 계몽주의의 ‘파괴적’인 합리주의와 개혁주의에 반대한 운동이었다.  이러한 18세기의

낭만주의 운동은 유럽 어디에서나 사회학적으로 모순이 많은 하나의 현상이었다.  프랑스와 영국의

경우와 다르게 독일의 시민계급은 합리주의의 과정을 완전히 마치기도 전에 이미 낭만적 비합리주의의

영향 하에 들게 되었다.  독일에서의 계몽주의 이념의 신봉자는 항상 고립된 존재들로서 지식인들

중에서도 그 예외에 속했다.  대다수의 시민계급과 지식인들은 계몽주의가 지닌 의미를 자신들의

계급적 이해와 관련해서 파악할 만한 능력을 갖고 있지 않았다.  프랑스와 영국에서 상공업을 차지했던

시민계급과 비교할 때 농민반란 진압 이후 완전히 국가의 주권자가 된 독일 영주들은 그들의 지배권을

위협하는 위험성이 농민과 시민계급에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베스트팔렌 평화조약 이후 독일의

예술과 문화에서 시민정신을 완전히 자취를 감추었다.  시민계급에 대한 정부 및 소국의 억압은 모든

문화생활 영역에 있어 소극적 태도를 낳게 했다.  이런 식으로 해서 독일의 중간층 지식인은 사회적

현실과의 일체적 접촉을 상실하고 점점 더 세상물정에 어둡고 괴팍하며 고지식하게 되었다.  하지만

열약한 환경적 요인에도 불구하고 장기적인 상공업의 발달은 부를 획득한 상층 부르즈와지를 낳기에

이르렀고 이러한 상층 시민계급을 통하여 프랑스적 취미 및 자국 문화의 전통에 대한 경멸이

전 지식인층에 퍼져나갔다.  질풍노도로부터 낭만주의에 이르는 독일 문화의 전 형성 시기는 바로

시민계급에 의해 주도되었다. 그들이 대상으로 하는 독자층도 주로 시민계급의 사람들이었는데,

이들은 시민계급의 일부 엘리뜨층에 국한되었지만 진보적 경향을 대변함으로써 궁정문화를

종적으로 해체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하였다.  이 시기 기존의 보수를 담당하던 지배계급은

실제적 해결 대신 관념적 해결에 만족하도록 권장함으로써 이를 받아들인 독일 지식인층은

실증적․합리적인 사물인식에 대한 감각을 잃고 직관과 형이상학적 환상으로 이를 대체하게 되었다. 

독일 시인과 철학자들의 추상적 사고와 비교적인 언어 속에 나타나는 비현실주의는 그들의

과장된 개인주의와 독창성에 대한 병적인 집념에도 그대로 표현되고 있다.  절대적 독창성에 대한

그들의 욕구는 그들의 전문용어처럼 그들이 지닌 비사회적 본성의 일단을 말해주는데 지나지

않는다.  이 모든 것은 독일 지식인층에게 거부되었던 정치적․사회적 영향력을 정신적 고고성과

독자성을 통해 보상하고, 더 높은 차원의 정신생활에 의해 정치적 특권에 상응하는 엘리뜨로서의

예외적 위치를 확보하려는 노력의 표현이었다.  독일 고전주의가 프랑스와 갖는 차이점은

고전주의적 경향과 낭만주의적 경향의 종합적인 성격에 있다.  이러한 독일의 고전주의 작가들의

작품은 민중 속으로 깊이 침투하지 못하는 특징을 지닌다.  자의적이고 과장된 개인주의에 대한

성공한 사회계층의 혐오에 상응해서 독일 고전주의의 예술이상은 전형적․보편적인 것과

규칙적․규범적인 것, 그리고 지속적이고 영원한 것을 지향하는 명백한 경향을 보여주었다. 

 

제3장: 낭만주의

 

<18세기 문예사조의 흐름>

 18세기는 모순에 가득 찬 세기였다.  필리프 섭정 시대의 예술은 궁정문화를 해체하는

궁정적․귀족주의적 양식인 로꼬꼬로 발전하는 특징을 띠게 되는데, 1750년경 즉 로꼬꼬의 최전성기에는

일어난 새로운 반동이 바로 새로운 고전주의인데, 이는 지금까지의 어떠한 고전주의보다도 더 엄격하고

 더 냉철하고 더 계획적인 것, 또 어느 때보다도 더 전형적인 것과 규범적인 것을 강조하였다. 

18세기 중엽부터 7월혁명까지의 기간에 걸친 고전주의는 여러 단계를 거치면서 이루어진 발전과정이었다.

