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무한한 우주에서 그리고 시간 앞에서 인간의 삶은 어떠한 의미를 갖는 것일까? 사람들은 그리 길지 않은 시간을 살면서 저마다 짊어진 삶의 무게로 인해 휘청이고 좌절하며 자신의 무게가 조금은 가벼워지기를 바란다.
서로 각자의 짐을 가자미 눈으로 쳐다보며 자신의 짐이 무겁다고 투덜대기도 한다. 하지만 우리가 짊어져야 할 무언가가 없다면 과연 지금 현재 내가 살아가고 있다는 실존성을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우리는 종종 살면서 가장 치열했던 순간을 겪고 난 후 바로 그 순간이 자신이 삶의 본질(자신)을 그 어느때보다도 명확하게 자각했던 때였음을 깨닫게 된다.
「~무거운 짐은 동시에 가장 격렬한 생명의 완성에 대한 이미지가 되기도 한다. 짐이 무거우면 무거울수록, 우리 삶이 지상에 가까우면 가까울수록, 우리의 삶은 보다 생생하고 진실해진다.」p11
실존하는 존재가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흩어지지 않고 자신의 정체성을 지킨다는 것은 곧 존재를 위해 필연적으로 무게를 가져야 함을 의미한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은 길지않은 여정을 살아가며 시시각각 삶의 무게가 변화해 가는 인상군상들이 시간이라는 천칭(운명이라는 천칭, 혹은 죽음이라는 천칭) 의 반대편에 올려놓은 자신의 정체성이라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시간과 운명 그리고 죽음을 앞둔 인간이 갖는 존재의 무게는 잠시도 멈추지 않는 유동성을 갖는다. 인간은 자신의 존재의 무게가 변화함에서 오는 괴리감을 평생토록 겪으며, 그 울렁증을 견디기 위해 다른 무언가를 찾아 나서는 존재들이다.
「~대개의 경우 사람들은 고통에서 벗어나려고 미래 속으로 도망친다. 그들은 시간의 축 위에 하나의 선이 있고 그 너머에는 현재의 고통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고 상상한다.」p190
그들은 현실의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죽음이라는 종지부가 결정지어진 미래로 끊임없이 내달리지만 그 끝에 다다른 지점에 이르기까지 자신의 정체성이 완성되지 않았다는 사실만을 깨닫게 될 뿐이다.
「인간의 시간은 원형으로 돌지 않고 직선으로 나아간다. 행복은 반복의 욕구이기에, 인간이 행복할 수 없다는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다.」P340
여기 그렇게 천칭 위에 올려진 자신의 무게를 우리 앞에 드러내보인 4 명이 있다. 의사이면서 자신만의 고정된 세계와 무게를 유지하며 다른 사람이 자신에게 영향을 주는 것을 배제하는 토마스와 어머니로 인해 자신만의 안정적인 무게(독립적인 삶)를 획득하지 못 한 채 토마스의 세계로 들어와버린 테레사, 누군가에 의해서 자신의 정체성이 판단되거나 고정된 삶을 용납하지 못하는 화가 사비나, 그리고 정해진 길만을 걸음으로써 계획되어진 안정된 삶을(수동적인 삶의 무게를 받아들였던) 살아온 의사 프란츠가 그들이다.
인생에는 정답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누구나 한 번밖에 살 수 없기에 인간은 되돌릴 수가 없다. 만약 인생에 반복이 가능하다면 인간은 수정의 기회를 갖을 수 있겠지만, 현실의 고통 앞에 마냥 앞으로만 내달리기 때문이다. 그런 인생에서 토마스가 그 정답을 찾는 길은 다른 인간이 갖고 있는 개별성을 확인해 나가는 것이다.
「~도무지 비교할 방법이 없으니 어느 쪽 결정이 좋을지 확인할 길도 없다.~우리 인생이란 초벌그림은 완성작 없는 밑그림, 무용한 초벌그림이다. 토마스는 독일 속담을 되뇌었다. 한 번은 중요치 않다. 한 번 뿐인 것은 전혀 없었던 것과 같다. 한 번만 산다는 것은 전혀 살지 않는다는 것과 마찬가지다.」p15
「~<자아>의 유일성은 다름아닌 인간 존재가 상상하지 못하는 부분에 숨겨져 있다.
~토마스는 이 백만분의 일을 반견하고 소유하고자 하는 욕구에 사로잡혔으며, 그의 눈에는 이것이 바로 그의 여자 집착증이 지닌 의미였다. 그는 여자에 사로잡힌 것이 아니라, 그들 각자가 지닌 상상 못하는 부분, 달리 말해서 한 여자를 다른 여자와 구분짓는 이 백만분의 일의 상이성에 사로잡힌 것이다.」p228.229
심미안을 통해 바라본 이상적인 세계를 평생동안 그려내기 위해 계속해서 미완성의 작품을 그려내는 예술가처럼 인간은 그렇게 완성되지 않는 자신의 정체성으로 인해 유년기를 넘어서부터 평생토록 정답이 무언지를 알 수 없는 혼란 속에서 자신만의 정체성을 만들려고 애를 쓴다. 하지만 그 과정을 통해 만들어지는 정체성은 과거의 자신이나 이성과는 반목되는 모순적 존재여서 모순을 느끼는 자신을 받아들이는 과정까지도 형성되는 정체성의 일부가 된다.
