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락/추락(1)

J.M Coetzee의 'DISGRACE'

묭롶 2008. 10. 22. 23:37

                                                         

  2003년도 노벨상을 수상한 쿳시의 '추락'을 번역한 왕은철은 이 책에 대한 느낌을

 '아이스 피켈로 얻어맞는 느낌'이라고 표현했다.  나 역시 마찬가지로 책을 읽음과

동시에 책 속에 몰입되었고, 주인공 옆에서 같은 호흡을 체험했다. 

그  체험은 굉장히 고통스러웠다.  심장은 터질 듯이 뛰는데 혈류는 서서히 너무나

서서히 흐르는 것과 같은 압박통과, 머리는 뜨겁게 가열됐는데 이상하게 가슴은 서늘한

이 낯선 감정을 나는 주체할 수가 없었다.  책을 읽고 뭔가를 분석한다는 건 내 능력

밖의 일이라 판단되지만 독서의 과정 중 나름대로의 생각을 주섬주섬 정리해 본다.

 

먼저 '추락'의 줄거리를 먼저 살펴보자.  데이비드 루리 교수는 두 번의 이혼경력이 있는 52세의

남자다.  그는 자신의 욕망을 조율할 수 있다고 믿으며 학생들을 가르치는 일에는 흥미를

못 느끼지만 언젠가는 바이런의 마지막에 관한 저서를 집필하겠다는 의지를 갖고 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제자에게 통제할 수 없는 에로스의 욕정을 느껴 학생과 관계를 갖게되고,

이로 인해 학교에서 교수직을 잃게 된다.  학교를 떠난 후 딸이 살고 있는 농장에 찾아간

 그는 잠시동안 머물겠다는 생각과는 달리, 농장의 사람들과 교류하게 된다.

 그러던 중 딸의 농장에 침입한 세 명의 남자흑인들에 의해 딸은 윤간을

당해 아이를 갖게 되고 루리는 딸에게 위험한 농장을 떠나 새로운 삶을 시작할 것을

권하지만 딸은 자신조차 납득할 수 없는 상태로 그의 요구를 거부한다.  그는 이제 딸과

폭력을 암묵적으로 묵인했던 이웃 그리고 농장생활에 분노하여 도시로 돌아오지만

이미 그곳에 자신의 자리가 없음을 깨닫고 다시 농장으로 돌아와 바이런의 마지막에

대한 오페라를 쓰기 시작한다.

 

먼저 'DISGRACE'란 제목이다.  단순히 보면 GRACE의 반대말이지만 책을 읽고 보니

'추락'보다는 '수치'와 '끝을 알 수 없는 자괴감' 내지는 '모멸감'이 더 맞지 않을까 생각된다.

루리교수도 책의 서두에서 자신있게 말한다.  난 나의 욕망을 잘 처리하고 있다고 그리고

그는 자신의 욕망의 정체에 대해서도 '뱀'과 같다고 단언한다.  '뱀'과 같다는 것은 욕망을

품고 있으나 머리는 서늘한 상태(지극히 이성적인)에서 욕구를 해소한다는 의미일 것이다.

하지만 워즈워드 시를 수강하는 멜라니에 대한 욕정을 품는 순간 그는 앞서 나가는 감성에

경고음을 울리는 이성을 느끼면서도 욕망을 자제하지 않고 그 결과 학교에서 해임된다.

그는 학교측과 합의를 하고 일련의 갱생의 과정을 수용하라는 동료 교수들의 설득을

거절한다.  이때까지도 그는 그 자신에게 자신감이 있었다.  '난 학생들을 가르치는 일에

관심이 없었다.  난 학자의 삶이 어울린다.  그리고 바이런의 마지막을 조사하기 위한

시간이 필요했었다' 라고 되뇌이며 그를 향해 쏟아지는 온갖 비난에 태연하려 한다.

하지만 그의 이성적인 판단으로 행동할 수 없는 농장의 삶 속에서 그는 옳음에도

옳다고 말할 수 없고, 바꿀 수 없는 그 삶으로 인해 무기력한 비참함을 경험하게 된다.

그의 상처받은 자존감은 멜라니의 아버지의 '추락하셨군요?'라는 질문에 대한 그의

대답'추락하는 것도 나쁘지는 않아요.  부서지지만 않는다면...'에서 이미 그가 어쩔 수

없는 삶의 불합리함을 수용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세상의 비난에도 후회하지 않았던 그의 정신적인 면과 현실에서 그가 겪어내고 수용해야

하는 육체적인 면의 간극의 차이는 크다.  여기에서 추락이 크게 의미하는 것은

제자와의 부적절한 관계 이전의 그와 그 이후 그의 삶에서 오는 현실적인 차이를 의미한다고

보겠다.  일견 '추락'의 서평에서 추락의 의미를 마지막 그의 대사(그가 유일하게

애정을 가졌고, 그의 벤조에 흥겨워하며 그에게 맹목적인 애정을 보이던 불구의 개를

안락사 시키기 직전 베브 쇼와의 대화:'그렇소, 단념하는 거요.")에서 찾는 사람들

(한가닥의 희망마저도 포기하는 모습에 주목)도 있으나 나는 이 부분에 대한 해석을 달리한다. 

그의 현실은 추락했으나 그의 정신은 단 한순간도 자신만의 세계를 포기하지 않았다.  이는

낭만주의 작가 바이런에 대한 집필을 포기하지 않는 그의 의지가 이를 증거한다.

{~그는 한숨을 쉰다.  독특한 실내오페라 작가가 돼 개선하는 것도 괜찮은 일일 것이다.

하지만 그런 일은 없을 것이다.  그의 희망은 더 온건한 것이어야 한다.  그는 혼란스러운

소리 중 어딘가에서, 불멸의 염원을 담고 있는 진정한 음조가 한 마리 새처럼 날아올랐으면

하고 바란다.}P323 

작가가 글을 쓰면서 가졌던 의도와 생각을 감히 짐작할 수 없지만 나는 이 부분에 주목하여

[바이런과 낭만주의자 루리]에 대해 별도로 적어보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