그 첫 번째는 1750~80년에 계속된 ‘로꼬꼬 고전주의’로서 그 당시 서로 경합을 벌이던 당시의 여러

양식경향들의 이질성을 가장 현저하게 보여주는 건축물에서 그 절충주의적인 특징을 찾아 볼 수 있다. 

두 번째는 ‘고고학적 고전주의’라고 불리는 것으로 이는 지금까지의 예술경향들보다 더 직접적으로

그리스․로마 예술의 고전체험에 의존하고 있다.  그들의 고전주의적 예술이상의 반(反)감각주의는 취미나

미학적 평가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의 윤리적 문제 혹은 단순성과 진실성을 추구하려는 노력의 표현이다. 

신고전주의와 전기 낭만주의는 다 같이 로꼬꼬의 경박성과 과도한 세련성에 반대하며, 또 이 두 사조에는

동일한 시민적 생활감정이 관류하고 있다.  이렇듯 이 세기의 4분의 3에 해당되는 시기는 여전히 여러

양식의 모순과 대립에 의해 지배되고 있었다.  이러한 대립 속에서 로꼬꼬가 극복되었다고 할 수 있는

것은 1780년 이후, 특히 다비드 등장 이후이다.  혁명 전야의 프랑스 화단의 네 가지 예술경향 중에서

혁명은 자기에게 가장 적합한 양식으로서 고전주의를 택했다.  이렇듯 18세기는 아무런 주저 없이 실제적

목적의 달성을 위한 수단으로 예술을 이용하였다.  혁명과 더불어 처음으로 예술은 정치적 신조가 되었고,

이때부터 예술은 ‘사회라는 구조의 단순한 장식’이 아니라 ‘사회적 토대의 일부’가 되어야 한다는 사실이

매우 강조되었다. 

 

<전기낭만주의 이후의 낭만주의의 특징>

  혁명 이전에도 존재했고 그 발전과정에서 중간에 잠시 중단되었던 전기 낭만주의는 혁명을 통해 다시

재기할 수 없을 정도의 결정적 패배를 맛보았다.  하지만 혁명 이후의 낭만주의는 새로운 세계감정과

생활감정을 반영하고 있으며 무엇보다도 예술적 자유라는 이념의 새로운 해석을 낳았다.  혁명과

낭만주의는 예술가가 근본적으로 동질적인 집단을 상대로 했던 문화시대의 종말을 뜻한다.  예술은

이제 객관적․전통적 가치기준을 따르는 사회적 예술이기를 중단하고 스스로가 기준을 만들고 또 이

기준에 의해 평가받기를 원하는 표현예술이 되었다.  낭만주의 이후의 예술가들은 그들의 창작과정에서

끊임없이 감상자층과 긴장하게 되고 영원히 대립․투쟁하는 관계에 놓이게 된 것이다.  18세기

전반기의 시민계급 문학이 가지고 있던 건강한 현실감각은 산업혁명이후 사람들에게 팽배한 불안감으로

인해 도피주의로 변질되었다.  도피주의 문학은 원시적 자연상태에 대한 기이한 동경심과 혼돈된 감정

속에서의 이성의 상실적인 자기해체적인 특징을 보인다.  자연은 이제 문학 속에서 이전보다 훨씬 더

큰 자리를 차지하게 되는데 과거의 낭만주의에서와는 다르게 여기에는 완전히 자연적인 특징과 철저히

인공적인 특징이 그 속에 통합된 형태였다.  고전주의와 낭만주의의 두 양식이 엄격하게 분리되기

작한 것은 1820년과 1830년 사이, 그러니까 낭만주의가 예술적으로 진보적 요소를 지닌 양식이 되고

고전주의가 여전히 다비드의 절대적 권위를 추종하는 보수적인 사람들의 양식이 되었을 때이다. 

낭만주의의 영향을 받은 샤또브리앙의 작품『그리스도교의 정수』가 세기적인 성공을 이루면서 이 책이

출간은 종교적 당파의 성립 및 ‘계몽철학자들’의 지배의 종식을 의미했다. 

 

<낭만주의의 특징>

  19세기의 자유주의는 낭만주의를 왕정복고 및 반동과 동일시하였다.  이러한 낭만주의 운동에서 특징적인

것은 이 운동이 어느 경우든 비현실적․비합리적․비변증법적 길을 통하여 그런 관점에 이르게 되었다는

실이다.  혁명 이후 개인은 자신을 받쳐줄 외부적 근거를 상실하게 되자 자신에게서 모든 근거를 찾고자

했다.  또 세계를 자기 자신을 애기하기 위한 구실로 이용하였는데, 이렇게 되면 체험의 흐름도 완결된

예술작품의 내용도 형식도 그 중요성을 잃게 된다고 노발리스는 지적했다.  곧 낭만주의는 새로운 사회의

이념이자, 이제는 더 이상 절대적 가치를 믿지도 않고 또 그 상대성과 역사적 제약성을 고려하지 않고서는

더 이상 어떤 가치도 믿을 수 없게 된 세대들의 세계관을 나타냈다.  낭만주의는 옛문화의 몰락과 새로운

문화의 생성을 자기 자신의 운명으로 체험했기 때문에 모든 것을 역사적 전제조건들과 결부시켜 보았다. 