「~그녀는 육체를 통해 자기를 보려고 노력했다. 그래서 자주 거울을 보았다. ~그녀는 얼굴 구석구석에서 드러나는 자신의 영혼을 본다고 믿었다.」p51
「~어미니의 세계에서는 모든 육체는 같은 것이며 줄줄이 발을 맞춰 행진하는 형상이었다. 어렸을 적부터 테레사에게 있어서 나체는 집단 수용소의 강요된 획일성을 상징했다. 모욕을 상징했던 것이다.」
하지만 자신의 정체성을 찾을 수 있는 정답이라고 믿었던 육체는 그녀(테레사)에게 죄악시되고 모욕감을 느끼게 함으로써 그 길로 가고자 하는 테레사를 모순상태에 빠뜨린다. 그녀는 이러한 모순을 해결하기 위한 방법으로 토마스에게 특별한 존재가 되고자하지만 다른 여자의 육체에서 찾을 수 있는 차이성을 수집하는 그로 인해 그녀는 혼란과 좌절에 휩싸이게 된다.
「~그녀는 모든 육체가 평등했던 어머니의 세계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그와 함께 살러 온 것이다.~그런데 이제 그 역시 그녀와 다른 여자들 사이에 평등의 선을 그었다. ~그는 다른 벌거벗은 여자들과 함께 행진하라고 그녀를 내몰았던 것이다.」p69
사비나는 남으로 인해 규정지어지는 정체성이나 획일성의 세계를 끊임없이 부정한다. 그녀는 그러한 모든 것을 부정하기 위해 그 대상을 '배신'한다. 그녀에게 '배신'이란 줄 바깥으로 나가 미지의 세계로 떠나는 것이다.
그녀의 존재는 현실 세계에서 무게를 버리고 그 세계 이면에 숨겨져 있는 본질의 세계로 날아가고 싶어한다.
「~사비나에게 진리 속에서 산다거나 자기 자신이나 타인에게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는 것은 군중 없이 산다는 조건하에서만 가능한 일이다. 우리 행위의 목격자가 있는 그 순간부터 우리는 좋건 싫건 간에 우리를 관찰하는 눈에 자신을 맞추게 되며, 우리가 하는 그 무엇도 더 이상 진실이 아니다. 군중이 있다는 것, 군중을 염주에 둔다는 것은 거짓 속에 사는 것이다.」p133
결국 그녀가 진정한 자신을 찾기 위해서는 그녀는 어떠한 대상에도 얽매이지 않는 존재 그 자체여야만 하는 것이다. 보통사람들이 삶의 무게의 버거움을 벗어나 가벼움을 추구했다면 사비나는 누군가에 의해 규정지어지는 무게는 그녀에게 무의미한 것이라며, 그 무의미함의 무게를 견딜 수 없어한다. 그녀에게 현실세계에서의 진실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기에 그녀는 진실을 속이고 배신하는 것을 통해 현실 이면에 존재하는 진실을 찾고자 한다.
「~그녀를 짓눌렀던 것은 짐이 아니라 존재의 참을 수 없는 가벼움이었다.
~우리의 행위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우리에게는 항상 철저하게 미지의 것이다. 사비나 역시 배신의 욕망 뒤에 숨어있는 목표가 무엇인지는 모른다. 존재의 참을 수 없는 가벼움, 이것이 목표일까? 」p144.145
이와 반대로 프란츠에게 진실이란 사적인 것과 공개적인 것 사이에 있는 장벽을 제거하는 것을 뜻했다. 그는 사적인 것으로 간직했던 '사비나'의 존재를 공개함으로써 자신의 진실성을 확보하게 되었고 이러한 경험은 그에게 이전과는 다른 삶을 선사한다.
「~그 순간, 그는 불현듯 자신이 불행하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고 놀랐다. ~중요한 것은 그녀가 그의 삶에 각인해 놓았던 황금빛 흔적, 마술의 흔적이었다. ~그의 자유와 새로운 삶이 부여한 이 예기치 못한 행복, 이 편안함~그것은 그녀가 그에게 남겨준 선물이었다.」p142
사비나는 그 누구에게도 무언가가 되지 않기 위해 프란츠를 떠나지만 누구보다 가벼웠던 그녀의 존재가 프란츠의 삶에 미친 영향은 큰 것이었다. 빨리 달리는 자동차가 약간의 핸들조작에도 방향이 급변하는 것처럼, 살면서
우리는 삶의 무게에 전전긍긍하지만 정작 삶을 변화시키는 것은 아주 조그마한 새털처럼 가는 털 한 올의 무게일수도 있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은 그들 각자의 삶을 바라본 작가의 시선을 통해 독자에게 던지는 '가벼움과 무거움'이라는 기원전 6세기 파르메니데스의 문제제기이다. 과연 삶에서 '가벼움'이 긍정이고 '무거움'이 부정인가? 책 속에 등장하는 4명의 삶을 지켜보며, 그들처럼 인생이라는 미완성의 초벌그림을 그리고 있는 나는 삶은 결국 반복되는 모순상태가 아닐까란 생각을 해본다. 작가는 자신의 일부분을 성격화한 인물들을 통해 자신의 인생에서 가보지 못했던 가능성의 길들을 탐험해 나간다. 그렇게 보면 소설을 통한 독서는 지도없는 광활한 칠흙같은 어둠 속의 우주에 박혀 있는 희미한 별자리찾기가 아닐까?
「~소설의 인물들은 살아 있는 사람들처럼 어머니의 육체에서 태어나는 것이 아니다. ~작가가 생각하기에는 아직까지 발견되지 않았거나, 본질적인 것은 언급되지 않았던, 근본적 인간 가능성의 씨앗을 품고 있는 메타포에서 태어난다.~내 소설의 인물들은 실현되지 않은 내 자신의 가능성들이다. ~그들은 하나같이 내가 우회해 갔던 경계선을 뛰어넘었다. ~소설은 작가의 고백이 아니라 함정으로 변한 이 세계 속에서 인간적 삶을 찾아 탐사하는 것이다. 」P254.255