의심할 나위 없이 낭만주의의 역사체험에는 현재에 대한 정신병적인 두려움과 과거로 탈출하려는 시도가

표현되고 있다.  낭만주의는 세상으로부터의 정신의 소외를 보상하기 위하여, 그리고 부르즈와지와 속물들의

정신 적대적인 태도에 대한 방패막이로 그의 개인주의를 극단화시켰다.  낭만주의자들은 인생을 예술의

기준에 의해 평가했는데, 그들은 그렇게 함으로써 일종의 성직귀족으로서 다른 사람들 위에 군림하고자

했다. 

  전기 낭만주의와 낭만주의 사이에 근본적으로 다른 큰 차이점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18세기의

감상주의가 상승된 감수성, 즉 고조된 ‘마음의 민감성’에 의해 대체되었고, 감상적 반응은 이미 그 도덕적

가치를 상실하기 시작함으로써 점점 더 차원 낮은 문화수준으로 전락했다는 사실에 있는 것이다.  낭만주의

문학에서 낭만적 영혼의 내적 갈등과 분열이 가장 직접적이고 인상적으로 나타난 것은 이중인간의

모습에서이다.  이중인간 역시 하나의 도피적 시도일 뿐으로서, 그것은 자신의 역사적․사회적 상황에

적응할 수 없었던 낭만주의의 무능력의 표현이다.  낭만주의자들에게는 병도 합리적으로 해결할 수 없는

인생의 문제들에서 도피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했다.  낭만주의에서 보이는 그 역사적 민감성과 통찰력,

서로 관계가 먼 것들과 좀처럼 해석하기 힘든 것들에 대한 낭만주의의 감수성은 이 정신병에 힘입은 것이다. 

프랑스 대혁명과 낭만주의 이후에야 비로소 사람들은 우리 자신과 우리의 문화가 끝없는 흐름 속에 있고

우리의 정신적 삶이란 과도기적 성격을 지니는 하나의 과정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이러한 생각이 바로

낭만주의의 발견으로서 오늘날의 세계상을 정립하는데 가장 중요한 기여를 한 것이다.  우리는

낭만주의로부터 역사적 현상들이란 독립적인 원리들의 기능이요 발현이며 구체화일 뿐이라는 인식을

유산으로 물려받았다.  역사적 유물론의 진정한 의미와 낭만주의 이래의 역사학에서의 가장 중요한

 진보는, 역사발전의 원천이 형식원칙이나 이념, 실체나 본질 등에 있는 것이 아니라 역사발전은 하나의

변증법적 과정을 나타낸다는 통찰에 있다. 

 

 <소설의 변화>

  리처드슨은 가정이라는 테두리 속에서 가사(家事)에만 몰두하여 살아가는 새로운 시민적 인간형을

문학작품의 중심으로 만든 최초의 소설가라는 데서 큰 영향력을 갖는다.  또한 그는 명확하게 정의내릴 수

있는 인간 유형을 창조하지 않은 최초의 작가이다.  소설은 시민적․가정적인 성격을 갖게 되면서 좀 더

윤리적인 목적을 추구하게 되었는데 이러한 과정은 18세기 중엽에 일어나 그 자체로서 새로운 문학의

독자층을 확장한 영국 사회의 일반적인 ‘재(再)퓨리턴화’와도 관련되어 있다.  소설이 수행한 오락과

교화라는 이중적 역할에 비춰볼 때 소설을 통한 고백의 목소리는 당시의 생존경쟁 속에서 방향을 잃은 채

방황하던 사람들에게 방향성을 제시하는 것이었다.  고백의 목소리는 소설에서 자서전적 형식을

행시키는데 이러한 일인칭 서술이나 일기체 수법은 작가, 주인공, 독자 사이의 관계를 더 없이

친밀하게 했다.  이러한 소설들은 독자의 내면을 주인공에게 이입시키게 했는데, 작가들은 극적인 감정

이입과 동화를 위해 한결 고조된 클라이맥스를 구성해야만 했다.  이러한 요구에 응해서 최초의 스릴러

소설과 역사의 엉터리 장엄미와 신비로 가득 찬 최초의 ‘역사’소설이 생겨난 것이다.  이렇듯 19세기

예술문화는 18세기보다 우월하지만 과거 궁정문화가 가지고 있던 안정과 균형을 결여하고 있다는 약점을

보인다. 

 

<음악양식의 변화>

  영국의 전기 낭만주의 및 루쏘의 작품과 함께 일어난 문학에서의 양식 변화와 더불어 이 시기에 이르러

음악은 역사적으로 한 시대를 대표하고 주도하는 예술이 된다.  과거의 음악이 감정적 내용을 균일하게

다룸으로써 절제되고 균형 잡힌 듯한 인상을 주었다면 새로운 음악은 상승과 하강, 긴장과 이완, 주제의

제시와 전재가 끊임없이 교체됨으로써 그 자체로서 불안한 자극적인 느낌을 주었다.  또한 과거에

작곡가들이 궁정이나 교회, 관공서에 전속되어있었다만 18세기 중엽에는 시립연주협회가 개설되게

되어 공개적인 연주회를 통해 시민계급도 독자적인 음악생활을 영위하기에 이른다.  이 시기에 이르러

비로소 순수하게 감정을 표현하는 연주음악이 생겨나게 되었다.  공개연주회를 통해서 청중들은

입장료를 내고 음악을 듣게 되었는데 이를 통해 음악에 대한 자유시장이 형성되었다. 

 

  <영국의 낭만주의>

 18세기 중엽에 영국에서는 거대한 낭만파 운동이 시작되는데, 왕권의 약화가 프랑스에서 국가의

쇠약으로 나타난 반면, 영국에서는 왕족을 대신한 기업가계층이 도리어 국력의 원천이 되었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영국에서의 로꼬꼬에서 낭만주의로의 이행은 강렬한 문화가치의 격동을 동반하지

않은 채 진행되었다.  영국에서의 문화적 평준화 과정은 새로운 정규적 독자층의 형성에서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이러한 독자층의 성립은 무엇보다도 부유한 시민계급의 등장과 결부된 것으로서,

이들은 귀족계급의 문화적인 특권을 깨부수고 문학에 대해 활기차고 점증하는 관심을 표명했다. 

예전의 주된 독자층이었던 궁정귀족은 참된 독자층이라고 할 수 없었다.  그들은 문인들의 업적이

정말 가치가 있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렇게 하는 것이 위신을 높이는 것이라는 이유에서 문인들을

보살폈기 때문이다.  그래서 17세기와 18세기 초에는 교훈적인 종교서적들만이 유일하게 비교적

광범한 독자층을 가지고 있었다.  이후 18세기 중엽이 되면 독자들의 숫자가 눈에 띄게 늘어난다. 

새로운 독자층의 성장을 가져온 문화적 수단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18세기 초부터 보급된 잡지로서

그것은 이 시대의 위대한 발명이다.  시민계급은 잡지에서 문학적인 교양과 아울러 세속적인 교양의

세례를 받게 되었고, 이는 곧 과거 문학의 소비층이었던 귀족계급과의 긴장상태를 낳게 되었다. 

하지만 부르즈와 잡지들은 여전히 수식 많은 문체와 금욕적인 도덕철학에 의해서 귀족계급의

교양에 오랫동안 더 봉사한다.  이후 ‘도덕 주간지’의 뒤를 이은 잡지들은 과학적 문제를 다룬

은 준(準)학문적 논문들과 윤리문제를 취급한 논설들을 실음으로써 본격적인 독서의 가장

좋은 길잡이 노릇을 하게 되었다.  이 잡지들을 통해 처음으로 일반대중은 진지한 문학을

정기적으로 맛보는 습관에 젖어들게 되었다.  이러한 잡지들 자체가 이미 작가의 사회적

지위의 변화와 직결되는 사회발전의 한 산물이다. 

 

  로꼬꼬에서 전기낭만주의를 거처 낭만주의로 넘어가는 18세기는 한 마디로 모순의 세기였다. 

이 시기의 문예사조는 어느 한 가지로 규정지을 수 없는 특징을 보이고 있는데, 그 특징은

예술양식이 다음 양식으로 넘어가는 과도기의 과정에서 보여 지는 예술 양식들 간에 서로 침투하고

영향을 받고 변화하는 모습들이 바로 그것이다.  그렇다면 이 시기의 예술 양식이 이토록 모순된 구조를

갖는 이유는 무엇일까.  로꼬꼬 시대 이전의 예술은 예술을 수용하는 계층이 왕궁과 귀족층으로 한정되어

있었다.  예술가들의 개인적인 창의력은 그 예술이 수용하는 범주 안에서만 허용이 되었고, 예술가들은

왕궁과 귀족, 교회에 귀속되어 그들의 예술적 취미를 위해 봉사해왔다.  로꼬꼬 이전의 예술이 가지고

있는 완결성과 통일성은 이러한 관점에서 이해할 수 있다.  특정계층의 교양을 유지하고 특정계층간의

취미를 공유하는 대상으로 예술이 존재했기에 그 형식 안에서는 어떠한 모험이나 불완전함은 통용될 수

없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18세기에 들어와 예술사는 여러 가지 큰 변인을 맞게 된다.  바로 프랑스

대혁명과 산업혁명이 그것이다.  프랑스 대혁명과 제정시대를 거쳐 부를 축적한 시민계층 중 부르즈와지는

과거 왕족과 귀족의 자리를 넘겨 받게 되었고, 그들의 예술 취향을 위해 생겨난 예술 양식이 바로

로꼬꼬였다.  하지만 인쇄기술의 발달로 인해 과거 일부 계층의 전유물이었던 문자를 통한 지식이

시민계급에 전파되면서 시민계급도 예술의 주도적인 세력으로 등장하게 되었다.  부르즈와지와

시민계급은 혁명시기 왕궁에 함께 대립했지만 혁명 이후 부르즈와지로부터 외면당한 시민계급은

시민극을 통해 자신들의 불만과 사회적인 문제상을 표출하기에 이르렀다.  시민계급이 예술의

전면에 부상함으로써 로꼬꼬는 해체되었는데, 이는 과거 주정주의였던 예술이 ‘개인’에 주목하게

됨으로써 일어난 현상이었다.  시민계급은 부르즈와지와는 다른 도덕성을 강조하게 되는데 이는

제정시기의 고전주의 양식으로 표현되었다.  하지만 이 시기 예술은 아직까지는 목적을 위한 예술을

탈피하지 못했는데 이는 제정시대에 정치적 선전을 위해 고전주의를 택했던 점에서나, 문학가들이

휘그당과 토리당의 정치적인 목적을 위해 봉사했던 점에서 찾아볼 수 있다.  혁명과 더불어 산업혁명

또한 이 시기 예술에 큰 영향을 미쳤다.  산업혁명으로 인해 자본가들은 노동자들을 기계적으로 취급하며

억압하기 시작함으로 인해 노동자들은 노예상태와도 같은 비참함과 불만에 사로잡히게 되었고, 자본가들

자신들마저도 고도자본으로 인해 항상 도산의 위험을 안고 있는 사회 전체적으로 불안이 팽배해졌다. 

  이러한 영향으로 인해 현실도피적인 경향이 예술에 나타나게 되었는데 이러한 경향이 전기 낭만주의에

주로 표현되었다.  전기 낭만주의는 고전주의와 합리주의에 계속해서 도전을 받았지만 결국 낭만주의는

샤또브리앙의 작품이 세기적인 성공을 이루며 본격적인 낭만주의 시대의 시작을 알리게 되었다. 

  이렇듯 예술사는 하나의 통일되고 일관된 흐름이 아니라 그 속에 유입되는 여러 변인들과 합쳐져서

흐르거나 그 안에서 대립․상충을 거쳐 또 다시 새로운 흐름을 만들기도 한다.  그렇기에 각 사조의 흐름이

서유럽에서는 비교적 공통점을 갖는 경우라도, 독일의 경우에는 다른 변인으로 인해 다른 흐름을 보이기도

하는 것이다.  한 시대의 문예사조를 분석하고 그것에 주목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문예사조를

통해 한 시대의 시대상과 그 시기를 살았던 사람들의 삶이 어떠한 형태로 그 속에 녹아들어 있는지,

또 그 역으로 왜 그러한 문예사조를 낳게 했는지 유추해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점이 또한 한 때 ‘임화’가

내세웠던 ‘이식문화론’의 반박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의 문예사조는 선진문명에서 후진문명으로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문예사조가 각각의 나라에 유입되어 그 안에서 그 전에 있었던 그 나라의

문화의 흐름에 유입되는 과정에서 여러 가지 변인을 겪고 난 후 새로운 또 하나의 문예사조를 낳게 되기

때문이다.  즉 하나의 큰 흐름으로 분류가 될 수는 있겠지만 본질적으로 각각의 나라에는 각각의 고유한

문예사조가 존재한다고 판단한다.  그래서 이 시기 한류를 만들어낸 지금의 한국문화 고유의 문예사조의

흐름에 대한 진단과 연구가 더욱 필요한 것이 아닐까 생각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